영화 '가버나움'의 마지막 장면을 지지하는 이유에 관하여
나딘 라바키의 영화 '가버나움'을 러닝 타임 내내 고통스럽게 지켜보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당황하고 말았다. 출생 기록이 없는 아이 '자인'(자인 알 라피아)은 일련의 사건을 거쳐 약 12년 만에(이 아이는 출생 기록이 없고, 부모도 자식이 언제 태어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기에 12살 정도로 추정될 뿐이다) 신분을 갖게 된다. 자인이 신분증에 넣을 사진을 찍는 모습이 이 작품의 마지막이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아이는 무표정하다. 표정이 드러나진 않아도 얼굴엔 분노가 가득 들어찬 듯하다. 관객은 이 깊은 어둠을 이해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는 120분 간 레바논 베이루트 빈민가에 사는 이 소년에게 삶이 얼마나 가혹하고 절망스러운 것인지 보여줬고, 그는 나중에 가서는 자신을 태어나게 한 죄로 부모를 고소하기에 이르니까. 이 소년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광경일 것이다.
당황스러운 건 이것이었다. 웃을 수 없는 자인에게 누군가 웃어보라고 말하자 머뭇거리던 그가 전에 보여준 적 없는 혹은 보일 여력이 없던, 12살에 어울리는 해맑은 미소를 갑작스럽게 내보인다는 것. 그리고나서 자막이 뜬다. "자인을 연기한 자인 알 라피아는 실제로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살던 아이이고, 그와 가족은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 노르웨이에 정착했다"고. 자인의 미소가 잘못된 것일리 없고, 자인을 연기한 소년이 베이루트를 벗어나게 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가버나움'의 이 끝맺음이 나는 못마땅했다. 태어난 이후 내내 고달팠던 소년의 이 환한 웃음은 그가 겪은 일 전부를 한 때 과거로 남겨두는 것만 같았고, 자인을 연기한 아이가 얻게 된 노르웨이 정착이라는 행운은 마치 '그래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식의 섣부른 봉합으로 보였다. 아직도 베이루트엔 지독한 불운 탓에 웃을 수 없는 수많은 자인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을 일단은 비겁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완결성을 위해, 기승전결의 결 부분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인의 미소를 추출한 게 아닌가. 나는 이 결정이 작품의 가치를 상당 부분 깎아먹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소년 한 명을 떠올렸다. 자인과 똑같이 12살인 아키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무도 모른다'에서 도쿄에 사는 이 소년 역시 자인처럼 세상에 내버려진 뒤 살기 위해 조용히 발악한다. 이 영화 역시 아키라의 생존기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그린 뒤 '가버나움'이 자인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최악의 일 하나를 겪게 한 뒤 결론을 향해 간다. 다만 지독하게 현실적이어서 때론 잔인한 고레에다 감독은 라바키 감독과 달리 결론을 위한 결론에는 관심이 없기에 아키라를 구원하지 않는다. 아키라는 구조되지 못한 채 앞으로도 대체로 절망적인 현실을 견뎌야 하고, '아무도 모른다'는 이게 현실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 중 더 낫다고 여긴 건 역시 '아무도 모른다' 쪽이었다. 그건 고통스럽지만, 정확한 결론으로 보였다. 다소 편의적인 라바키의 선택보다는 고레에다의 결정이 삶의 진실에 가까워보였다고 해야 하나.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수년간 난민 아이들의 일상을 조사했고, 등장 인물 대부분을 실제 난민으로 채워넣은 뒤 그들의 경험을 영화 안에 녹여냈으며, 6개월 간 촬영하고 편집 기간만 2년이 걸렸을 정도로 공을 들여놓고 이 작품을 왜 이렇게 작위적으로 끝맺었는가. 그래서 두 작품을 다시 봐야했다. 그리고나서야 어렴풋이 단서같은 걸 찾아냈는데, 그건 두 영화에 공통적으로 담긴 인간 존엄과 죄책감에 관한 문제다. 난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를 더 좋은 작품으로 보지만, 이제는 '가버나움'의 결론도 지지할 수 있다. 이제부터 할 얘기들은 이 심경 변화에 관한 것이다.
온갖 밑바닥 생활을 겪은 것은 물론이고 엄마를 도와 환각 성분 음료를 제조하는 범죄에도 가담하는 자인이 부모를 증오하며 가출한 이유는 그들이 자인이 가진 최소한의 윤리 기준을 넘어서는 짓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인의 동생 사하르를, 그러니까 딸을 결혼 명목으로 한 상인에게 팔아 넘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아마도 경험에서 배웠을 자인은 사하르의 월경 사실을 필사적으로 숨기지만, 부모는 이를 알아챈 직후 11살 딸을 판다. 생존이 삶의 방식인 세계에서만 살았을 소년이 어떻게 이런 도덕 기준을 갖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인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산 부모는 나이 들어 도덕성이 전소됐고, 자인은 아직까진 그것을 지켜내고 있을 수도 있다. 자인의 아비는 자신을 "바퀴벌레"로 부르고, 자인은 동생을 돈주고 산 상인을 "개새끼"로 부른다.
소년이 겪어야 할 고통은 이게 끝이 아니다. 세상은 자인의 부모에게 내놨던 선택지를 아이에게도 똑같이 들이민다. '네 생존을 위해 생명을 팔 수 있는가.' 자인은 집을 떠난 뒤 에티오피아 출신 불법 체류자 미혼모 라힐을 알게 된다. 자인이 가여웠던 라힐은 이 굶주린 소년을 집에 데려오고, 자신이 일하러 가면 아들 요나스를 돌봐달라고 부탁하며 먹을 걸 준다. 라힐은 자인을 믿고, 자인은 라힐에게 의지하며 요나스를 돌본다. 세 사람은 새 가족이 된 듯하다. 그러나 라힐이 불법 체류 문제로 경찰에 붙잡히면서 문제가 생긴다. 이제 자인이 온전히 요나스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자인은 요나스를 필사적으로 지킨다. 또 다시 동생을 잃지 않겠다는 듯이. 그러나 12살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고, 한 상인은 요나스를 넘기면 스웨덴에 정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집요하게 유혹한다. 이윽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아키라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친구들과 편의점에 몰려간 아키라는 한 친구에게서 가게 물건을 훔치라는 요구를 받는다. "친구라면 해야지." 그는 고민한다. 어떻게 사귄 아이들인가. 그들은 엄마가 집을 완전히 나가고, 동생 세 명을 홀로 부양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가 얻게 된 유일한 위안이다. 이전에도 엄마는 자주 집을 비웠기에 아키라는 살림에 능숙하지만, 양육과 집안 관리는 12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다. 아키라와 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지 않아 도움 청할 곳도 마땅찮다. 그저 알아서 잘 살아야 할 뿐이다. 애어른이지만, 아키라 역시 친구가 좋은 평범한 아이. 그러니까 그 친구들은 재난과도 같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도피처였다. 그런데도 아키라는 물건을 훔치지 않고, 결국 친구 전부를 잃는다. 남의 것에 손대지 않는 것. 자인이 그랬던 것처럼 아키라에겐 이것이 최후의 윤리 기준인 것으로 보인다.
아키라가 겪어야 할 고통도 이게 끝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아키라를 더 극한 상황으로 몰아넣어 이 소년이 도덕성을 지켜낼 수 있을지 끊임 없이 시험한다. 친구들과 노느라 한동안 계획에 없던 지출이 생긴 탓에 이후 생활은 더 궁핍해진다. 설상가상 엄마가 매달 보내주던 돈도 오지 않는다. 집 주인은 집세가 밀렸다고 압박해오고, 하필이면 한 여름에 수도와 전기가 끊긴다. 마실 물과 씻을 물은 동네 공원에서 양동이와 빈 페트병에 퍼다 나르고,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아르바이트생에게 얻어와 끼니를 떼우며 버티지만, 아키라에겐 살아내야 할 날이 너무나 많다. 엄마는 돌아오지 않는다. 집세를 해결할 방법도 없다. 만약 아르바이트생이 바뀌기라도 하면 먹을 것조차 얻을 수 없게 된다. 아키라는 일을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다. 이제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결국 자인은 사람을 팔고, 아키라는 물건을 훔친다. 소년들은 그들이 정한 윤리 기준을 포기한다. 자인은 요나스를 판 돈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은 출생 기록이 없어 난민 지위를 얻을 수 없다는 것. 동생 사하르가 임신했다가 죽었다는 것. 분노한 자인은 급기야 동생을 산 상인을 칼로 찌른다. 아키라가 물건을 훔치는 건 동생 유키가 낙사(落死)하고 난 이후다. 공중 전화로 가 엄마에게 연락하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고, 더는 통화할 돈도 없다. 그렇게 이제 도둑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졌다. 게다가 아키라는 우연히 알게 된 여고생 사키가 원조교제를 해 번 돈까지 받는다. 사키가 집세로 쓰라며 그 돈을 처음 줬을 때 아키라는 강하게 거부했지만, 나중에는 죽은 유키를 위해 쓰기 위해 그 돈을 받고 자기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잘못된 방식으로 번 돈이라고 해도 이젠 받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인신매매가 됐든 절도가 됐든, 자인과 아키라가 한 행위의 경중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들이 마지막까지 손에 쥐었던 원칙을 스스로 놔버렸다는 게 중요하다. 두 아이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도 자신만의 윤리 기준을 절대 넘지 않았던 건 현재의 고통을 견뎌낸다면 삶이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고,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인간 존엄에 대한 본능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자인과 아키라가 내던진 건 결국 그들의 미래이고, 현재다. 그렇다면 이건 그들의 전부가 아닌가. 어떤 관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두 아이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인과 아키라가 이렇게 돼버린 이유는 딱 하나다. 자인의 법정 항변처럼 누군가 이들을 낳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로 죄를 지은 거나 다름 없는데, 두 소년이 겪어야 할 고통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젠 죄책감이 남았다. 자인이 팔아버린 요나스는 다행히도 구조된다. 자인이 부모를 고소하면서 그의 사연이 대중에 알려졌고, 덕분에 요나스는 라힐 품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자인이 생명을 담보 잡아 돈을 챙겨 레바논을 떠나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죄책감을 짊어져야 하는 건 자인이다. 요나스가 구조된 건 순전히 운이 좋았을 뿐이다. 사하르를 팔아버린 자인의 부모는 냉혈한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괴로워하는 장면은 수차례 나온다. 자인은 너무 일찍, 그리고 오래 그 고통을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아꼈던 동생 사하르가 그의 가슴에 남을 것이다.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결혼을 더 필사적으로 막았더라면, 동생이 죽는 걸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자책이다.
죄책감은 아키라도 괴롭힐 것이다. 이런 것들이다. '유코가 의자에서 떨어지던 그날 나는 야구부 연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다가 우연히 참여하게 됐고,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서 경기를 뛰었다. 그 사이 유코는 죽었다. 애초에 내가 친구들과 노느라 생활비를 낭비하지 않았다면 동생들을 더 잘 돌볼 수 있었을 것이고 사키는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도둑질을 하게 된 것도, 원조교제를 해서 번 돈을 받게 된 것도 내가 돈을 아껴 썼다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물론 애초에 아이들을 버린 엄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조차 모르기에 혹은 알기를 원하지 않기에 감당해야 할 고통도 없다. 죄책감은 아키라가 대신 짊어지게 될 것이다. 엄마가 보낸 새 생활비는 이 모든 일이 발생한 후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쿄의 소년은 이미 너무 많은 일을 겪어버렸다.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 고레에다 감독이, '아무도 모른다'가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라는 건 이런 것이다. 12살 소년은 자신에게 있던 인간 존엄을 스스로 내던진데다가 깊은 죄책감까지 안게 됐다. 아키라에게 이런 절망을 안기고도 그에게 아주 작은 희망도 허락하지 않다는 것. 아키라와 동생들은 유코가 죽은 후에도 예전과 다름 없이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받아오고, 공원에서 물을 퍼다 나른다. 카메라가 담고 있듯이 강물은 계속 흐르고, 전차는 어김없이 지나간다. 나는 앞서 이 결론을 '고통스럽지만 정확하다'고 했는데, 이 영화를 다시 본 후엔 이 문장을 조금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정확하지만 너무 고통스럽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키라와 동생들이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이다. 그들은 체념한 듯 담담하고, 아키라는 언제나 그랬듯 무표정하다. 이건 정말이지 다시 보기 힘겨운 풍경이다.
이제 '가버나움'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인을 활짝 웃게 한 라바키 감독을 이해할 수 있다. 12년 평생이 오직 생존을 위한 시간이었고, 온갖 학대에 시달렸으며, 살기 위해 자신의 마지막 인간성까지 포기해야 했고, 수많은 죄책감까지 떠안게 된 소년에게 잠깐 미소를 되찾아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인가.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자인에게 너희의 미래는 현재와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직설하고, 관객을 향해 현실을 직시하며 충분히 괴로워하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희미하게 존재하는 희망이라고 해도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게 뭐가 그렇게 잘못이란 말인가. 라바키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 않았겠지만, 마치 온갖 삶의 곡절을 겪은 것처럼 구겨져버린 아이의 얼굴을 도저히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 미소를 억지로라도 뽑아낸 것이라 해도 앞으로 자인에게 그렇게 웃을 날들이 많이 있기를 기원하는 거라면 난 이 결정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