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그레이가 10년 간 세 편의 영화를 만들며 도착한 곳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는 차분하고 무표정한데, 그의 얼굴엔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한 확고한 믿음 같은 게 있어 보인다. 로이의 몸은 미동조차 없다. 카메라는 로이의 얼굴을 또렷하게 비춘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말하자면 이건 여지가 없는 엔딩이다. 주인공이 자기 심경과 의지를 명확하게 피력하고, 카메라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모두 담는다. 마치 일종의 확신이자 선언 같다. 현 시점에서 만큼은 고민할 게 남아있지 않다는 얘기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난 그들의 짐을 나누고, 그들은 내 짐을 나누면서…난 살아갈 거고 사랑할 겁니다." 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제임스 그레이의 <애드 아스트라>(2019) 마지막 장면, 마지막 대사다.
그레이의 영화는 움직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사람들이 쉼 없이 움직인다. 그레이는 그들의 이동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데뷔 이후 10여 년 간 갱스터 영화를 만들었던 그는 2008년 로맨스 영화 <투 러버스>를 내놓은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적 야망을 펼치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이 <이민자>(2013)였다. 바로 이 작품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나오는 그레이의 첫 번째 영화다. 이민자는 말 그대로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음 작품인 <잃어버린 도시 Z>(2016)의 '잃어버린 도시'에는 미지의 장소로 가는 탐험의 이미지가 있다. ad astra(애드 아스트라)는 '별을 향하여'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이 말에도 역시 이동이 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일관된 제목 작법이다.
그레이의 최근작 세 편은 단 한 편의 영화다. <이민자>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폴란드에서 미국 뉴욕으로 간 간호사가 있다. 영화는 자유의 여신상을 비추며 시작해 주인공이 또 한 번 어디론가 이동하는 뒷모습을 흐릿하게 담으며 끝난다. <잃어버린 도시 Z>에는 고대 문명을 찾아 아마존에 간 탐험가가 있다. 아마존 정글 속 어느 부족이 피워놓은 횃불을 보여주며 문을 열고 여전히 아마존을 헤매는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문을 닫는다. 영화는 끝났어도 그들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한 엔딩이다. 반면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지구에서 해왕성까지 간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인 <애드 아스트라>는 태양을 비추며 시작해 로이가 지구에 다시 돌아오면서 종료된다. 그제서야 세 편 내내 쉬지 않던 그레이 영화의 이동이 멈춘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멈춰 섰는가.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애드 아스트라>의 마지막 시퀀스가 보여주는 확신에 찬 멈춤은 앞서 행해진 수많은 이동의 목표 지점이 바로 그 정지 상태라는 걸 의미한다. 로이는 이동이 끝났음을 공표하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고백한다. 반대로 얘기하면 그동안 그레이 영화 속 사람들이 멈추지 못하고 끊임 없이 움직여야 했던 건 그들이 현재 가고 있는 삶의 방향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묻는다.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 편의 영화는 모두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탐구로 보인다. 이 영화들은 그레이 자신이 오랜 시간 해온 고민들에 관한 내밀한 기록이다.
1. 삶이라는 고통, 자유의 여신상의 뒷모습
삶은 더 나아질 수 있는가. 그레이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고, <이민자>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폴란드 여성 에바(마리옹 꼬띠아르)가 기대하는 건 평범한 삶이다. 이 여자는 1920년께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유럽을 휩쓴 혼란을 피해 그 다음 해 동생 마그다(안젤라 사라피언)와 함께 대서양을 건넌다. 영화가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아메리칸 드림. 그리고나서 뉴욕 엘리스섬 입국 심사장에 긴장된 모습으로 선 자매의 모습이 이어진다. 심사를 목전에 둔 언니는 동생에게 말한다. "에디타 이모만 찾으면 함께 안전하게 살 수 있어. 가정도 꾸리고 아이도 많이 낳자." 야망 같은 건 없다. 그저 삶이 이전보다 안정되길 바랄 뿐이다. 심사만 통과하면 이 바람은 이뤄질 것만 같다.
그레이의 조부모가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으로 유럽에서 건너와 뉴욕에 정착한 이민자라는 건 지나칠 수 없는 단서다. 말하자면 1969년생 그레이는 에바의 자손이다. 그는 이민자로 사는 삶의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조부모와 부모에게서 수없이 들었을 테고, 목격했거나 직접 겪었을 수도 있다. 에바가 아메리칸 드림의 신화 대신 고향 폴란드에서조차 경험하지 못했을 고통을 겪게 하는 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그레이에게 계승된 실제 경험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이민자>는 이렇게 정의된다. 실존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 실화 영화. 그 실화라는 건 이런 거다. 기대와 달리 삶은 대개 악전고투라는 것. 그러면서도 인생이 결국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는 믿음을 버릴 순 없다는 것.
에바는 가시밭길을 걷는다. 건강에 문제가 있는 마그다는 함께 입국하지 못하고 6개월 간 치료소에 있어야 한다. 게다가 마중 나오기로 했던 이모 부부는 오지 않고, 입국 관리소 직원은 이모 집 주소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추방당할 위기에서 브루노(왓킨 피닉스)라는 남자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입국에 성공하지만, 오갈 데가 없는 에바는 브루노가 단장으로 있는 무명 극단에 속해 술 취한 남자들을 상대하는 일을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브루노의 요구로 에바는 결국 몸을 판다. 에바가 잠에서 깨는 순간과 그의 삶이 위기에 빠지는 시점은 언제나 맞붙어있다. 꿈(아메리칸 드림)은 잠잘 때 꾸는 것이고,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그러고보니 에바는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미 겁탈당했다.
삶은 고통이다. 평범한 연출가라면 에바를 연민했겠지만, 현실주의자 그레이는 삶을 쉽게 긍정할 생각이 없다. 그레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건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에바가 만난 두 명의 남자 브루노와 올랜도(제레미 레너)가 증거다. 브루노는 에바를 사랑하지만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에바를 밑바닥까지 추락시킨다. 그는 현실의 상징이다. 에바에게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함께 떠나자고 말하는 로맨티스트 올랜도는 희망의 상징처럼 보인다. 브루노가 올랜도를 죽이는 건 현실이 희망을 살해한 것인가. 그러나 올랜도는 고작 도박으로 번 돈으로 에바를 돕겠다는 남자다. 그 역시 또 다른 현실이다. 에바는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그레이는 이미 에바의 고난을 예고하고 있었다. 앞서 <이민자>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여주며 시작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건 여신의 앞모습이 아니라 뒷모습이다. 날씨가 흐려 그 뒷모습조차 선명하지 않다. 카메라가 서서히 자유의 여신상과 멀어지면, 이 미국의 상징을 바라보고 있는 브루노의 뒷모습이 천천히 화면 안으로 들어온다. 브루노는 쉽게 희망을 허락하지 않는 비정한 현실의 상징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꿈(여신)은 멀어지고, 현실(브루노)이 다가온다. 그레이는 이 장면 하나로 에바가 자신의 운명을 걸고 도망치듯 이동해 도착한 미국이 폴란드보다 결코 낫지 않은 곳이라는 걸 암시하고 있었다. 이건 우리가 이 한정된 세계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한, 장소가 어디든 삶은 그리 아름답지 않을 거라는 체념이다.
에바는 뉴욕을 떠나 캘리포니아로 가기로 했다. 올랜도는 그곳을 "언제나 태양이 빛나는 곳"이라고 했다. 춥고 어두운 동부의 겨울과는 다른 장소다. 그곳에 가면 뉴욕에서 이루지 못한 에바의 바람이 이뤄질까. 그레이는 그렇게 보지 않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에바는 동생을 엘리스섬 치료소에서 빼내와 다시 뉴욕 본토로 들어가는데, 이 시퀀스에는 재회의 감격이 있을 뿐 미래에 대한 확신은 없다. 자매는 뉴욕 본토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아주 작은 배에 올라타 바다를 건넌다. 그 모습은 위태롭기만 하다. 그들은 뉴욕에서 서부행(行)을 함께 준비하게 될 것이다. 다만 캘리포니아엔 뉴욕에서 겪은 삶의 고통이 없을 거라고 도저히 장담할 수 없다. 사는 게 모두 고통이라면 이런 삶엔 어떤 의미가 있나. 이 엔딩은 불안하다.
2. 아마존은 영국을 견뎌낼 수 있게 해주나
그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게 그레이의 두 번째 고민이다. 현실에 고통이 상주하는 거라면, 그저 그 괴로움을 버텨내는 것만이 현실이라면 생(生)의 허무함을 어떻게 견디느냐는 것이다. 살기 위해서 그레이는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진시킨다. 이 이동의 동력은 생존이라는 가치를 넘어서는, 우리가 가진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할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할 거라는 확신이다. 그것을 향해 정진하고 찾아낸다면 현실의 냉혹함 역시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바람이다. 그레이의 이런 탐구가 <잃어버린 도시 Z>(이하 <Z>)에 있다. <이민자>는 도시에서 도시로 움직이는 영화였다. 반면 <Z>는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이룩한 영국과는 정반대의 미지의 땅 아마존으로 이동한다.
<Z>는 <이민자>의 후속편이다. 퍼시 포셋(찰리 허냄)이 처한 상황은 두 영화의 연결 고리다. 영국군 소령인 포셋은 에바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이 영화 첫 번째 시퀀스인 사냥 장면에서 포셋이 그깟 사슴을 잡기 위해 위험천만한 시도를 하는 건 유력 인사들에게 잘 보여 승진하기 위해서다. 실력을 인정받아 그들이 주재하는 만찬에 간다면 진급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술과 도박에 빠져 가문의 이름을 더렵힌 아버지 탓에 지금껏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나이는 먹어가고 부양해야 할 가족도 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번 아버지 문제로 만찬에 가지 못하고 이번에도 진급이 좌절된다. 포셋 역시 삶의 개선을 원하나 에바에게 그랬던 것처럼 포셋에게도 희망은 쉽게 오지 않는다.
<Z>는 전작과 다른 길을 간다. <이민자>가 에바를 현실 안에서 투쟁하게 했다면, <Z>는 포셋을 현실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그곳이 아마존이다. 포셋은 아마존에 세 번 간다. 첫 탐험은 생존 투쟁이었다. 임무를 부여받았고, 그것을 완수하면 가문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이 바뀌는 순간은 첫 탐험의 끝, 그러니까 생존을 위한 투쟁의 막장에서 고대 문명의 증거로 추정되는 물건을 발견한 이후다. 돌아온 포셋은 다시 아마존에 가 고대 도시를 발견하겠다고 발표하며 말한다. "우린 교회의 편견에 오랜 세월 물들어 앞선 문명의 가능성을 못 믿고 있다." 바꿔 말하면 삶에 치여 큰 꿈을 이루겠다는 야망을 잃고 있다는 것. 포셋은 이제 현실을 뛰어넘는, 현실보다 중요한 이상(理想)을 따르기로 한다.
이를 테면 <Z>가 탐험하는 건 아마존이 아니라 삶이다. 이때 <Z>가 실존 인물을 다루고 있다는 건 중요한 사실이다. 포셋은 1867년에 태어나 1925년에 죽었고, 영국군 장교였으며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던 동명 실존 인물. <이민자>에서 에바의 삶이 이민자였던 그레이 조부모의 실제 경험에 의해 현실성을 부여받는다면, <Z>에서 포셋이 밟아가는 삶의 경로는 진짜 그렇게 살았던 한 인간의 기록에 의해 정당성을 갖는다. 그레이가 영화를 통해 '산다'라는 실존적 문제를 탐구하는 방식은 머릿속으로만 고민하고 어떤 가능성들을 추측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생생한 사례들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신중히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인다. 결국 이건 그가 다루고 있는 주제를 향한 진정성의 문제다.
그래서 <Z>에는 불안감이 어른거린다. 포셋은 유럽 문명보다 앞선 고대 문명(이상을 좇는 삶)이 있다는 걸 확신한다. 그러나 그레이는 <이민자>에서 캘리포니아로 가겠다는 에바의 선택을 온전히 지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포셋의 확신을 의심한다. 먹고 사는 문제를 두고 다투는 게 아무리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해도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면서 얻는 정신의 고양이 그 현실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줄 리는 없지 않나. 삶에 내재된 근원적 괴로움을 완전히 극복하게 해주는 가치가 존재하긴 하는지도 알 수 없다. 퍼셋이 "인류 역사의 새 장을 쓰게 될" 고대 문명을 찾아 아마존을 헤매는 동안 아내는 자식을 홀로 키워내야 하고, 아이들은 아버지 없이 자라야 한다. 포셋 일행이 식량(먹고 사는) 문제로 두 번째 탐험을 포기하게 되는 건 상징적이다.
세 번째 아마존 탐험을 떠난 포셋은 돌아오지 못한다. 그레이는 포셋이 살아가는 방식의 효용을 의심하면서도 그 삶의 태도 자체를 깎아내리진 않는다. 이때 아내 니나(시에나 밀러)의 존재는 중요하다. 니나는 퍼셋이 아마존에 갈 때마다 홀로 현실의 삶을 견뎌야 했으나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남편을 비난했던 단 하나의 이유는 현실을 함께 견디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상향을 찾아 떠나는 여정에 자신을 합류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니나는 퍼셋에게 말했었다. "인간이 지각하는 범위는 이해의 범위를 넘어야 한다. 천국은 왜 있겠는가?" 마음속에 품은 꿈과 이상이 결코 실현되지 못한다 해도 그것들을 추구해가는 과정에서 얻는 만족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게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다.
그럼 에바처럼 살지 않고 퍼셋처럼 살면 되나. 그레이는 확답하지 못한다. <Z>의 마지막 시퀀스는 그래서 새겨둘 만하다. 니나는 왕립지리학회를 찾아가 실종된 퍼시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말만 듣는다. 이에 그는 울먹이며 답한다. "이제 와서 의심할 순 없다." 남편의 방식을 지지했으나 삶이 나아지지 않았단 걸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팩트는 이것이다. 그는 영국에 있고, 남편은 물론 동행했던 아들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니나는 "괴롭고 고통스럽다. 지금도 두려움을 밀어내고 있다"고 한다. 그 아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데, 아마도 그건 남편과 함께 추구했던 삶의 방향을 자신도 더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마존 정글 갇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3. 더 멀리 아주 멀리, 질문을 남기 않는 이동
그레이는 <이민자>와 <Z>에서 어떤 대안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하는 듯하다. 삶의 좌표가 없는 상황. <애드 아스트라>의 로이는 허무주의자다. 에바가 현실 세계에서 분투 중인 사람이라면, 퍼셋은 이상 세계로 떠나버린 사람이다. 로이는 현실과 이상 어디로도 가지 못한 채 표류한다. 미국 우주사령부 소속 소령이자 우주 비행사인 그가 일하는 곳은 지구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상공이다. 지구(현실)라고 할 수 없고, 우주(이상)라고 할 수도 없는 장소다. 로이는 "여기 있으면 편안하다"고 말한다. 영화 초반부에 우주복을 입은 로이의 모습이 인서트 되는데, 이 장면에서 그는 비행하는 게 아니라 무중력 상태로 부유하는 것 같다.
로이의 행보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우리는 로이 같은 사람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비티>(2013)의 라이언 스톤(산드라 불록)과 <퍼스트맨>(2018)의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이다. "늘 그렇듯 난 또 비행 중이야." 로이와 관계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 아내 이브(리브 타일러)에게 썼다 지운 편지 내용 중 일부분이다. 이 말은 그의 삶의 행태가 지구(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 한 상태라는 걸 뜻한다. 스톤 역시 그렇다. 네 살 된 딸이 사고로 죽었고, 그 소식을 운전하는 도중에 들었기에 그날 이후 그의 삶은 그저 아무런 의미 없이 집과 직장을 운전해 이동하는 게 됐다. 그러다가 우주에서 일하게 됐다. 그는 우주의 가장 좋은 점이 "고요함"이라고 말한다. 스톤의 삶에도 중력(그래비티)이 없다.
<퍼스트맨>에서 암스트롱은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딸을 잃고 슬픔에 잠긴 아버지다. 그가 달 탐사 프로젝트에 지원한 이유는 자식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 집중해야 할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딸이 생각날 때마다, 프로젝트 시험 단계에서 동료들이 하나 둘 죽어나갈 때마다, 삶이 괴로울 때에 그는 망원경을 들어 달을 본다. 암스트롱의 달 착륙에는 어떤 환희도 없다. 지구에서 벗어나 완전히 홀로 있게 됐다는 감각만 있다. 로이와 스톤과 암스트롱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중에 떠있는 사람들이다. 로이는 계속 비행 중이고, 스톤은 지구의 소란에서 벗어나며, 암스트롱은 달로 간다. "눈은 늘 출구를 바라본다." 로이의 이 말은 스톤과 암스트롱 속마음이기도 하다.
<애드 아스트라>가 <그래비티> <퍼스트맨>과 구분되는 건 이제부터다. 로이는 지구로 돌아가지 않지만 스톤과 암스트롱은 지구로 돌아간다는 것. 임무 수행 중에 사고를 당해 우주 미아가 돼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스톤은 지구로 생환한다. 암스트롱 역시 달 정복 미션을 완수하고 곧바로 돌아온다. 의문은 이것이다. 스톤과 암스트롱은 왜 돌아왔는가. 이 영화들은 그들이 지구로 돌아가는 이유를 내놓지 않는다. 그토록 삶이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이었는데, 반드시 지구로 복귀해야 할 명분이 있긴 한 건가. 스톤은 지구에 있을 때도 사실상 죽은 것과 다름없이 살았다. 암스트롱에겐 상실의 아픔이, 남아 있는 가족의 존재보다 커보였다. 그러면 살아있기 때문에 살고, 돌아가야 해서 돌아가는 것인가. 이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다.
석연치 않은 귀환은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어떻게 살겠다는 것인가.' <그래비티>는 스톤이 지구 복귀 후 다시 태어났다는 걸 정자와 난자가 만나 생명이 탄생하는 과정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무중력 상태였던 그의 삶은 스톤이 두 발을 땅에 딛는 마지막 장면을 기점으로 이전과 다른 것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것과 삶에 의미가 생긴 것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기에 이 엔딩은 극적 봉합으로 보인다. 우린 스톤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 이제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거냐. <퍼스트맨>의 마지막 장면은 지구로 돌아와 달이 아닌 아내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는 암스트롱의 모습이다. 아마도 그가 달에서 딸을 마음속에 묻은 채 현실의 가족에게 돌아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때도 우린 물을 수밖에 없다. 암스트롱은 정말 괜찮은 것인가.
이건 동선과 서사의 불일치다. 스톤과 암스트롱은 '지구-우주-지구' 순으로 이동한다. 이들의 움직임이 지구에서 완전히 종료됐다는 건 두 사람이 지구에서 발생한 문제를 우주에서 해결한 뒤 다시 지구로 돌아왔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운동의 최종 종료는 동시에 서사의 종료가 돼야 한다. 이동을 끝낸 인물의 삶에는 더 이상 질문할 거리가 남아있지 않아야 한다. <이민자>와 <Z>가 어딘가로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마무리된 것은 이야기가 아직 닫히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그레이의 고민은 그래서 <애드 아스트라>까지 이어졌다. <그래비티>와 <퍼스트맨>은 충분히 멀리가지 못하고 급하게 지구로 돌아온다. 스톤과 암스트롱의 가슴을 뚫어놓은 허무를 다 채우지 못 한 채 그들을 귀환시킨다.
<애드 아스트라>는 필연적이다. 그레이는 우주영화를 만들기 위해 우주가 배경인 이야기를 만든 게 아니다. 그는 삶의 허무함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할지 모르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가능한 멀리 가보기로 작정한 듯하다. 할 수 있는 한 멀리 가본다면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답이 없더라도 상관없다. 최대한 멀리 갔는데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답이 없다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먼 곳은 태양계의 끝 해왕성이고, 로이는 지구에서 달로, 달에서 화성으로, 화성에서 해왕성으로 간다. 태양을 보여주며 시작하는 인트로는 로이의 여정이 태양계로 확장된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다면 태양을 보던 시선이 다시 지구 쪽으로 옮겨오는 이 이동은 로이가 지구로 돌아올 거라는 의미인가.
4. 우주의 끝, 아름답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
로이는 브라이언이다. 포셋은 세 번째 아마존 탐험을 장남 잭과 함께 떠났다. 포셋의 차남인 브라이언은 영국에 남겨졌고 어머니 니나, 동생 조안과 함께 현실을 살았다. 우린 브라이언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길이 없었는데, <애드 아스트라>에서 알게 됐다. 로이의 아버지 클리포드 맥브라이드(토미 리 존스)는 인간 이외의 지적 생명체를 찾아 29년 전 태양계 외곽 탐사를 떠났고 13년 전 실종됐다. 고대 문명을 찾아 아마존에 간 포셋의 경로와 일치한다. 로이는 브라이언처럼 지구에 남겨졌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해왕성 부근에 살아있다는 얘길 듣고 로이(브라이언)는 클리포드(포셋)를 만나러 간다. 그레이는 브라이언(로이)을 통해 포셋(클리포드)이 결정한 삶의 방식을 검증한다.
아버지의 생존은 두 가지 의문에 답을 줄 것이다. '긴 여정 속에서 뭘 보았나.' '왜 돌아오지 않았는가.' 지적 생명체는 곧 포셋이 찾던 고대 문명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무관한 것들이다. 클리포드(포셋)는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삶을 의미있는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 그저 살아가는 것 이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그것을 손에 거머쥘 것을 요구했다. "인간은 불가능을 극복해야 한다." 로이가 느끼는 삶의 허무가 아버지의 방식으로 극복되는 것이라면 아버지처럼 사는 게 맞을 것이다. 반대로 아버지의 방식으로도 이겨낼 수 없는 거라면 아버지의 판단을 기각해야 한다. 이건 짐작만으로 불가능한 작업이다. 아버지가 살아있으니 아버지를 직접 만나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로이는 해왕성까지 가기로 한다.
로이는 뛰어난 우주 비행사이지만 클리포드 같은 야심가가 아닌 평범한 남성에 가깝다는 건 중요하다. 그레이가 들여다보려는 삶은 특별한 능력을 갖고 위대한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 소수 사람의 것이 아니라 남들처럼 태어나 살고 죽는 필부필부(匹夫匹婦)의 그것이다. 맥브라이드는 로이에게 말했다. "무한한 우주를 놔두고 지구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다니." 아들은 아버지만큼 큰 꿈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네 알량한 꿈(small ideas) 따위엔 관심 없었다." 로이는 아버지를 동경해 우주 비행사가 됐으나 "신의 일을 하고 있다"는 아버지만큼 원대한 꿈은 없었다. 본성은 땅에 발을 붙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상황. 그러다가 아버지는 우주 멀리 사라졌고, 그날 이후 로이는 어디로도 향하지 못한 채 표류했다.
로이가 화성에서 해왕성으로 가는 과정이 고통스럽게 묘사되는 건 그것이 79일 4시간 8분이 걸리는 여정이기 때문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심리적 무중력 상태로 살고 있는 현재와 닮아있어서다. 우주선이 목성과 토성을 지나는 동안 아내 이브의 목소리와 아버지 클리포드의 목소리를 로이는 함께 듣는다. 이브는 "난 늘 혼자 있는 느낌"이라고 말하고, 클리포드는 "가장 중요한 질문의 답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로이가 말한다. "무중력 상태의 긴 여행으로 내 심신은 지쳐가고 있다. 더는 못 버티겠다. 난 혼자다. 난 혼자다." 이것은 마치 <이민자>와 <Z>를 만들고도 어떤 결론도 내리지 못한 그레이 자신의 고뇌 같다.
태양계 끝에서 아버지를 만난 아들이 확인한 건 그의 불행이다. 애초에 이 모든 이동의 목표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를 극복하고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지적 생명체 존재에 관한 연구 성과는 중요하지 않다. 클리포드는 시인한다. "모든 데이터를 검토했으나 지적 생명체의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과학이 부정하는 존재를 찾아내야 된다"고 모순된 주장을 한다. 클리포드는 같은 목표를 가졌던 대원들이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자 그들을 모두 죽이고, 지구에서 가장 멀고 아무도 없는 우주에 홀로 남았다. 그에겐 더 이상 연구할 게 없고, 백내장 탓에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클리포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니까 그는 더는 위대한 탐험가가 아니라 현실로 돌아가 삶을 살아갈 용기가 없어 지구로 오지 못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지구로 돌아가자는 아들의 제안을 물리치고 우주에서 죽는다. 클리포드는 자신의 방식으로 삶의 고통과 괴로움과 무의미를 극복해내지 못했다는 걸 로이에게 확인당했다. 그는 자신의 탐험이 실패했다는 걸 아는 대원들을 지구로 돌려보내지 않음으로써 우주에 남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적 생명체가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을 속인 셈이다. 아버지는 사실 지구에서의 삶이 두려워 우주로 탈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프루이트 대령은 로이에게 말했었다. "탐험 비행은 때로 탈출 수단이 돼. 자네 아버지가 우리로부터 숨었을 가능성도 있어." 로이의 방문으로 클리포드의 연구 결과는 지구에 공표될 것이다. 지구에서의 삶이 무의미했던 아버지에게 이제 우주에서의 삶도 무의미해졌다. 그는 더이상 살 수가 없다.
"아버지가 연구한 우주는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멋진 겉모습 속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빛도 어둠도.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앞에 있는 건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연구 기록을 확인한 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는 <Z>에서 그랬던 것처럼 삶에 내재된 근원적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적 가치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식 자체를 탄핵하지는 않는다. 다만 삶을 더 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택했던 수단이 유일한 목적이 될 때 그러한 삶의 방식은 주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할 뿐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이제 로이는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해 지구로 돌아간다. 아버지의 우주선을 폭파한 힘은 로이가 탄 비행기의 추진력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가 택한 삶의 방식의 검증을 끝냈다.
5. 이동의 끝, 아름답진 않아도 인간을 향해
로이는 왜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가.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삶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무의미한데, 이 지독한 허무주의자가 갑자기 세상을 긍정하게 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삶이 고통스럽고 무의미하기 때문에 로이는 지구로 간다. 클리포드가 똑같은 이유로 지구에서 가장 먼 곳까지 도망쳐왔다면, 이제 로이는 그 괴로움을 온전히 맞닥뜨리기 위해 지구에 발을 붙이려 한다. 아버지가 삶이 원래 그렇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고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로 그 고독을 격파하려 했다면, 아들은 삶이 원래 그렇다는 걸 인정하고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과 함께 그 고독을 버텨내려 한다. 아버지는 옆에 아무도 두지 않았지만, 로이에겐 자신을 향해 웃어보이며 "그댄 사랑스럽다"고 말해줬던 아내 이브가 있다.
그레이가 보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는 <이민자>에서도, <Z>에서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하던 순간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손을 놓지 않았다. 캘리포니아에서 삶이 뉴욕에서의 삶보다 낫지 않을지라도 에바는 캘리포니아에선 동생 마그다와 함께 현실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포셋은 결국 미지의 아마존 정글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는 그 마지막 여정을 아들 잭과 함께했기에 덜 두려웠을 것이다. 클리포드는 "이제 우리가 서로의 희망이에요"라고 말하는 로이의 말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는 우주에 남았다. 지구에 착륙해 기진맥진 한 채 우주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로이에게 우주사령부 소속 군인들이 다가온다. 카메라는 그들이 로이에게 내미는 손을 클로즈업 한다.
'ad astra'는 'per ardua ad astra'에서 따온 말이다. 전체 뜻은 '역경을 헤치고 별을 향하여'다. <이민자>에서 시작돼 <Z>를 거쳐 <애드 아스트라>로 이어진 그레이 영화의 이동은 지구로 돌아와 끝난다. 그레이는 삶이라는 역경을 헤치고 결국에 도달해야 할 장소가 인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의지할 사람이 있다면 그걸로 우리 삶이 모두 괜찮을 거라는 안일한 긍정주의가 아니다. 삶은 계속 고통스러울 것이고 우리는 도저히 끝나지 않는 그 고통들이 선사하는 삶의 무의미에 몸부림치겠지만, 그래도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건 옆에 있는 사람뿐이라는 비관론적 희망주의다. "삶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가까운 사람들과 의지하며 살면 되죠. 난 그들의 짐을 나누고, 그들은 내 짐을 나누면서…난 살아갈 거고 사랑할 겁니다."
(글) 손정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