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의 목소리
창작 뮤지컬을 하나 봤다. 잘 모르는 작품이고, 심지어 뮤지컬은 원래 모른다. 별 기대 없이 봤는데 흥이 나고 재미가 있었다. 그걸 왜 재밌었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어렵다. 음악이나 무대공연을 몰라서다.
지금부터는 창작 뮤지컬을 보기 전에 다소 복잡했던 심정이 보고 나서 개운해진 사정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최근에 인친님이 쓴 한 에세이집에 대한 평가를 읽었다. 대체로 괜찮다는 평이 있는 책이었고, 나도 훑었을 때 다소 과장한 측면은 있지만 나름대로 입담을 듣는 느낌이라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인친님은 “별로”라고 했다.
그날은 그런 일이 겹치는 날이었나 보다. 우연히 들어간 웹사이트에서 출간된 지 몇 년 된 에세이집을 너무 좋게 읽으셨다는 블로그 주인의 글이 반가웠다.
그 책에 실린 몇 편의 글만 읽었던 내가 생각하기론 꽤 잘 썼다고 생각하는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을 소개하며 덧붙인 글이 그랬다.
“지인은 읽자마자 정말 별로라고 했지만.”
나는 그 진솔한 말에 조금 킥킥대는 웃음이 났다. 누군가에게는 별로라도 누군가에게는 찬사를 받는다. 굳이 별로인 걸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동일한 책도 인터넷 서점에 따라서 다른 평점이 나오기도 한다. 모두가 생각한 단점이 누군가에겐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신기한 건 나는 별로였는데, 누군가가 재밌다고 하면 나도 재밌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나는 재밌었지만 남들에게 그 말을 차마 못 할 때도 있는 것이다. 평가를 받고 받다가 최종적으로 대다수가 재밌다는 평을 내리면 그래도 썩 재밌는 책이 되는 것 같다. 나에겐 사람들이 그렇게 다들 다르다는 게 참 재밌는 일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 작가가 이 글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에 생각이 미쳤다. 아무래도 내가 최종 원고를 수정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9월 초, 처음 수정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약 35개의 꼭지를 하루에 한 개씩 한두 시간씩 들여서 고친다면 10월 1일에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여러분도 예상하다시피, 아직 나는 수정을 끝내지 못했다.
생각보다 많은 일이 일어났고, 생각보다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가족들의 스케줄을 조정하고, 직장 일을 해결하고 나면 내 일은 제일 후순위로 밀린다. 이 일은 아직 내 업이 아니기에, 먹고사는 일에 앞서지 못한다.
먹고사는 일과 진짜로 사는 일은 다르다.
지금의 나와 그 글을 처음 쓴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메워지질 않는다. 그걸 썼을 때의 힘든 일상들이 여과 없이 거기에 빼곡하게 쓰여 있는 글들이 몇 개 있다.
그걸 다시 읽고 있노라면 일단은 그때가 떠올라서 괴롭고, 이걸 이대로 두자니 두렵고, 삭제하자니 치열하지 못하다. 그 중도를 지키는 일이 아슬아슬하다. 고민만 하다 시간이 가고 만다.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일이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누군가에겐 필요한 이야기일 테고,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이야기이다. 글이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는 응당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물론 지금 필요 없다고 해서 나중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또한 누군가의 시간과 비용을 잡아먹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지금의 나와는 다르지만, 언젠가의 내가 했던 생각들이 누군가에게 닿아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도 좋은 것이다. 그럴 기회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행운이다.
하지만 어느 가까운 누군가에게 별로라는 평을 받으면 그건 잠시 슬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잠시일 것이다. 가까운 누군가들은... 아마도... “읽어봤어?”라고 물으면 이렇게 답하겠지.
“어, 어, 어. 읽었지. (당황한다)” 또는 “이제 읽으려고.(어색하게 웃는다)” 또는 “안 읽어도 네가 무슨 말 썼는지 알겠어.” 셋 중 하나다. 이런 상상을 하면, 이건 이것대로 웃길 뿐이다.
문제는 무관심이 아니라 비평이다.
.
.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