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리수와 주먹밥으로부터
엄마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날 퇴근하고 나서였다.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는 도리어 웃으면서 “야, 놀라지 마라.” 하는 거였다.
엄마의 웃음에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나 묻는다.
“얼마나, 어디가 다쳤는데?!!”
엄마는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자주 웃는다. 내가 걱정할 까 봐 그러는지는 안다. 그럴 때마다 안심이 되기보다는 화가 나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유, 턱 조금 하고, 팔꿈치 약간.”
엄마는 ‘조금’과 ‘약간’을 강조하다 말고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내가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오는데, 저것이 그러는 거야. ‘할머니, 이 길로 따라가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터가 나와요. 저만 따라와요.’
말도 어쩜 그렇게 예쁘게 하는지. 가서 신나게 놀고는 힘이 없으니 업어달라고 하더라. 한참 오다가 집이 저만치 보이는데 턱에 걸려 넘어졌지 뭐냐.”
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연상되는 건 둘째가 다쳤는지의 여부였다. 별 일이 없으니 아무 말이 없었겠지 싶으면서도 걱정하며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애를 업고 걷는데 발에 뭐가 턱 하고 걸려. 넘어졌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눈앞에 희미한 게 있어. 어떤 아기 엄마 둘이서 나를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더라.
‘할머니, 구급차 불러줄까요?’
번뜩 생각이 나서 ‘우리 아기는 어디 있소?’ 하고 찾으니 ‘저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어요. 안 다쳤어요.’ 해.
쳐다보니 벤치에 멀쩡하게 앉아 있더라. 세상에, 하늘이 도왔지. 정말 긁힌 데 한 구석이 없더라. 나는 내일까지 지켜보련다.”
허탈하게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가 아픈 일이 나는 두렵다. 엄마는 혼자 아프기 때문이다. 딸에게 피해가 될까 봐 엄마는 혼자 앓는다. 나는 그게 마음이 아프다.
엄마는 이전에도 한 번 넘어진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잠이 부족했다. 과로했고, 그 와중에 나와 아기를 위해 토마토를 사러 가다 바닥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넘어졌다.
나는 엄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걸 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마트 주인께 전해 들었을 뿐이다. 엄마가 며칠간 연락이 없을 때에도 바빠서 그런 거라고 오해했다.
너무너무 미안한데, 엄마가 그저 괜찮다고 별일 없다고 웃기만 할 때는 내가 아주 먼 사람 같다. 엄마로부터 아주 멀리 존재하는 상관없는 사람 같기만 하다.
넘어질 때 잠시 정신을 잃었다던 엄마와 병원을 오가며 씁쓸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좋은 분이 엄마가 빨리 낫기를 바란다고 상자에 메시지를 써서 과자를 보내주셨지만 열어보질 못했다.
문득 떠오른 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이 만화에서 간직한 장면은 두 가지다.
그중 하나는 치히로의 부모님이 돼지로 변하는 장면이다. 치히로는 어쨌든 나중에 부모님을 구해낸다.
그 장면을 왜 그토록 기쁘게 기억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애니메이션을 보던 시절에 형편이 몹시 안 좋았는데, 나도 센이 되어서라도 부모님을 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와중에 치히로를 도와주는 하쿠라는 존재가 있다.
가장 힘든 순간에 하쿠는 치히로에게 주먹밥을 건네준다. 센은 주먹밥을 먹으면서 엉엉 운다. 그 장면에서는 영락없이 나도 같이 운다.
홀로서기가 쉽지 않다는 걸 새삼 다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무리 부모와 자식 사이라 하더라도 누가 누구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센과 치히로가 나오는 만화 영화도 나와 함께 자라 이젠 고전이 되어버렸다.
가장 좋아하는 주먹밥 장면을 보러 간간히 혼자 있는 날 그 영화를 다시 틀곤 한다.
열심히 신사를 달려 다니는 센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응원하지 않는다.
대신 ‘너무 애쓰지 마.’라고 짠하다는 식으로 중얼거리는 것이다. 나는 나의 몫으로, 부모님은 부모님의 몫으로 살아가는 건 당연하다는 듯이.
기억과 위로는 훗날로 미루고, 지금 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일들을 바라본다.
비로소 엄마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도착한 과자를 열 수 있었다. 펑리수였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겨 한참 바라보다가 조금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씹으니 눈물 같은 게 찔끔찔끔 배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없는 일이 때로 절망을 준다. 동시에 그 절망 때문에 좀 더 잘 살고 싶어지기도 한다. 결국은 자기를 지키는 일이 사랑하는 이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내게는 펑리수가 하쿠의 주먹밥처럼 느껴졌다. 그런 위로를 받는 날에는
어떤 힘든 날이라도 잠깐만 누군가가 다정하게 나의 슬픔을 침범해주길 바라게 되는 것도 같다.
그런 바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 같기도 하다. -끝-
편안한 일요일 보내고 계신가요?
신간에 들어갈 지도(?) 모를 글을 새로 하나 써봤어요.
좋아하는 글이 될 거 같아서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멋진 어른이 되는 날을 기다려봅니다.
@tae.i22
#박태이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