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에 사과
카레라는 한 그릇 요리를 좋아한다. 음식에 대해서는 이상한 심보가 있는데, 맛있는 걸 먹고 싶지만 많이 먹고 싶지는 않다. 먹고는 싶지만 만드는 건 귀찮다. 혼자 먹기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건 더 귀찮다. 어쩌란 말이냐. 배가 고프면 몹시 성질을 내고 먹지 않고는 살 수도 없는 주제에 먹는 일에 대해서 까다로워지는 나를 알아차리는 일도 정말 정말 귀찮다. 말할 수도 없이.
이런 내가 그나마 타협을 본 게 한 그릇 요리다. 한식은 정말 정말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야채를 다듬고 데치고 다시 물기를 빼고 거기에 소금과 마늘로 간을 하는 일련의 과정을 수행하다 식탁에 차린 다음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다시 야채를 다듬고 데치고 다시 물기를 빼고…. 이 일을 반복하며 즐기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 저절로 존경과 탄성이 우러나온다.
예를 들어 우리 엄마. 그분은 만드는 일과 먹는 일을 동시에 즐기는 사람이다. 끊임없이 음식을 생산하는 일에 게으름이 전혀 없다. 50여 년을 요리로 채우다 보면 도달하는 경지 같다. 새로운 간식거리를 사서 우물우물 먹으며 테스트해보고 세 시간씩 가스불 앞에서 오가면서도 즐거워한다.
간혹 “야, 태이야. 나 살쪘다.”하며 배 둘레의 굵직한 스트링을 보여준다.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더니 “왜 이렇게 밥이 맛있니. 맛있어 큰일이다.”라고 한다. 식탐도 사람이 건강해야 부릴 수 있는 욕심이라더니 이토록 먹는 걸 만드는 일에 늑장만 부려대는 나의 건강은 보장받을 수 없는 일인가 싶기도 하다.
혼밥의 메뉴로 가장 좋아하는 간단한 끼닛거리가 있다면 그건 샌드위치 정도이다. 그나마도 샌드위치는 내가 한 끼 식사비로 지출할 만한 금액의 메뉴라 종종 사 먹고 만다. 아보카도, 감자 샐러드처럼 보기만 해도 먹고 싶어지는 샌드위치 레시피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아보카도를 벗기는 노력, 감자를 으깨는 노력을 따지기 시작하면…
4000원 정도면 빵과 약간의 고기와 약간의 야채가 들어간 완벽한 영양 조합의 샌드위치를 충분히 먹을 수 있거든요.라고 잘난 척 한 뒤 빵가게로 달려가는 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요리할 노력 대신 약간의 금액을 지불하길 선택하는 것. 그게 나란 사람의 계산법이다.
생존하기 위해 밥을 먹는 내가 엄청나게 한심해질 때도 많다. 이 정도 나이라면 어느 정도 잘하는 요리 한 개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책할 때도 있다. 특히 집에 손님이 오실 때 이 증상은 심해진다.
생각만큼은 우리 집에서 자주 먹는 특별한 메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데 딱히 내어놓을 만한 요리를 모르니 안절부절만 못하다 사 먹는 일로 끝난다. 아이 친구가 집에 놀러 올 때도 핫도그를 에어 프라이어에 구워주는 일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속으로 ‘미안해.’를 연발하면서 말이다.
내가 들키지 않고 싶은 건 뭘까? 작게는 요리라고 하는 영역에 서투른 내 모습일 테고, 크게는 누군가를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일을 낯설어하는 경험치일 것 같다. 또는 누군가로부터 초대받은 날들에 느껴지던 포근한 느낌들을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당황스러움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엄마가 만들어주던 갓 구운 카스텔라 빵이나 오므라이스들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역시 음식이라는 건 정성이나 사랑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도구들인가 보다. 나를 위한 따끈한 음식을 만들어 스스로를 대접하는 사람이라면 어쩐지 그 따끈함을 누군가와 나누기도 쉽지 않을까. 그러니까 나는 그 대접받는 기분과 대접하는 기분을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걸 정말 정말 들키고 싶지 않다.
아무튼 돌아가서. 먹지 않을 수 없어 간간히 만드는 요리가 카레다. 카레는 만드는 일부터 먹고 치우는 일까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요리인 것 같다. (사실 도전해본 요리가 많지 않아 확신할 수 없다. 더 쉬운 요리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길.)
냉장고에 있는 양파, 당근, 감자, 때로 브로콜리 같은 자투리 채소를 깍둑썰기해서 살짝 볶고 카레 가루를 넣어서 보글보글 진득해질 때까지 끓이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니, 충분했다. 처음에는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점점 욕심이 생기는 날도 있다. 고기를 넣고 싶다든가, 조금 더 맛이 풍부하면 좋겠다든가 하는.
새우튀김이라도 하나 올려 덮밥으로 변신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일이 점점 커져서 결국 내가 바라지 않는 바, 즉 요리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고 남는 건 음식 한 그릇일 뿐인 결과가 탄생하게 된다. 그건 내가 최고로 지양하는 거라서 마음을 꾹꾹 눌러 참는데도 안 될 때가 있다. 당장 달려가서 카레용 목살을 사 올까 말까. 육수를 끓일까 말까. 혓바닥은 나보다 욕심이 더 많은 녀석이다. 에잇. 늘 최대치의 맛을 요구한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카레의 풍미를 위해 내가 자주 선택하는 레시피는 사과다. 사과를 카레에 처음 넣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어느 날 냉장고에서 시든 사과를 발견하고 그걸 썰어 카레에 넣었던 일이다.
아마도 요리 블로거의 포스팅에서 한 번쯤 사과 카레를 본 적이 떠올라 먹지도 못할 사과, 여기에라도 넣어서 소진시키자는 게 내 의도였을 테다. 어떤 식재료는 어떤 집에는 무척 귀하지만 어떤 집에는 무척 흔하다. 우리 집은 일 년 중 며칠을 빼고는 사과가 냉장고에 들어 있는 집이다.
처음으로 사과를 넣은 카레를 맛보았을 때의 기분은 꽤나 놀라웠다. 사과 자체의 새콤달콤한 맛이 녹아들어 풍미가 좋았다. 대신 사과만은 물러져 본래의 맛을 잃는다. 육수를 우린 야채들을 건져내 버리듯이 제 몫을 다한 사과는 야멸차게 솎아내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한다.
요리 초보인 나 같은 사람은 야채는 야채에 쓰고, 과일은 과일로 식후에 먹는다고 구분 짓는다. 그것은 쇠고기에 명이나물처럼, 크래커 위에 참치처럼 서로 달라서 어울리는 음식들을 먹으면서도 만드는 요리에는 제대로 된 정성을 발휘해본 적이 없는 자의 부족한 창의력이다.
이제는 당연하게 카레에 사과를 넣는다. 사과를 깎아서 잘게 썬 다음 야채가 거의 다 익어갈 때 마지막으로 투입한다. 퐁당퐁당. 동화 속에 나오는 스튜를 끓이는 여인이 된 것처럼 주걱으로 여러 번 휘휘 젓고 나면 내가 할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다.
사과와 야채가 즙을 내며 골고루 잘 녹아주기를. 그 녀석들이 각자 익어가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기를. 그 단단한 과육이 흐물흐물해지는 사이에 카레가 쏙쏙 잘 스며들어 주기를. 본래의 맛이 카레와 잘 어울려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진하게 끓인 카레를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흰 밥 위에 붓는다. 동글동글해지고 물컹물컹해진 야채들이지만 대체로 무엇인지 정체를 분간할 수 있다. 밥알이 뭉개지지 않도록 슬슬 비벼 입에 넣는다. 노-오란 카레 사이에서 형체가 없는 사과의 향이 느껴진다. 아, 속이 훈훈하다.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순간이다.
자신 있게 내세울 요리 하나 없는 나에게도 사과 카레가 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정신으로 갖은 야채가 버물려져 있는 그 카레. 그리고 흔하고 흔하면서도 카레라는 요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사과. 한 그릇 요리를 만드는 동안 자신감이 없어질 때마다 카레와 그 속에 들어있는 사과를 떠올린다.
쉽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대하는 일도, 내 부족함을 대하는 일도, 있는 그대로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럴싸한 취향이나 멋들어진 식사 메뉴가 없어도 냉장고를 털어 만든 이 간결한 한 끼도 만족할 만큼 좋은 것이다.
사과와 카레의 어울림은 경계가 다른 일상의 소재들이 우연히 만나서였던 것처럼, 소박한 나 같은 사람도 누군가의 경계를 풀고 속을 뜨끈하게 만들어주는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몽글몽글한 카레를 신나게 먹으며 한 줌 용기를 내어 본다. 카레에 든 사과는 내게 그런 의미이다.
간혹 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생각의 글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때가 있어요.
언젠가 내가 했을 법한 흔해보이는 생각들이라도
작고 반짝이는 섬세한 순간들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그 글은 완전히 다른 글이 되는 게 아닐까요?
카레에 사과처럼요.
인스타그램에 하루의 마음가짐을 다듬어보는 문장들을 올리고 있습니다.
놀러오세요.
#박태이작가 @tae.i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