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면 잎이 보이듯이
이해인 수녀님이 쓰신 책들 중에 ‘꽃이 지면 잎이 보이듯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이 있다. 처음 그 제목을 보고 책을 한참 동안이나 펼치지 못하고 제목만 어루만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받을 때는 아름답고 싱싱하던 꽃이 시들어가는 모습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쳐다보기가 싫었다. 초록색인 나무들은 상대적으로 그럭저럭 변함이 눈에 띄지 않으니 쓸쓸함이나 적적함도 덜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지난봄에는 코로나에 걸려서 꽃 볼 시기를 다 놓쳤다. 꽃망울이 맺힐 때쯤 PCR 검사를 몇 차례나 받으려 다니다가 한참 벚꽃이 필 때쯤 격리 기간이 시작되었다. 격리가 끝나고 나니 꽃은 다 지고 말았고 그 자리에 연두색 잎사귀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격리기간의 중심에 우리 엄마가 있었다. 우리 엄마인 이 여사는 오래된 봉사 모임에 소속되어 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엄마는 아픈 이들을 죽을 들고 찾아가 기도해 주었다. 보호자가 없는 노인들이나 암이나 희귀한 병에 걸린 환자들을 멀리까지 찾아갔다.
그러니까 그때도 우리 엄마는 아팠다가 돌아가신 한 환자분의 장례식에 다녀왔다가 코로나를 확진받았다. 그걸 모르고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그날따라 힘들어하시더니 곁에 있던 우리 아이들이 먼저 옮고, 그리고 내가 옮고, 남편도 옮았다.
너도 걸리고, 나도 걸리던 그 4월의 시국에 코로나에 걸린 게 말하자면 그리 큰 대수는 아니었다. 그런데 내 마음에 탁 걸린 그것은 이 여사가 아직도 그렇게 봉사를 다닌다는 거였다. 내가 어릴 때도 나를 혼자 두고 다른 사람 챙기러 다니더니 아직도 그런다는 거였다.
예전에도 그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이라고 특별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 이 시국에 말이다. 자기 몸 보전이 우선이지, 가족 건강이 우선이지, 이러다가 말이야, 너무한 거 아니야, 응.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금기를 어긴 아이처럼 엄마가 조금 미워지고 말았다.
이 여사는 걱정되고 미안했는지 격리 기간이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우리 집에 오겠다고 연락을 했다. 절대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기어코 오겠다고 하셨다.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면서도 엄마를 기다리게 되는 건 이상한 심보다.
엄마는 내가 현관문을 몇 번이나 쳐다보며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왔다. 많이 아팠지? 하면서 따끈한 낙지 죽을 들고 환히 웃으면서.
죽보다는 엄마가 반가웠지만 내심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도리어 오래 기다린 일이 어쩐지 서운해서 툴툴거리고 말았다. 못난 걸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어릴 때도 내가 가장 자주 한 일 중 하나는 엄마를 기다렸던 것이다. 학교가 끝난 뒤 신나게 집에 돌아와 초인종을 누르면서 누군가가 집 안에서 빠른 발걸음 소리를 내며 ‘태이니?’라고 문을 왈칵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일 초, 이 초, 삼 초. 시간이 흘러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나지 않으면 8살의 태이는 낙담하며 책가방을 문고리에 걸고 하염없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거렸다.
가끔 쉬가 마려우면 피아노 학원이 있던 아파트 상가에 갔고 누군가 대문을 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집으로 향해 다시 한번 벨을 눌렀다. 역시나 아무도 없었지만.
당시에 동네에 흉흉하게 돌고 있던 소문은 좀도둑이 누구누구네 집에 들어왔더라는 카더라였다. 빈 집 베란다를 통해 들어가 귀금속이나 동전, 지갑에 들어있는 지폐들을 싹 훔쳐 간다고 했다. 처음에 엄마는 외출을 하면서 우리만이 아는 장소에 열쇠를 두거나 줄을 매달아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지만 그것마저 걱정이 되었는지 나중에는 열쇠를 아예 남겨두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집 앞에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내가 학교 간 사이 손길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 할 수 있는 일을 돕고 돌아오곤 했다. 돌아올 때는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는 일이 많았다. 때로는 파가 삐죽 튀어나온 장바구니를 들고, 때로는 양손 가득 김치 통을 담은 가방을 들고 오래 기다렸냐며 환하게 웃었다.
엄마는 그 시간이 시계도 제대로 볼 줄 모르던 내게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에야 짐작한다. 엄마를 기다렸던 그 하릴없던 시간이 고작해야 30분 이내였을 거라는 걸. 어른의 시간으로 짧다면 짧았을, 버스를 타더라도 지체될 수 있었을, 엄마가 통제할 수 없었을지도 모를 그 시간 동안 나는 엄마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그걸 엄마에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물론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혼자가 되어 오갈 데 없이 기다리는 건 정말 정말 싫다고 그렇게 말해봤자 엄마가 뭐라고 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우린 괜찮잖니.”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때론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면 그만큼 누군가가 돌봐주실 거야.”라고 말했을지도 몰랐다.
이러나저러나 간에 엄마가 말한 대로 되었다. 우리 가족은 대체로 가난했지만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긴 했고, 우리가 돈으로 걱정했을 때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살아남았다. 결론적으로는 그랬지만 엄마의 말을 내가 전적으로 다 믿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남들을 그렇게 도우면서도 본인이 아플 때는 딸인 내게조차 연락 한 통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취업하려고 필기시험을 치른 후 전화를 받았을 때, 엄마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일하는 식당 주방에서 미끄러져 골절이 되어 수술하기 전날이 되어야 보호자 동의 때문에 연락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번 넘어져서 다쳤을 때에도 혼자 감내하며 내게 의논도 하지 않았다. 타인은 돌보면서도 자신에게만큼은 자신만 돌보도록 허락하는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는 안다. 사랑하니까 부담이 되고 싶지 않은 것이었을 테지. 하지만 그 방식에 결코 찬성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싱크대에 서 있는 엄마의 등은 내게 지나치게 익숙한 장면이었다. 안 그래도 따뜻한 낙지 죽을 냄비에 부어 다시 끓이는 엄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죽을 그릇에 떠서 엄마는 담았다. 내가 먹는 동안 엄마는 작정하고 왔다는 듯이 집안 이곳저곳을 청소했다.
이불을 세탁하려 하길래 두라고 손사래를 쳤더니, 엄마는 단호하게 말했다. “맡겨 둬. 빨래만큼은 자신 있어.” 주방 개수대를 윤이 나게 닦고, 욕실에 머리카락을 쓸어 모으고, 빨래를 돌렸다.
집안일보다는 익숙하고 확고한 태도가 고마웠지만 절망적이기도 했다. 아무리 해도 나는 엄마에게 이만큼의 안심되는 비빌 언덕이 될 수는 없을 것만 같았다. 잔뜩 불평해봤자 엄마의 돌봄과 노동으로 자란 것이다.
엄마는 집안을 마치고는 빠르게 짐을 싸고는 바지를 툴툴 털더니 이내 가져온 바지로 갈아입었다. 바지 무릎에 붙은 먼지를 툴툴 털더니 “수고했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무슨 수고냐며 난 괜찮다고 했더니 엄마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수고했다, 나!”
엄마는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이었던 걸 여태껏 모르고 살았던가. 내가 무심했던 만큼 엄마는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엄마를 배웅하고 돌아와 화장실에 들어가니 욕실 실리콘 위에 엄마가 짜 놓은 초록색 락스가 덧발라져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엄마의 마음이 내 마음속 곰팡이에 녹아들었던 것처럼.
마지막까지 갈 일이 없을지라도 가장 최악의 수를 상상해보는 건 긍정적이 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아마도 언젠가 엄마가 이전과 달리 혼자서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나는 아주 두렵다. 자식의 입장에서 부모가 강하기를 바라는 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언젠가 혹시라도 엄마 또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픈 날이 온다면 나는 꼭 엄마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간호하리라. 사람은 처음 접해본 상황에서 이전에 보고 겪은 일 이상으로 행동하기 어려우므로.
엄마가 보여주었던 타인에 대한 사랑을 똑같이 실천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는 엄마와 비슷한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게 될 것이다.
죽을 끓이고, 찾아가 들여다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더 해줄 일이 없느냐고 물으면서, 나에 대한 긍지로 나를 보호하면서 최대한 누군가의 곁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꽃이 지면 잎이 보인다’ 던 그 말은 나무만이 아니라 우리 집에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모두가 건강하다는 아름다움 대신에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아픈 채로 가까이서 들여다보았다.
전부라고 생각했던 하나의 아름다움이 사라져도 그걸 대신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초록 잎은 알아보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따스한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러니 우리의 일상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불행해 보이는데도 살아갈 구석을 끝끝내 만들어 낸다.
* "글쓰기와 사랑"을 주제로 브런치 매거진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일상을 살면서도 책을 읽으며 잠시 다른 이의 일상과 생각에 빠져들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런 날들이 반복되는 어느 날, 전혀 상관 없었던 책의 한 구절이 제 일상과 딱 맞아떨어지며 하나의 생각으로 연결되는 타이밍이 찾아옵니다.
타이밍이 찾아왔을 때의 글쓰기는 쉽고도 재밌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니까요.
인스타그램에 생활 속에서 느낀 점을 책 속 한 문장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놀러오세요.
@tae.i22 (#박태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