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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10. 2021

[프라미싱영우먼] 창창한 앞날은 피해자의 것

검증해야 마땅할 피해자성이란 없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할머니와 함께 외출 중이던 나는 지금 같아선 절대 입지 않을 핫팬츠를 입고 화장실에 간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꽤 좁은 상가 건물 복도에서 시간을 때울 겸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한 매장의 남자 직원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곧 그 남자와 나 사이의 거리가 좁혀진 순간, 나는 그가 내 발목부터 상체까지 훑는 시선을 똑똑히 목격했다. 마치 술집 앞에 세워진 실물 사이즈의 등신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당시에 연애 중이던 나는 남자 친구에게 그날 겪은 일을 설명했고, 돌아온 그의 반응은 실망 그 자체였다.


‘너 짧은 옷 잘 안 입잖아. 혹시 네가 오해한 거 아니야?’


모르는 남자가 내 다리를 훑은 경험이 그때가 처음도 아니었다. 내가 커피를 픽업하러 일어나는 순간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중년 남성이 곧장 내 다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 적도 있었고, 안 본 척 힐끔 거린 경험도 여러 번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에 처한 걸 목격한 적도 있다. 언젠가 친구와 빵집에 갔는데, 한 남자 손님이 빵을 집던 것도 잊고 몸을 반쯤 돌려 짧은 바지를 입고 있던 내 친구의 다리를 노골적으로 감상(?)한 적도 있었다. 대놓고 그 남자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할 용기가 없던 나는 그저 친구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곧 그 남자 손님은 다시 빵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이 외에 일면식도 없는 여자가 마찬가지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찐득한 눈길을 받는 장면을 수도 없이 보았다. 하지만 전 남자 친구의 예상치도 못한 반응과 몇 번의 비슷한 상황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 나와 로맨틱한 혹은 그나마 친근한 관계있는 남자들에게 용기 내어 나의 불쾌한 경험과 불편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짧은 옷을 입었느냐고, 네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 아니냐고 물어 올 것이 너무 자명했으니까.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길 가다가 누군가에게 소매치기를 당했다거나,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말했어도 그들이 내 탓부터 했을까? 그러게 왜 가방을 닫고 다니지 않았니, 문을 깜빡하고 잠그지 않아 놓고 네가 착각하는 거 아니니, 하면서 말이다. 우습게도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피해자를 탓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심지어 살해당한 여성에 대한 기사에서도 그러게 왜 밤늦게 돌아다녔냐는 댓글이 달릴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



• 그러게 왜 술을 마셨느냐고요?


- promising : 유망한, 촉망되는, 장래성 있는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한국어 제목은 다소 불친절하게도 영문 제목의 음가를 그대로 따왔다. 그러나 원제만 놓고 평가하자면 이 제목은 스토리가 던져주는 의미를 더욱 강화해준다는 면에서 완벽한 제목이기도 하다. promising이라는 표현이 성폭력 가해자 남성이 아닌, 피해자 여성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주인공 캐시는 한때는 의대생이었지만, 현재는 카페 직원으로 일하는 중이다. 그가 창창한 앞날이 보장된 의대를 관둔 데에는 한 가지 안타까운 사정이 있다. 평생의 소울 메이트이자 함께 의대까지 진학한 친구 니나에게 일어난 비극 때문이다. 당시 만취 상태였던 니나는 동기 알렉산더를 비롯한 남학생들에게 집단 강간을 당한 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의대를 관둔 것은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래서 캐시 역시 더는 의대를 다닐 수 없었다. 사건 당시 자신이 니나 곁에 없었다는 죄책감, 정작 가해 남학생들은 멀쩡히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로 몸부림치던 캐시. 피해자의 가련한 친구로만 남아 있을 수 없던 그는 원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계획을 시행하려는 와중에도 캐시는 복수 대상들이 이제라도 후회하는 기색을 보이기를 내심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캐시에게 돌아오는 말들은 대부분 변명뿐이다. 그렇게 술을 마셔 놓고 누굴 탓하느냐, 평판이 좋지 않은 여학생의 말만 믿고 남학생을 의심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렸다, 등등. 같은 의대생이자 현재 남자 친구인 라이언이 알고 보니 니나가 강간당할 당시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캐시의 복수심에는 더욱 불이 붙는다.


캐시의 복수 대장정은 결국 성공하지만,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전형적인 사이다 서사와는 결이 다르다. 아마 그 결말 때문에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영화 전체는 만족스럽지만 엔딩만 두고 봤을 때, 그 극적인 면모에 짜릿하면서도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동시에 든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강간 피해자인 니나를 탓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현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 그리고 천만 다행히 이제는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이러한 무책임하고 폭력적인 언행에 대한 용어가 있다. 바로 ‘2차 가해’다.




• 가해자의 미래를 왜 걱정하나요?


여성이 강간이나 살해를 당했을 때, 피해를 향한 2차 가해만큼이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가해자에게 온갖 서사를 부여하며 그에게도 살아갈 미래와 인권이 있음을 기를 쓰고 강조하는 기사들이다. 성실한 모범생, 미래의 파일럿 등. 가해자들의 평소 행실이나, 장래 희망 따위를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런 류의 기사들을 볼 때마다 ‘프라미싱 영 맨’이 고작 성범죄 정도로 미래가 망가지게 생겨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디 기사들만 문제일까. 많은 판사들이 유독 여성 대상 남성들의 성범죄에 대해서 만큼은 어떻게든 핑곗거리를 찾아 감형해 주지 못해서 안달이다. 음주, 전과 없음, 심신 미약, 정신 질환 등. 하다 하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착취 물을 만든 가해자에 대해 고도 비만이라 외모 콤플렉스가 심해 경솔한 판단을 했을 것이라며 선처한 일도 있었다.


이와 같은 가해 남성들에 대한 적극적인 감정이입과, 세심한 배려 덕분에(?) 살인을 동반하지 않은 성범죄의 경우 형이 아무리 길어봐야 대부분 5년 미만이고, ‘고작’ 강간 한 번일 경우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판사들이 반드시 가해자에게만 이입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자신을 학대하던 남성을 살해한 여성과, 언제나처럼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그것이 격해져 살인까지 저지른 남성에 대한 형벌 차이를 보면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린다.



하지만 피해자, 정확히는 여성 피해자들의 경우는 어떤가. 온갖 기사에서 범죄 과정을 마치 포르노처럼 기재하는 와중에, 피해자들이 어떤 꿈을 가졌는지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피해자 여성의 평소 행실에 주목할 때도 더러 있긴 하지만 가해 남성들을 향한 연민 어린 시선과는 그 종류가 다르다. 사건 당시 옷차림을 확인하려 드는 것은 이제는 식상할 지경이고, 왜 부른다고 따라갔는지, 가해 남성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심지어는 예의 상 보낸 미소 이모티콘 마저 피해자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된다. 어떻게든 가해 남성에게 선처를 해주려는 것과 달리, 피해 여성은 집요하게 그의 ‘피해자성’을 검증당한다.


거의 괴롭힘에 가까워 보이는 이러한 행태들을 좀 더 직설적인 언어로 해석하면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실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는데 네가 오해한 거 아니야? 혹시 네가 꽃뱀 짓 하려다 수 틀려서 이러는 거 아니야? 만에 하나 피해 여성이 어떤 성애적인 감정을 갖고 가해 남성에게 접근했다고 한들, 이것이 강간을 당하고 싶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나마도 가해자 쪽에서 혼자 김칫국을 마셨거나, 애초에 피해 여성의 의도나 감정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위 말하는 꽃뱀을 운운하는 것 역시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누군가 꽃뱀 짓을 계획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꽃뱀 짓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대부분 돈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정말 돈을 원했다면 적당히 구슬려서 남자 친구를 가장한 물주로 잡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이지 않을까? 상대 남성을 고소하고 지난한 범정 싸움을 벌이는 것보단 말이다.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주홍글씨처럼 찍히는 사회적 낙인은 어떤가.



게다가 성범죄는 실제로 범죄 사실이 있어도 입증하기 까다롭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피해자성을 검증당하면서 자신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가해자의 죄를 덜어주기 위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피해 여성 쪽의 말만 믿냐며, 유독 성범죄에만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하게 부르짖는 상황 역시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꽃뱀 범죄를 저지르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드라마나 영화에나 있을 법한, 오로지 상대 남성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극적인 성격의 캐릭터가 아니고서야 이런 짓을 벌이는 건 상식 밖이라는 걸 모를 수 없다. 0.78%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무고죄 비율이 이를 증명한다. (한겨레 기사 참고)


성범죄에 대해서만 유독 피해자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별 차이가 명확한 탓이리라. 사건 밖의 일부 사람들, 정확히는 일부 남성들이 잘해 봐야 ‘중립 기어‘를 박거나, 어김없이 피해 여성이 꽃뱀일 가능성을 주장하며, 상대적 약자인 여성이 피해자가 되기 쉬운 건 어쩔 수 없다는 논리까지 펼친다. 이 모든 것은 본인들이 성범죄 피해자의 위치에 설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당신의 여성 가족 역시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은 같은 여자로서 하고 싶지 않다. 그러한 무서운 가정 없이 최소한의 인간적인 공감능력을 바탕으로 성범죄 역시 다른 여타 범죄들과 동일한 관점으로 인식되기를 바라본다. 






사진 출처 : 로튼토마토

https://www.rottentomatoes.com/m/promising_young_woman

참조 기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women/90256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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