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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17. 2021

[해피스트 시즌] 비극적이지도, 포르노적이지도 않은

뻔해서 더 좋은 러브 스토리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로맨스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홀린 듯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로맨스 영화의 경우 장르 특성상 감상에 있어서 연인인 두 주인공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이 맞춰지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여자인 나로서는 이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게이 로맨스 영화는 적극적으로 찾아보진 않았지만, 당연히 레즈비언 영화만큼이나 환영하는 바이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레즈비언 영화들이 제법 많다. 디스오베이던스, 캐롤, 썸머타임, 텔잇투더비즈,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암모나이트, 세이빙 페이스, 아가씨,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비롯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모든 작품들까지.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제목들은 이 정도다. 대부분 훌륭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이었지만, 감상을 마친 후 종종 아쉬운 느낌이 들곤 했다. 내가 로맨스 영화에서 기대하는 요소가 충족되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이는 내가 호모포비아이기 때문이 아니다.



레즈비언 로맨스 = 불행 포르노?


그렇다면 내가 로맨스 영화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해피 엔딩이다. 다른 장르의 경우 처절하게 비극적인 엔딩이기에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있다. 그러나 로맨스는 다르다. 딱히 즐기는 장르도 아니면서 로맨스만큼은 제발 덮어 놓고 행복하게 끝나기를 바라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는 내가 인생에 있어서 인간관계가 제일 어렵다고 생각한 때문일 수도, 다른 장르에 비해 로맨스가 좀 더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져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본 레즈비언 영화 대부분이 완전한 해피 엔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해피 엔딩이란,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버금가는 '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와 같은 수준을 뜻한다. 물론 지금까지 감상한 레즈비언 영화들 중에서도 두 주인공의 서로를 향한 사랑만큼은 영원할 것임을 암시하는 엔딩들은 제법 된다. 하지만 왜 둘이 마음만 하나이고, 현실의 벽으로 인해 몸은 떨어져 지내야 하는지 안타까웠던 적이 너무나 많았다. 아름답지만 불행한 두 연인의 결말에 매번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반면 이성애 로맨스에선 개연성이고 뭐고 덮어 놓고 행복하게 끝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가.


내가 로맨스에서 기대하는 또 한 가지, 굳이 직접적으로 연출된 베드신을 넣지 않기. 구체적으로는 배우들의 노출 장면을 넣지 않는 것. 이 부분은 다른 장르의 영화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뼛속까지 유교걸인 탓에 배우들의 노출을 반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애초에 레즈비언 로맨스에 이렇게나 진심이지 않았을 테니. 내가 배우들의 노출을, 특히나 여성 배우의 노출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해당 배우가 많은 스태프들 앞에서 옷을 입지 않고 프로답게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과 그로 인해 느낄 부담감이 상상이 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중년 남성 배우만 잔뜩 등장하며, 여성 배우들은 헐벗은 술집 여자로만 소환되는 한국식 누아르 영화를 싫어한다. 그리고 많은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가 이러한 나의 기대와는 정확히 반대로 흘러간다.


더욱 불쾌해지는 지점은 많은 레즈비언 베드신의 경우 지나치게 관음적인 시선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경향은 당사 자성이라고는 없는 이성애자 남성 감독의 작품일 때 더욱 두드러진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베드신의 경우 두 사람의 감정선에 초점을 맞춘 덕에, 맨살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별로 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남성 감독의 작품들의 경우 집요하고 노골적인 연출 탓에 마치 상업 영화관에서 포르노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단순히 헤테로 관객들에게 두 여성이 성애적 관계임을 강조하기 위해 들인 노력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다.


앨리스 우 감독의 영화 '세이빙 페이스'의 장면들


이쯤 되면 레즈비언 영화는 불행과 포르노를 합쳐 ‘불행 포르노’라는 공식이라도 있나 싶어 진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 중 앨리스 우 감독의 ‘세이빙 페이스’의 경우 두 주인공의 사랑이 나름의 결실을 맺으며, 베드신도 비교적 산뜻하고 짧게 연출되는 편이다. 때문에 감독의 다른 작품인 ‘반쪽의 이야기’도 재밌게 보았으며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비교적 담백한 전개 때문인지 마냥 간질간질하고 달달한 느낌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분명 재미있고 잘 만든 작품이므로 강력 추전 한다.)



평범해서 더 특별한 로맨틱 코미디


그러던 차에 내가 원하는 요소를 모두 때려다 박은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가 나타났으니. 단비와 같은 이 영화의 제목은 바로 ‘해피스트 시즌.’ 로맨스가 중심인 영화에 한해서 무겁고 심각한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더욱 반갑게도 로맨틱 ‘코미디’ 장르이다. 이것만도 고마운데 무려 주연 배우들이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맥켄지 데이비스이라니.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눈만 마주쳐도 꿀이 떨어지는 커플 애비(크리스틴 스튜어트)와 하퍼(맥켄지 데이비스). 누구나 좋아하는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애비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하퍼는 가족들과의 5일간의 크리스마스 연휴에 애비를 초대한다. 애비는 비록 크리스마스를 좋아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하퍼와 그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생각에 걱정이 되면서도 설렌다. 그리고 이 기회에 하퍼에게 청혼을 할 계획까지 세운다.


하퍼에게 불 프러포즈 반지를 보고 있는 애비. 옆은 애비의 게이 친구 존.


그러나 하퍼의 가족들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애비가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 하퍼는 두 사람이 연인 사이라는 것은 물론, 본인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조차 아직 가족들에게 밝히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하퍼의 가족들이 준비한 ‘서프라이즈’로 인해 둘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잡는 것조차 쉽지 않다. 보수적인 부모님에게 완벽한 딸로 남고 싶은 마음과, 애비에게 상처 주기 싫은 마음 사이 우왕좌왕 갈팡질팡 하는 하퍼. 그런 하퍼로 인해 실망하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애비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해피스트 시즌’의 하퍼를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 유명한 ‘똥차’ 되시겠다. 모두에게 미움받기 싫고, 예쁨만 받고 싶은 인생 살기 힘든 성격이랄까. 덕분에 하퍼에 대한 사랑 하나로 끊임없이 인내심을 발휘하는 애비가 성인군자처럼 느껴진다. 만약 애비와 하퍼의 상황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였다면 주변 사람들은 아마 이 커플을 지켜보며 속에서 천불이 나는 기분이었으리라. 나 역시 애비가 친구였다면 그 ‘똥차’와 헤어지는 게 어떻겠느냐고 설득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그런다고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갈등이 여타 레즈비언 로맨스 영화처럼 불행하게 느껴지지 않는 데는 장르와 시대적 배경의 역할이 크다. 영화 ‘해피스트 시즌’은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문법 아래 두 연인의 위기 상황을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그 덕분에 하퍼가 연인으로서 얼마나 매너가 없는지, 애비가 얼마나 열이 받을지 한 템포 씩 늦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땐 이미 다음 장면에 정신이 팔린 뒤다.


하퍼(왼쪽)와 애비(오른쪽)


보고 나서 가슴이 먹먹하고 씁쓸하게 만드는 레즈비언 영화들의 경우, 치사하게도 당시 개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사회 구조와 분위기를 들이 민다. 비교적 최근 시기를 배경으로 할 경우 꽉 막힌 종교 단체에 두 연인을 던져 놓는 식이다. 막연한 해피 엔딩 따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러나 ‘해피스트 시즌’은 2020년 개봉작이다. 최소한 누군가 동성애에 대해 무지몽매한 소리를 하면, 또 다른 누군가 그것이 차별과 혐오임을 지적해주는 시대에 탄생한 작품인 것이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과는 별개로, ‘해피스트 시즌’은 동성애 영화도 이성애 영화처럼 무조건적인 해피 엔딩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전혀 포르노적이지 않으면서, 그저 달달하기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물론이다. 덕분에 앞으로 나오게 될 다른 퀴어 영화에 대해서도 기대를 품게 한다.


영화 '해피스트 시즌'의 한 장면


‘해피스트 시즌’에서 다루는 갈등 요소 대부분은 동성애 영화에서 쉽게 떠올릴 법한 것들이다. 주인공 커플이 레즈비언이란 사실만 빼놓고 보면 여느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기도 하다. 하지만 이처럼 뻔하고 평범하기 때문에 ‘해피스트 시즌’은 더 매력적이고 반갑다. 레즈비언 커플의 영화를 보면서 ‘어차피 잘 되겠지’ 라며 아무런 걱정 없이 감상하는 건 아직까진 흔한 경험이 아니니까. 게다가 주연 배우가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맥켄지 데이비스라니. 다시 말하지만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852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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