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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24. 2021

[미스 슬로운] 전형성을 벗어던진 여성 캐릭터

도덕적이기보다 목표지향적인




어느 순간 영화를 즐겨 보다 못해, ‘혼영’, 즉 혼자 영화 보기가 더 편해질 정도로 영화를 자주 보는 지경에 이른 시점에서 나는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 영화 속 여성 등장인물들의 역할이 무척 제한적이라는 것을. 대략 2~3년 전쯤 가장 암울했을 시기(?)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어머니나 부인, 딸이나 여자 친구 같은 남성 주인공들의 가족 구성원 혹은 친근한 관계이거나 대상화된 뮤즈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만약 장르가 범죄 누아르일 경우 여성 배우들은 접대부 캐릭터들로 소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서 더 심해진다면 성범죄 등의 피해자이거나.


스토리에 따라 분명 위와 같은 역할들도 필요하다. 하지만 저런 역할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 오랜 시간 한국 영화의 고질적 문제점이었다. 오죽하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톱스타 여성 배우들이 괜찮은 대본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본인들이 출연할 만한 영화가 없다고 입을 모아 얘기했을까. 우습게도 성별을 바꿔 아버지나 남편, 혹은 호스트 같은 캐릭터들은 소모적으로 활용되지 않고 꽤 그럴싸한 서사가 부여되곤 한다. 점점 나아지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현재 한국 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인물 구성은 대부분 중년 남성인 무리에 낀 젊거나 어린 홍일점 배우 한 명이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은 자연스레 감소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포스터만 봐도 대충 어떤 스토리에 무슨 감성일지 감이 잡히는 지경에 이르렀고, 실제로 관람객들의 평도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전형적이지 않은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를 찾아 헤매던 나는 썩 마음에 드는 영화 한 편을 발견하게 됐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 작품이 한국 영화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폭발시키다


영화 ‘미스 슬로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은 승률 100%를 자랑하는 로비스트다. 어느 날 슬로운이 소속된 로비 회사에 거물급 상원 의원이 찾아오고, 그는 총기 구입 시 신원 조사를 의무화하는 히튼-해리스 법안을 막기 위해 여성들의 찬성을 이끌어 달라고 요구한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를 거절한 슬로운은 그로부터 얼마 뒤, 자신의 팀원들을 이끌고 히튼-해리스 법안 찬성 측 로비 회사에 합류한다.


아무리 슬로운이 뛰어난 로비스트라지만 현실적으로 히튼-해리스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 보인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의 불안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길 확률을 높여 간다. 이 과정에서 슬로운은 같은 팀원의 아픈 과거를 들춰내고, 배신자를 색출해 내며, 상상치도 못한 방법으로 반대 측의 뒤통수를 때린다. 슬로운이 목표를 이루어 나가는 방식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 마저도 그의 능력과 계획성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미스 슬로운' 속 장면들


뛰어나고 냉철한 로비스트인 슬로운의 또 다른 특징 중 한 가지는 필요 이상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을 이루는 대신 일을 택한 데 대한 일말의 후회도 보이지 않고,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처를 준 부하 직원에게도 굳이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를 비난하는 상황에서도 아랑곳 않으며,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청문회에서조차 평정심을 유지한다. 여성은 감정적이라는 영화와 문학, 그리고 사회의 통념을 완벽히 뒤집는 것이다. 슬로운이 유일하게 격한 감정을 표출한 순간은 영화 후반부, 계획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분노하는 장면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격렬한 분노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남성에게만 허락된 감정이다.


이처럼 철저히 감정이 배제된 채 목표에 충실한 여성 인물의 모습에 기분 좋은 생경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 캐릭터로서 슬로운이 매혹적인 이유는 위와 같은 희소성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다른 이들은 그가 대형 회사를 박차고 나오면서까지 히튼-해리스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데는 분명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총기 사고로 누군가를 잃었거나 하는. 하지만 슬로운은 그저 옳은 일이기에 선택을 하고 행동으로 옮길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신념을 이루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만이 남았을 때,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 유일한 선택지를 손에 움켜쥐며 마침내 모든 것을 폭발시켜 버린다.


'미스 슬로운' 속 장면들



• 앞으로의 기대


누군가는 할리우드가 점점 더 다양성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 PC주의가 지나치다는 말을 한다. 분명 할리우드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더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이거나, 마냥 연약한 피해자의 위치에 있지 않다. 이제는 하다 못해 주변 인물들이라도 유색 인종 캐릭터가 제법 늘었다. 19년도에 마블이 무려 ‘캡틴 마블’ 같은 마치 DC의 슈퍼맨과 같은 무지막지 하게 강한 여성 히어로물을 내놓더니, 21년인 올해는 동양인 히어로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이 개봉했으며, 로키는 양성애자 캐릭터로 정의됐다. 도대체 이라한 변화가 나쁠 게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할리우드 역시 아직 갈 길이 멀다. 아직까지도 개봉한 영화들의 포스터에서 보이는 얼굴들 대부분이 하얗고, 여전히 남성의 비율이 훨씬 높다. 이성애적 관계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 형태만을 당연하고 유일한 전제로 깔고 가는 작품들도 너무나 많다. TV 시리즈나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들의 작품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더 안타까워진다. 아직까진 한국 영화계에서 위와 같은 균열을 깨뜨리는 시도다운 시도조차 거의 없었던 게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영화는 아니지만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혹은 방영을 마친 드라마들에서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했다. 저예산 작품인 탓에 상영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곤 하지만 독립 영화계에서는 여성 감독의 여성 주연 영화들도 제법 많이 보인다. 상업 영화 역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긴 해도 이제 적어도 그들은 남성 캐릭터에 의해 구원되기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기쁘면서도, 성격이 급한 탓에 여전히 목이 마르다. 그래도 언젠가는 한국 영화계에서도 더는 배제적이지 않은,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 모두를 위한 영화들을 마음껏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청문회에서의 슬로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미스 슬로운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6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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