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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01. 2021

[82년생 김지영]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도대체 페미니즘이 뭐길래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여고 시절, 나는 내 짝꿍에게서 처음으로 이런 질문을 받았다.


‘너 페미니스트야?’


당시 그 친구와 나는 졸업 후 진로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막연히 나의 상상력을 활용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나와 달리 내 짝꿍은 사범대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교사가 여자 직업으로 좋기 때문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도 커리어를 계속 쌓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 상대적으로 야근할 일이 적어 집안일에 할애할 시간이 많은, 혹은 그렇게 여겨지는 직업. 그 친구가 구체적으로 이런 이유들로 교사가 되고 싶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자한테 좋은 직업이라고 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뻔하다. 친구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나는 씁쓸하지만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러나 뒤 이은 짝꿍의 말이 나를 발끈하게 만들었다.


‘같이 학원 다니는 남자 애가 왜 여자 애들은 전부 교대나 사범대를 가려고 하냐더라.’


그 남학생 역시 교대나 사범대를 지원 예정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남학생이 많은 여학생들이 교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 남학생은 왜 여학생들 사이에 이러한 경향이 생겨났는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교대 진학을 권유받았다. 역시나 교사라는 일이 여자가 하기에 좋은 직업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차피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던 데다, 교사라는 직업에 호불호랄 것도 없었지만 나는 부모님의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정확히는 나의 성별이 직업 선택에 있어서 최우선 고려 대상이어야 하는 상황이, 여자라는 이유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남편 대신 육아와 가사에 더 많은 시간을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되어 있는 현실이 못마땅했다.


친구가 전한 남학생의 말을 들은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물밀 듯 쏟아졌고, 결국 나는 욱 하는 심정으로 이런 식으로 반응했다. 그야 여자들이 결혼해서 아이가 생기면 경력단절을 겪을 확률이 높고, 가정을 꾸리고도 계속 커리어를 쌓으려면 당연히 안정적인 교사 일을 하고 싶지 않겠느냐고. 그때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질문이 ‘너 페미니스트야?’였다. 그렇게 질문을 던진 친구의 뉘앙스에는 조롱이나 부정적인 느낌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와 같은 개념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막연히 뭔가 안 좋은 것인 줄로만 알고 있던 나는 당황스러워하며 이를 부정했다.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많은 이들은 무언가 거창한 개념이라고 생각하거나, 또 어떤 이들은 부정적인 무언가라고 인식한다. 인터넷 국어사전에 페미니즘을 검색하면 이러한 설명이 나온다. 성별에 의한 차별을 없애고 여성의 사회, 정치, 법률상의 지위와 역할 신장을 주장하는 주의. 페미니스트란 이러한 인권 사상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이들일 것이고, 페미니즘의 사전적 정의에서 긍정적인 부분만 부정적으로 바꾸면 결국 성차별주의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리고 무지했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과거의 나는 페미니스트들과 선을 그음으로서 내가 성차별주의자라고 선언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명절마다 나만 빼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어른들이 나에게 집안일을 시키려들 때 어떻게든 물귀신처럼 남동생을 같이 끌어들였으며, 누군가의 차별적인 언행에 욱하기 일쑤고, 고용 임금 승진에서 차별받는 여성들에 대한 뉴스와 결혼과 동시에 너무 쉽게 커리어를 포기해 버리는 주변 언니들의 소식에 마음 아파하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그와 동시에 세상에서 연애가 제일 재밌고, 어쨌든 결혼은 해야 하며, 미래의 아이에게 당연히 남편의 성 씨를 물려줄 생각을 하고,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고 믿으며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습관처럼 온라인 서점을 뒤지던 나는 우연히 심플한 표지에 끌려 한 책을 클릭했다. 그 책이 바로 ‘82년생 김지영’이었다. 홀린 듯 그 책을 구매하고, 회사에서 점심시간을 활용해 그 책을 후다닥 읽기까지 나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이 책이 불러일으킬 반향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왠지 불편하지만 당연하게 지내 온 세상에 대한 나의 관점을 모두 바꾸어 버릴 것이라는 사실 역시도.



• 이게 과격하다고요?


소설과 동명의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김지영은 젊은 육아맘이다. 2녀 1남 중 차녀로 태어난 그는 한때 광고 회사에 다녔지만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아영이가 태어난 이후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기 위해 퇴사했다.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남은 지영의 생활은 평범하다. 아영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다시 집에 데려 오고, 남편과 저녁을 먹고 나면 하루가 끝난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그의 두 눈은 언뜻 공허하게 느껴지지만 큰 탈은 없어 보인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장면들


그리고 다가 온 명절. 지영이 주방에서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 동안 그의 남편은 몰래 처가에 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곧 지영의 시누이 식구가 도착하고 부부의 탈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시가의 부엌에서 발목 잡힌 시간이 늘어난 지영. 시어머니는 그런 지영에게 시누이를 위해 음식을 차려 오라고 지시한다. 물론 힘들면 방에서 쉬라는 입에 발린 말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그가 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상을 봐 오기는커녕 빈 손으로 부엌에서 나온 지영은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사부인, 쉬게 해주고 싶으면 집에를 보내주세요. 저도 제 딸 보고 싶어요.’


‘사돈, 저도 제 딸 귀해요.’


지영이 보인 모습은 일종의 ‘빙의’로, 그는 그동안의 억눌린 서러움과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한국의 페미니즘 경전과도 같은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가족 영화에 가깝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 자체를 떠나서 소설과 영화의 소비층의 교집합이 아주 크게 겹치지는 않고, 소설에 비해 영화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메시지가 좀 더 선호된다는 점이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을 듯하다. 때문에 어쩐지 서늘하게 끝난 소설과 달리 영화는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의식은 벗어나지 않았지만 끝까지 가족의 평화를 지키고,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에 감히 의심을 품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속 장면들


처음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접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요즘 말로 ‘사이다’였다. 이 소설은 분명 세상에 존재 헸으나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예민한 여자, 피해의식 있는 여자라는 꼬리표가 붙을까 무서워 그동안은 감히 말할 수 없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주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숨이 턱턱 막혔다. 애써 잊은 기억들 혹은 일부러 외면했던 현실을 직면하라고, 지금 이게 네가 여전히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새삼 일깨우는 것 같아 괴로웠다. 결론적으로 이 소설을 접한 이후 나는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 하기 시작했다. 그 소설 속 김지영의 인생과 내 눈앞의 현실이 옳지 않다고 분명히 느꼈으니, 애써 거부해 오던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인정하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처럼 ‘82년생 김지영’은 나에게 큰 변화를 가져다준 소설이자, 공감의 눈물을 쏟게 한 영화로서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지만 돌이켜 보면 한계점이 많다. ‘82년생 김지영’의 소설과 영화 모두 여성 차별의 원인인 가부장제의 주인이자 수혜자, 즉 남성 집단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피한다. 그저 간접적인 화법으로 우리가 이러이러한 일을 겪었어. 그래서 슬프고 힘들어, 라고 완곡한 어조로 얘기할 뿐이다. 당연히 지금의 현실을 뒤집고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는 부재한다. 그나마 소설보다도 가족주의를 깨뜨리기를 더욱 주저하는 영화는 남성들이 육아 휴직을 쓰기 힘든 상황을 언급하며, 너희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니 우리에게 공감해 달라며 설득하는 식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이게 과격하다고?



• 페미니즘, 그거 별 거 아닙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하면 ‘김치녀’나 ‘된장녀’라는 표현을 한 번도 안 보고 지나칠 수 없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는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가 결코 아니었다. 돌려 말하면 누군가에게 전혀 위협을 주지 못하던 단어였다. 적어도 2015년 디시인사이드에 메르스 갤러리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메르스 갤러리의 탄생 배경과 그곳의 유저들이 메갈리아라는 사이트를 개설해 이후 ‘미러링’이라는 방식으로 그동안 여성을 향했던 혐오의 말들을 거울처럼 반사해 남성들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 유명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메르스 갤러리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이름을 따온 ‘메갈리아’라는 사이트의 의의는 더는 여성들이 혐오의 말에 휘둘려 스스로를 옥죄고 검열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자면,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대중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메갈리아 이후 페미니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평소에도 종종 사용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시의적절하게 출간된 ‘82년생 김지영’이 이러한 현상에 불을 지핀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보이거나 거창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여성이 스타벅스만 가도 된장녀 소리를 듣던 시절과 비교하면 지금의 상황은 천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여성들이 자신을 향해 꽂혀 오던 혐오의 표현들에 대항할 방패 정도는 마련한 셈이니까. 그러나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페미’ 혹은 ‘메갈’이라는 단어가 ‘김치녀’와 ‘된장녀’를 대체한 모양새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남성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여성들에게 찍히는 낙인으로서 소환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이제는 본인의 취향을 알고 주관이 뚜렷해 남성들을 부담스럽게 하지만 여전히 연애 상대로서 여겨지는 김치녀보다, 남성과의 성애적 관계를 우선시하는 대신 여성들의 인권 신장에 힘쓰는 페미니스트가 더 위협적인 존재로 떠오른 셈이다.


하지만 ‘일부’ 남성들의 낙인찍기와 달리 페미니즘이라는 인권 사상은 대충만 살펴보아도 부정적인 개념이 결코 아니며, 거창할 것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은 그저 남성과 같은 일을 했으면 동일한 임금을 받고, 면접과 승진에서 차별받지 않으며, 여성이 단순히 상대적으로 신체적 약자라는 이유로 범죄의 타깃이 되는 걸 당연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책을 마련하는 그런 사회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남성들도 더는 눈치 보지 않고 육아 휴직을 쓸 수 있고, 누군가의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여대 또한 사라질 것이며, 결국에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한 조건으로 군대에 가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위와 같은 페미니즘의 주장에 잘못된 부분을 전혀 찾을 수 없으며, 이러한 사상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다. 다만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덮어 놓고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려는 집단의 심리는 알 것도 같다. 그들은 변화를 원치 않으며, 고로 여성들의 침묵을 원한다. 이제 더는 본인의 아버지 세대처럼 살 수 없어 아쉬워하던 남사친의 심리가 페미니즘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집단의 속마음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젊은 여성들은 더는 본인들의 어머니 세대처럼 살 생각이 없다.


지영과 그의 어머니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관통하는 정서는 결국 지영이 본인의 어머니에게 빙의해 시아버지에게 던진 그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 저도 제 딸 귀해요.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표현해 보자면 나도 우리 집에서 귀한 딸이다 정도일 것이다. 내 집 자식이 귀하면 남의 집 자식도 귀한 건 당연지사다. 이 메시지를 성별만 대입해 너네 집 아들만큼 내 집 딸도 귀하다고 했을 뿐인 이 영화에 그렇게 화 낼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더는 젊은 여성들은 위와 같은 나도 힘들어, 나 좀 이해해 줘 같은 한탄에서 멈출 생각이 없다. 지금보다 한 층 더 진보하고 평등한 사회로의 변화는 이미 형재 진행 중이다.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4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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