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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08. 2021

[헝거 게임] If I were her

극한의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든 소설이든 순수한 오락성을 갖추었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작품은 아주 흔치는 않다. 예를 들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히어로물의 경우 교과서적인 도덕적 메시지를 살짝씩 곁들이기는 하나, 누가 보아도 스토리보다는 재미가 우선인 장르이다. 나에게 진한 감동과 영감을 준 수많은 영화들의 경우 연출을 잘했거나, 잘 썼기에 재미를 느꼈던 것이지 오락성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드물게 오락성과 메시지 모두를 균형 있게 갖추고 있는 작품이 바로 ‘헝거 게임’ 시리즈라고 생각한다. 12구역에서 차출된 총 24명의 10대 조공인들이 단 한 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고 죽이는 게임. 수도에 사는 사람들의 즐거움과 독재 국가의 견고함을 과시하기 위해 다른 구역의 아이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게임에 동원된다니. 이 잔인한 설정에 호기심이 동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생존 게임이라고 하면 으레 생각나는 이미지들이 있다. 등장인물들이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도륙되는 핏빛 향연과, 캐릭터 간의 끊임없는 대립과 배신, 그리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 같은 것들. 하지만 ‘헝거 게임’은 비슷한 콘셉트의 다른 작품들처럼 자극적인 연출이나 원초적 재미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주인공 캣니스의 입장에 관객(혹은 독자)들을 던져 놓고 쉼 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고.




내가 만약 캣니스였다면?


수도 ‘캐피톨’과 그 아래 지배를 받고 있는 12개의 구역으로 이루어진 독재 국가 ‘판엠’. 과거 반란에 대한 징벌로서 ‘판엠’은 매년 각 구역에서 12~18세의 여자, 남자 한 명씩을 추첨해 ‘캐피톨’의 거대한 경기장에 모아 놓고 단 한 명의 생존자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고 죽이게 하는 ‘헝거 게임’을 진행한다.


가장 가난한 12구역에서 사는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은 이제 갓 12살이 된 동생 프림과 함께 어김없이 돌아온 제74회 ‘헝거 게임’ 선출식으로 향한다. 하필 동생인 프림이 조공인으로서 뽑히게 되고, 캣니스는 어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 대신 게임에 출전하겠다고 나선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대신해 게임에 지원하는 일은 12구역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남자 중에서는 한때 굶주림에 힘들어하던 캣니스를 도와준 피타 멜라크가 선출된다.


74회 헝거 게임 조공인 선출식에 참여한 캣니스(왼쪽)와 동생 프림 (오른 쪽)


게임메이커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그들의 태도에 욱하고 만 캣니스는 대범한 일을 벌임으로써 높은 평가 점수를 받지만, 덕분에 스노우 대통령의 눈밖에 나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게임. 시작과 동시에 많은 참가자들이 사망하고, 지금까지 가장 많은 배출한 1, 2구역의 참가자들이 동맹을 맺는다. 순식간에 낮밤이 뒤바뀌고, 환각을 일으키는 독성 벌 같은 생명체들이 출연하며, 숲에 불이 붙는 등, 게임을 보는 이들의 재미를 위해 다양한 효과들이 수시로 소환된다. 이러한 극한의 상황에서 주인공 캣니스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면 단연 캣니스가 어린 동생 프림을 위해 대신 게임에 참가하겠다고 지원할 때일 것이다. 그 장면은 몇 번을 보아도 볼 때마다 울컥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궁금해지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촌 혈육이라고는 고작 한 살 차이에 키는 나보다 20센티가량 더 큰 남동생 한 명뿐인지라 미안하지만 희생정신을 발휘할는지 미지수다. 적어도 나보다는 생존 확률이 높아 보이니까. 그러나 극 중 캣니스와 프림처럼 나와 비슷한 나이 차가 나는 여자 사촌들을 떠올리면 사정이 달라진다. 갓난아기 때부터 크는 모습을 쭉 보아온 탓에 아직도 어리게만 느껴지는 동생들이 죽으러 간다는데 가만있기란 힘들 듯하다.


이렇게 첫 선택을 마친 캣니스에게는 연이어 다른 선택지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다른 참가자들과 연합할지 아니면 독립적으로 게임이 임할지, 내가 먼저 죽일지 혹은 최대한 싸움을 피할지,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스폰서들 앞에서 마음에도 없는 쇼를 벌일지 또는 어차피 죽을 마당에 본인 성격대로 행동할지 등. 이 외에도 캣니스는 수시로 크고 작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며, 모든 선택은 직간접적으로 그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


74회 헝거 게임에 참가하는 캣니스


캣니스의 선택들을 하나하나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렇게 그의 선택을 따라가면서 자연스레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캣니스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소환되거나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치들은 사랑, 신뢰, 연민, 도덕성과 같은 것들이라는 점을. 저 X 같은 것들 다 죽여버리고 승자의 영광을 독식해 버리겠다는 인간의 내면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혹은 그럴 것이라 여겨지는 음침하고 추악한 욕망 따위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


‘헝거 게임’ 시리즈의 가장 높이 사는 점 중 한 가지는 일정 선을 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제 배우들은 성인이었을지언정 게임에 참가한 극 중 캐릭터들은 모두 미성년자이다. 이 설정 자체로 전개나 연출 상의 한계를 지녔다고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이를 이용해 잔인함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꾸려 나갈 수도 있다. 극악무도하고 비인간적인 게임이 내몰린 10대들이라니.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오히려 불편하지만 더욱 자극적인 스릴을 줄 수 있다. 그 한 예가 ‘헝거 게임’ 시리즈의 소설과 영화가 나왔을 당시 많이 비교되곤 하던 ‘배틀 로얄’ 시리즈일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시리즈가 비교되는 것이 억울할 정도로 둘은 설정의 극히 일부분만 동일할 뿐 전혀 다른 노선을 취한다. 보는 이의 원초적인 재미를 중시하는 ‘배틀 로얄’과 달리 ‘헝거 게임’은 기본 설정만 무시무시할 뿐 그 어떤 자극적인 요소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이러한 면에서는 ‘헝거 게임’은 생존 게임을 주제로 한 그 어떤 작품들과도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숨을 두고 서로 싸워야 되는 상황을 전제로 하는 작품들의 경우 잔인한 연출을 동반한 등장인물들의 연쇄적인 죽음일 것이다. 이러한 장면들을 보다 보면 인간이 한낱 고깃덩어리처럼 취급되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헝거 게임’ 살인과 죽음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저 관객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제공하는 데서 멈춘다.


75회 헝거 게임에도 참가하게 된 캣니스와 피타


극한에 내몰린 세상에서 또 흔히 등장하는 요소 중 한 가지가 바로 강간을 당하거나, 자신의 몸을 무기로서 활용하는 여성들이다. ‘헝거 게임’은 자극적인 죽음을 지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클리셰에 가까운, 자신의 성이 장애물이자 거래 수단인 여성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게임에 참가한 캐릭터들이 모두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다른 작품들에선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다. 여성 관객 입장에서 위기 상황에서 당연하게 강간 위협이 시달리는 여성을 보여주는 것은 무력감만을 안겨 주며, 성을 재화로서 활용하는 여성을 등장시키는 것은 공감의 부재만 남긴다. 임신 가능성이 있는 신체를 지닌 성별로서, 당장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성과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오히려 생존 확률을 낮출 뿐이다. 성관계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처하게 되는 무방비 상태를 감안하면 정상적인 환경, 그리고 신뢰가 동반되지 않은 성관계는 여성으로서는 불필요한 위험 부담을 지는 일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작품 내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거나 그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건 이제 다소 지겹게 느껴진다면, 살기 위해 남성을 유혹하는 장면은 꽤 기만적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냉정하게 남성, 혹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을 체화한 여성만이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다. 물론 위와 같은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에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장면을 극에 넣었을 때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저 시청자나 관객들을 원초적으로 자극하려고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어떤 비판 의식에서 출발한 것인지는 분명 고려의 대상이다. 혹시라도 일정 조건만 맞아떨어질 경우 앞서 서술한 상황들이 있음 직하다고 믿었기에 연출한 장면들이라면 그 게으른 사고방식에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반응은 한숨뿐이다.


캣니스와 반란군들


당연히 모든 이야기가 아름답고 도덕적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며, 순전히 오락성에만 충실한 작품도 그 자체로도 분명 가치 있다. (개인적으로 올해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상당량의 피가 나오는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건파우더 밀크셰이크’였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극단적인 설정도 모자라, 한층 더 적나라한 모습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작위적인 장치들이 마련된 상태에서 표출되는 등장인물들의 처참하고 추악한 모습들이 마치 문명 덕분에 고고한 척해 온 인간의 진정한 모습인 것처럼 단언하는 뉘앙스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헝거 게임’의 주인공 캣니스의 모습이 더 큰 울림을 준다. 특별히 도덕적이지도 않고 대의를 품기는커녕 오히려 회의감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그의 선택들은 연쇄 작용을 통해 거대한 해일이 되어 마침내 체제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나는 인간의 본성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대단히 선하고 윤리적이지만은 않은 각 개인들이 단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을 지키고 싶고, 보기 안쓰럽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을 돕는 그런 사소한 마음과 행동들이 모여 결국에는 우리 모두를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다고 말이다.


영화 '헝거 게임'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65338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0225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72727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78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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