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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29. 2021

[언힌지드] 내면을 갉아먹는 그 이름, 자격지심

각박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법






비록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나름 평범하게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있던 과거의 어느 날. 당시 내 남동생은 지금은 나의 올케가 된 오래 사귄 연상의 여자 친구와 한창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당시 내 남자 친구는 내 남동생 커플이 집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그 질문에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우리 부모님이 더 많이 부담하실 예정이고, 결혼 자금은 올케가 내 남동생보다 훨씬 많이 모아 두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내 설명을 듣고 있던 남자 친구는 우리 부모님이 좀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쩐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여자 쪽에서 결혼 자금을 더 많이 모았다는 말을 듣고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무조건 남자 쪽에서 집을 해오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말을 얹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여자 친구들 중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이야기하자, 그에게서는 오히려 내 얼굴에 침 뱉기처럼 느껴져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수준의 말들이 돌아왔다.


도대체 내 남동생의 결혼 계획에 왜 내 전 남자 친구가 그런 식으로 반응을 했던 걸까. 정답은 간단하다. 바로 자격지심 혹은 피해의식. 당시 그가 준비하고 있던 일은  도통 잘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잘 풀리지 않으니 노력할 맛도 안 나 열심히 하지 않아 시간을 낭비해 버리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도 처음부터 본인과 관련도 없는 말에 피해의식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내가 애초에 그를 만나지도 않았으리라. 대화 당시에는 불쾌했을지언정 이후에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천성이 못 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답답하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이 이러한 자격지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의 범위가 넘어서는 순간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인 것만은 분명하다.



• 태도가 되어 버린 기분


영화 ‘언힌지드’의 주인공 레이첼은 월요일 아침 학교에 늦은 아들을 데려다준 후 출근을 해야만 한다. 조금 습관적으로 늦는 편인 그는 아들을 늦게 데려다주는 바람에 오래 보아온 고객과의 약속 시간을 맞추지 못해 해고를 당하고, 남편과의 이혼 소송과 관련해 변호사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한 이후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안 그래도 아들의 학교에 늦었건만 설상가상으로 도로는 점점 더 막히기 시작한다. 마침내 떨어진 직진 신호. 웬일인지 레이첼의 바로 앞 회색 밴은 움직일 줄을 모르고, 짜증이 날 대로 나 있던 그는 필요 이상으로 크게 경적을 울리고 만다. 이대로 상황이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꽉 막힌 도로에서 레이첼은 아까 그 회색 차량의 주인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차주 남자는 레이첼에게 과도하게 상냥한 태도로 자신이 잠시 딴생각 중이었으며, 좀 더 친절하게 경적을 울리는 법을 알려준 후 먼저 사과한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레이첼에게도 사과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사과할 것이 없다며 큰소리를 친다. 그런 레이첼에게 남자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을 건넨다.


레이첼과 아들 (왼쪽) / 회색 밴의 남자 (오른쪽)


‘정말 힘든 날이 뭔지 알아요? 곧 알게 될 겁니다.’

‘내 말 들었죠? 곧 알게 해 주겠다고.’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자신의 전 부인과 그의 새 남편을 잔인하게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른 후 도주 중이었으며, 부인에게 이혼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직장을 잃고 난 뒤 한참 동안 다시 직업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한 마디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처지로, 레이첼은 사람을 잘못 건드려도 한참 잘못 건드린 것. 내면에 분노가 가득 쌓여 이미 한계를 넘어 있던 남자는 이제 레이첼에게 자신의 분노의 화살을 돌린다. 고작 한 시간 십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지만 살벌한 눈빛을 장착하고, 살크 업 (살 + 벌크업)까지 한 러셀 크로우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그는 심지어 주인공 레이첼에게 매너 좋게 훈수를 두는 장면에서조차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영화 '언힌지드' 속 장면들


더욱 공포를 주는 지점은 그의 캐릭터가 제법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면 보복 운전은 어디에서나 흔하기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두 발로 걷고 다닐 때만 하더라도 매너 좋던 사람이 차에 오르는 순간 조금 답답하게 운전하는 사람을 향해 거친 말을 내뱉는 모습은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운전하는 바로 그날 안 좋은 일이 있었다면? 비록 영화는 보복 운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나는 상황을 그 지경까지 만든 (물론 이야기 전개를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러셀 크로우가 맡은 캐릭터의 내면에도 관심이 간다. 정확히는 분노로서 표출되는 그의 자격지심에. 대부분의 범죄는 이와 같은 피해의식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부인과 사이가 좋고 멀쩡하게 밥벌이를 하고 있을 때에는 말이다. 그러나 한 번의 좌절은 다시 일어설 힘을 조금씩 갉아먹고, 이것이 반복되다 보면 회복에 대한 가능성조차 품지 못할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본인의 망가진 기분이 삶의 태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 다시 일어설 힘


당연히 힘든 상황에서 차곡차곡 쌓인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이 범죄의 변명은 될 수 없고, 이를 남들이 합리화해 줄 이유도 없다. 하지만 요즘처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초자 빡빡하게 느껴지는 현대인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본인의 내면의 불건강한 부분 때문에 무너지거나 망가지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꼭 범죄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동안 쌓인 울분이나 열등감을 남들에게 표출하는 이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부장에게 까이고 대리나 사원에게 화풀이를 하는 과장이나, 본인의 콤플렉스를 해소하고자 남들을 깎아내리기 위해 드릉드릉하는 친구 등등. 지금은 꽤나 안정적인 멘탈을 지닌 나이지만 한때는 그야말로 콤플렉스 덩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외모 콤플렉스에 발버둥치곤 했다. 외모에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 것 자체가 옳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못생기지 않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설령 내가 남의 눈에 못생겼고, 실제로 그런 소리를 듣는다고 해도 이제 개의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의 나는 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아름다움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느라 정작 내 멘탈은 돌보지 못했다.


천만다행으로 여러 면에서 공격성이 0에 수렴하는 나는 ‘언힌지드’의 주인공이나 앞선 예시처럼 공격적인 방식으로 나의 자격지심을 해소하지는 않았다. 다만 스스로를 좀 먹고 주변 친구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예를 들면 모든 일에 대해 나의 외모 탓을 한다거나, 누가 조금만 내 외모에 대해 부정적인 언급을 하면 일주일 내내 우울해하고, 하루 종일 거울을 들여다보며 어디를 손 보면 나아질까 고민하다 친구들에게 우는 소리를 해대는 식이었다. 심지어는 대화 상대방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나 혼자 그 사람이 내 얼굴에 대해 흉을 본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속상해한 적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내가 갑갑하고 딱하면서도 한심하다. 도대체 얼마나 속이 문드러져 있었으면 남의 말에 그렇게 의미 부여를 했을까 싶다. 나의 경우 외모 콤플렉스가 문제였다면 나의 전 남자 친구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경제력이 만족스럽지 않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밖에 학벌이나 연봉, 가족 문제 등 자격지심이나 피해의식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이러한 원인들이 단순히 개개인의 탓이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는 누군가의 비교 대상이 된다. 어린 나이일 때는 집이 어디인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학원은 어디를 몇 개나 다니는지 같은 소소한(?) 것들부터 시작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성적이 매겨지는 시기부터는 더욱 가혹해진다. 자신의 성취가 객관적인 숫자로써 증명되기 때문이다. 성적 이외에도 집에서 얼마나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떤 무리와 어울리는지도 본인의 위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들이다. 질풍노도의 십 대 시절이 지나가고 나면 학교나 직장 등의 ‘간판’이 평가의 대상이 된다. 모든 단계의 모든 성취가 비교되고 평가받는 와중에 자신을 돌아보거나 돌볼 여유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다음을 준비하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조금 더 사람들이 삶을 즐기고 시간에 쫓기지 않을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개개인이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으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남들 다 그러고 사니까, 원래 그게 맞다고 하니까. 이러한 이유로 내가 정하지도 않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다 보면, 게다가 그러한 기준들로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듣고 비교당하다 보면 건강한 감정과 생각을 키우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바쁘게 놀리던 걸음을 잠시 멈춰서 곰곰이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껏 달려온 길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인지, 남들의 무례한 평가들이 정말 마음에 담아 둘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이렇게 한 번씩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감정을 살펴야만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남들이 만든 기준에 휩쓸리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언힌지드’를 보고 나니 약간의 반성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 그동안의 나는 나의 문제를 남들에게 표출하거나 그들을 통해서 해소하려 들지는 않았는지, 다른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진 않았는지, 그리고 본인의 문제로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충분히 관심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 이 각박한 현대 사회에서 다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적절히 돌보며 살아갔으면 싶다. 이것이 짧지만 강렬한 전개를 자랑하는 ‘언힌지드’를 본 나의 결론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41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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