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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22. 2021

[안녕, 나의 소울 메이트] 우정과 사랑의 경계선

어쩌면 닫아 두었을 가능성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강렬한 로맨스만큼이나 나의 영혼과도 같은 소중한 친구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환상을 품고 살아왔던 나는 우정이라는 개념이, 특히 여자들 사이의 우정이 이성 간의 사랑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하지만 이 편견에 데이터 베이스가 아주 없냐 하면 그건 아니다. 보통 여자들은, 특히나 윗세대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가정에 묶여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친구들과도 여전히 어울릴 수 있는 남자들에 비해 우정을 이어 나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아래 세대 여성들에게도 이어져 일종의 편견이자 현실로 자리 잡았다. 게다가 ‘여자의 적은 여자’ 따위의 누구의 바람인지 너무나 분명한 전설이자 괴담이 아직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상황에서 여성들 간의 우정은 입지가 턱없이 좁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여성들 간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상황들 때문에 가능성이 닫히다시피 한 사랑에 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우정과 사랑 타령을 하기 전에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상에서 ‘우정’과 ‘사랑’의 정의를 확인해 보았다.


우정 : 친구 사이의 정

사랑 :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사전적 정의만 놓고 보면 사실 우정 역시 사랑의 한 종류이다. 냉정하게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초등학생 시절 꿈꿨던 끝내주는 연애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지만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애틋한 친구를 찾는 데는 성공한 입장으로서, 그 친구에 대한 나의 감정은 우정을 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가능성이 닫힌 사랑이란 무엇인가. 바로 성애적 감정이 차단되어 버린 여성 간의 사랑이다. 표준국어대사전 상에서는 ‘성애’란 이성 간에 발생하는 무엇인가로서 굉장히 차별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지만, 동성 간의 성애 역시 분명 현실에 존재한다. 가부장적 선입견에 의해 여성들 간의 우정이 폄하되어 온 것과 같은 맥락으로 여성들 사이의 오묘한 기류는 내면화된 사회적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 싹부터 제거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 둘은 정말 친구 사이였을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주인공 안생과 칠월은 어린 시절부터 둘도 없는 단짝 친구 사이이다. 해맑게 우정을 키워 오던 둘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어 안생은 직업 전문학교에, 칠월은 명문고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칠월은 그곳에서 가명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둘은 결국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어쩐지 안생과 가명 사이에도 미묘한 기류가 흐르지만, 칠월의 존재 때문인지 둘 중 누구도 섣불리 선을 넘지는 않는다. 자연스럽게 다 같이 친해진 세 사람은 어느 날 함께 등산을 하게 되고, 도중에 지친 칠월은 안생과 가명을 따로 올려 보낸다. 마침내 정상에 오른 가명은 안생에게 자신이 항상 차고 다니는, 어머니가 불당에서 받아 온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 함께 등산을 하는 장면 (앞에서부터 칠월, 안생, 가명)


그날 이후 자유를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게 안생. 칠월은 지금껏 영혼의 단짝처럼 붙어 지내던 친구를 멀리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속상하다. 안생 역시 아쉬움과 씁쓸함을 삼키며 눈물짓는 칠월을 달래준다. 야속하게도 기차는 결국 목적지로 출발하고, 칠월은 애틋한 마음을 견디지 못하고 달리는 기차의 속도를 맞추어 안생의 손을 잡고 달리다 친구의 목에 걸린 가명의 목걸이를 발견한다. 칠월이 가명의 목걸이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안생은 뒤늦게 친구에게 외친다.


‘칠월, 네가 남으라고 하면 그냥 남을게.’


다른 곳으로 떠나는 안생(왼쪽)과 가명의 목걸이를 발견한 칠월(오른쪽)


그러나 칠월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선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안생과 가명은 함께 명문대에 진학하고, 칠월은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이어 간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전한 우정을 확인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안생의 편지는 언제나 가명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이후 수년 만에 다시 만난 안생과 칠월. 그동안의 그리움이 원망으로 묵혀진 탓일까. 즐거운 시간도 잠시, 그동안 너무나 달라진 서로의 모습에 둘 사이에는 결국 날카로운 말들이 오고 간다. 이후 대학교를 졸업한 칠월과 가명은 결혼을 약속하지만, 가명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며 결혼을 미룬 채 베이징으로 떠나고, 덕분에 칠월은 안생에게서 배웠던 이별과 그리움을 가명으로 인해 또 한 번 겪게 된다. 그렇게 찾아온 베이징에서 가명은 우연히 안생과 재회하고, 하필 그날 안생의 남자 친구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을 가명이 목격하게 된다. 가명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안생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어쩐지 찝찝한 마음에 가명이 사는 곳까지 찾아온 칠월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너랑 가명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난 당연히 너야. 난 항상 네게 양보했어.’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속 장면들


또다시 서로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힐 말들을 내뱉는 것은 정해진 수순. 안생과 칠월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서로를 밀쳐 내고 다시 붙들기를 반복한다. 친구 사이에 느끼는 서운함이나 질투심이라고만 하기에는 둘 사이의 감정은 어쩐지 결이 달라 보인다. 왠지 더욱 질척거리면서도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마치 연애의 그것처럼. 특히나 마지막 반전이기도 한, 안생이 칠월을 위해 평생을 지고 가기로 한 짐을 생각하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친구나 우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엔 어쩐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다. (우정도 사랑의 일종이며, 우정이 성애적 감정보다 덜하거나 못한 관계가 아니기에 우정 이상이라는 표현 역시 적절치는 않다.) 오히려 둘 사이에 끼어든 가명이라는 존재로 인해 안생과 칠월이 완벽하게 친구 사이로만 비추어졌던 건 아닐까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칠월(왼쪽)과 안생(오른쪽)



• 그때 그 감정의 이름은


대학생 시절 친해지고 싶은 후배가 한 명 있었다. 내가 여대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 후배 역시 당연히 여자였다. 당시에는 흔치 않게도 짧은 길이에 굳이 표현하자면 예술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스타일을 하고 다녔으며, 거의 대한민국 남자 평균 키에 옷발을 제법 잘 받는 체형을 자랑했다. 게다가 성격은 어찌나 쿨하던지 눈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매력적인 존재였다. 알고 보니 나의 동기가 이미 그 후배와 제법 친한 사이였고, 덕분에 나도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됐다. 예나 지금이나 전형적인 집순이에 내향인인 나이지만, 무슨 정신이었는지 술과 파티를 좋아하는 그 후배와 어떻게든 어울리려 애썼다. 게다가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사람과 어울리면 기가 급속도로 빨리는 주제에 그 후배를 포함해 다른 친구 여러 명과 금요일마다 이 클럽에서 저 바로 몰려다녔으니 노력이 가상하다 하겠다.


그때 당시 나는 분명 그 후배에게 끌리고 있었고, 그 끌림은 내가 친구들에게 느끼던 것과는 확실히 다른 감정이었다. 그 후배가 여자와의 연애 경험이 있다는 사실에 더욱 마음이 갔던 걸 감안하면 내가 그에게서 기대했던 건 순수한 우정 같은 게 아니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극도로 혐오하던 담배도 이 친구 때문에 처음 손을 댔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나는 그 후배에게 어쩐지 애매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으로 감정을 키우는 대신, 그저 그 모호한 상태를 즐기는 데 만족했다. 그러다 그 감정은 어느 순간 끝나 있었다. 그게 그 후배와 나의 너무 다른 성향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동성 간의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고 있으며 그런 평균값과 다른 사랑의 형태에 대한 차별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나의 일은 아니라고 굳게 믿었던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내가 당시의 나의 감정을 깊이 고찰해 보았다거나 완벽하게 솔직해졌다고 하더라도 그 후배와 언니 동생 사이 이상으로 발전했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후배에게 있어서 나는 뼛속까지 이성애자인 서로의 리그 바깥에 존재하는 사이였고, 나 역시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뒤집어엎을만한 대범함 따위 없었다. 더구나 이 후배와는 성향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달랐기에 결국 친구로서도 썩 잘 풀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한 가지 아쉬운 지점이 있다. 내가 나의 미묘한 감정들을 인정한 순간 경험했을지도 모를 또 다른 가능성이다. 돌이켜 보면 여자인 친구들 간에 ‘너 같은 남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든지, ‘내가 남자라면 너랑 사귀겠다’ 같은 말들을 참 많이도 듣고 건넸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그러한 말들에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남성 연인을 찾지 못해 씁쓸해하며 웃어넘겼을 뿐.


안 그래도 종류 불문 인간관계라면 적극적이었던 적이 없던 나는 한 살, 한 살 더 먹어감에 따라 더욱 정적이고 방어적으로 변해왔다. 스스로 나름 도전 정신이 있다고 믿지만 유독 사람 문제에서 만큼은 평생을 소극적이었던 데다, 소위 말하는 ‘정상적인’ 연애조차도 버거워하는 내가 감히 이제 와서 한 번도 용기 내 보지 못한 형태의 사랑을 시도할는지는 미지수다. 그럼에도 뒤늦게 문득 궁금해진다. 그대로 닫히고 만 새로운 관계로 향하는 길과, 그곳에 도달했다면 달라졌을 나 자신이. 가을을 타는 것인지 아니면 일말의 감수성이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 혹시 모른다는 약간의 기대까지는 아직 버리지 못한 듯하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6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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