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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Nov 19. 2021

[양들의 침묵] 이토록 매혹적인

역대급 지능적 캐릭터들의 숨 막히는 심리전






개인적으로 스토리가 훌륭한 영화보다 더 쉽게 마음을 빼앗기는 작품들이 있다. 바로 캐릭터의 매력이 충만한 영화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각각의 캐릭터들을 비교하며 마음속에서 줄을 세우는 재미가 있는 히어로물을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꺼이 마음을 빼앗기는 종류의 캐릭터는 차분하면서 똑똑한 인물로, 히어로물을 예로 들자면 캡틴 마블이 그가 지니는 상징성으로 인해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이기는 하나 인물 그 자체로만 놓고 보았을 때 가장 매력을 느끼는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이다. 그의 차분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한 태도와 학습에 대한 열정, 그리고 상황을 냉철하게 관통하는 분석력은 지켜보는 이로하여 금(혹은 나를) 흥분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내가 배우였다면 연기해 보고 싶은 히어로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똑같이 지적이지만 과시욕과 뻔뻔함이 넘쳐 성향이 정반대랄 수 있는 아이언맨은 내 마음속 상위권은 아니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 속 두 명의 등장인물들이 있다. 더욱 감사하게도 이 두 사람은 모두 같은 영화에 등장해 두 배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바로 ‘양들의 침묵’의 주인공 FBI 훈련생 클라리스 스탈링과 정신과 의사 출신 카니발(인육을 먹는 사람) 한니발 렉터이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등하게 지능적인 이 두 사람이 펼치는 숨 막히는 심리전을 보고 있노라면 그 강렬함으로 인해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다. 그리고 서로를 상대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이 둘의 신경전이 던져주는, 정밀하게 맞물려 있는 이러한 긴장감의 뒤에는 짜릿한 쾌감이 뒤따른다.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황홀한 대립 덕분에 나의 영화광 인생은 ‘양들의 침묵’을 보기 전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이번 글은 덕후의 마음을 담아 이 두 캐릭터에 대한 예찬론을 펼쳐 보고자 한다.


클라리스와 한니발



클라리스 스탈링 : 답을 찾아내고 말겠어


FBI의 훈련생인 클라리스는 연쇄살인마 버팔로 빌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전직 정신과 의사이자 악명 높은 식인 살인마인 한니발이 수감되어 있는 볼티모어의 특수 수감 시설로 보내진다. 수습요원이라는 위치를 감안했을 때 아직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겪어 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큰 나이인 라는 점, FBI의 근무 및 훈련 환경은 물론 한니발이 갇혀 있는 수감소 모두 극 남초라는 사실, 그리고 영화 ‘양들의 배경’의 시대적 배경이 1980년대 초라는 것을 고려하면 젊은 여성인 클라리스가 매 순간 감당해야 하는 압박감은 보통이 아님에 틀림없다. 게다가 자신의 환자를 아홉 명이나 살해 후 무려 요리해서 먹기까지 한 끔찍한 살인마를 기꺼이 혼자서 만나러 갈 생각을 한 것을 보자면 그는 무척이나 대담하다.


클라리스의 또 다른 특징은 직관적이고 전략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자신을 어리숙한 사회초년생으로, 혹은 매력적인 여성으로만 보는 사람들에게 쉽사리 휘둘리지 않으며, 자신을 통제 하에 두려 하거나 만만한 먹잇감으로 보는 이들을 적당히 구슬릴 줄도 안다.


‘박사님께 배우러 왔습니다. 제게 자격이 있는지 판단해 보시죠.’


클라리스는 직감적으로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거나 흥미를 끌만한, 혹은 특정 행동을 부추길 수 있는 대답을 어렵지 않게 떠올려 적절한 타이밍에 건넨다. 충분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과 어떻게 뜯어보아도 사람들과의 만남을 즐기는 사교적인 타입은 아니라는 점으로 판단해 보건대 상대방에 따라 다르게, 그리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그의 태도는 타고난 기질로 보아야 마땅하다.


클라리스 스탈링


클라리스는 또한 독립적이다 못해 독단적인 모습을 보인다. 비록 FBI 국장인 크로포드에 의해 한니발에게 보내졌지만 그와 만남을 가진 직후부터 클라리스는 국장이 마련해 놓은, 얌전히 따라가야 할 길에서 기꺼이 벗어나 버린다. 적어도 초반에 클라리스는 자신의 소속과 본분을 어떻게든 인지하고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니발과의 게임과 버팔로 윙을 잡아야 한다는 목표 의식에 사로잡히면서 본인만의 방식을 펼치기 시작한다. 클라리스의 이러한 마이웨이 기질은 한니발도 곧장 꿰뚫어 본 바 있는 그의 야망에 의해 더욱 부채질된다.


클라리스가 이 정도의 복잡함과 입체성을 지녔기 때문에, 거의 귀신같다고 할 수 있는 통찰력의 한니발에게 그저 가련한 먹잇감이 아닌 제법 호기심을 유발하는 괜찮은 상대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영화 상에서는 버팔로 빌의 추적 과정과 한니발과의 접전을 좀 더 비중 있게 다룬 탓에 제목과도 관련 있는 클라리스의 어릴 적 트라우마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는다. 이 부분은 스핀 오프 격인 드라마 ‘클라리스’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맛볼 수 있다. 한니발보다 클라리스에게 좀 더 끌린 관객이라면 아마 후속작이랄 수 있는 영화 ‘한니발’보다는 해당 드라마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약간은 건조한(?) 느낌의 조디 포스터를 이어 좀 더 촉촉한(?) 이미지의 줄리안 무어가 클라리스 역에 캐스팅된 것은 배우의 훌륭한 연기력을 떠나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니발 렉터 : 너는 이미 내게 모두 읽혔어


한니발 이성적이고 인간적인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과 카니발이라는 야만적인 정체성의 모순이 던져주는 (오로지) 캐릭터로서의 매력은 가히 독보적이라고 하겠다. 애써 무서운 표정을 지어 보이지도, 굳이 언성을 높이지도 않지만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두 눈을 들여다볼 때면 그 어떤 캐릭터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압박감과 공포가 밀려온다. 이는 단지 한니발이 잔인하다 못해 엽기적인 살인마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를 진정으로 두렵게 만드는 요소는 다름 아닌 무서울 정도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통찰력이다. 한니발은 방탄유리를 사이에 두고 클라리스와 몇 마디 나누며 관찰한 것만으로도 그의 출신 배경과 성향을 금세 파악해 버린다. 잭 크로포드 소장 역시 이를 염려해 클라리스를 보내기 전 한니발에게 개인적인 것을 얘기하지 말고, 속마음을 드러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지만 한니발의 분석력 앞에 이러한 경고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한니발은 또한 동물적이다 싶을 정도로 예민하다. 이 예민함 덕분에 남들보다 뛰어난 후각을 자랑하고, 기억만으로도 자세히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시각적 이미지를 잡아내는 능력도 탁월하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쉽사리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기회와 단서들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이런 기질을 활용해 그가 결국에는 탈출을 성공하는 순간에는 전율 비슷한 것을 느꼈다. 너무나 극악무도하고 부정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이기에 차마 응원할 수 없지만, 한니발의 지능적이고 치밀한 면모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통찰력과 기민함은 그의 흥미를 유발하는 대상을 발가벗기듯, 혹은 살가죽을 발라내듯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당연히 한니발은 단순히 이러한 분석에서 그치지 않고 상대방을 본인의 입맛대로 요리하는 데 십분 활용한다. 클라리스에게 무례를 범한 다른 수감자를 죽게 만든 장면이나, 후속작 ‘한니발’에서 메이슨에게 벌어진 비극을 보고 난 후엔 한니발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마리오네트처럼 그의 손에서 놀아나겠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한니발이 끔찍한 살인마라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그와 어떻게든 엮이고 싶지 않게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맞아. 사람들은 매일 보는 것에 탐욕을 느끼지.’


이처럼 모든 것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꿰뚫어 볼 줄 알기에, 다른 이들이 버팔로 빌을 분석하는 데 애를 먹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한니발은 곧장 대상의 본질을 파고든다.


한니발 렉터


클라리스와 한니발 모두 쉽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매 순간 눈앞의 상대방을 끊임없이 파악하며, 직관이나 통찰이라는 표현을 넘어선 거의 앞 일을 예측하는 듯한 면모까지 보인다. 이런 두 사람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또 조화를 이루는 모습은 영화 속 캐릭터의 매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한 사람으로서 짜릿하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하다. 영화나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성향을 분석하는 한 사이트에 따르면 클라리스와 한니발의 MBTI 유형은 모두 INTJ라고 한다. (네티즌의 투표에 기반한 결과이므로 정확성은 장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공통적 기질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진 두 사람의 객관적 위치와, 상황의 맥락에 따른 태도와 반응의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 역시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 가지 재미 요소이다. 아직까지는 이 영화를 제외하고 두 주인공이 존재감과 지능 면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 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은 채로 팽팽하게 밀고 당기기를 하는 작품은 만나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여유로워지는 연말 다시 한번 ‘양들의 침묵’을 진득하게 음미해 보아야겠다.


클라리스와 한니발






사진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2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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