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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Dec 03. 2021

[루저의 역습] 그땐 그랬지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소소하고 지질한 이야기






해외 영화를 보다 보면 문득 어디든 사람 사는 거 비슷비슷하구나 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최근 그런 생각을 들게 한 영화 장르 중 하나가 바로 하이틴물이다. 10대 시기를 돌이켜 보면 그때만큼 사람들이 각각의 집단으로 나누어 어울리는 시기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대학생 때는 성인으로서의 체면이라는 것을 의식해 적당히 사교성을 발휘하려 애쓰기 시작하고, 사회인이 된 이후부터는 원만한 직장 생활과 적절한 평판을 위해서라도 모두와 적당히 두루두루 어울릴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상대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하고만 몰려다니는 것이 가능한 학창 시절. 학교의 아이들은 분명 각각의, 그리고 꽤나 배타적인 집단으로 분류될 수 있다. 성적이 전교 상위권에 드는 모범생들, 소위 말하는 일진들, 일진들 근처에서 일을 돕거나(?) 비위를 맞추는 듯한 무리, 운동이나 예체능을 타고난 아이들, 그리고 대다수의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들까지. 세세한 부분은 각 학교나 학급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한 아이가 둘 이상의 집단에 속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큰 틀은 어디든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느 집단에 속했느냐 하면 당연히 제일 마지막에 언급한 평범하고 조용한 학생들 무리이다. 성적은 그냥저냥 나쁘지는 않은 수준이었고, 눈에 띄는 행동을 한다거나 굳이 선생님들 신경을 거스를 깡 따위 없었으니 모범생과 일진 모두와 인연이 없었고, 그림은 제법 그렸지만 미대 입시를 준비한 것도 아니고 몸을 쓰는 모든 일에 재능이 전무했으니 자연스레 큰 존재감은 없는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평범한 학생들도 저마다의 특징과 개성이 없겠냐만은 그건 다른 집단에 속한 아이들도 마찬가지일 테니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이런 학창 시절의 '정체성'을 품고 있던 와중에 얼마 전 별 생각도 기대도 없이 감상한 영화가 바로 ‘루저의 역습’ 되시겠다. 다음 영화 사이트와 넷플릭스 상에서는 ‘루저의 역습’이라는 직관적인 한국 제목을 자랑하지만, 구글 검색 결과에서는 ‘더 아웃스컬트’, 영문 제목으로는 ‘The Outcasts’와 ‘The Skirsts’ 두 가지가 나온다. 왜 이처럼 제목이 많은 것인지는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대단히 잘 만들었다거나 짜임새가 썩 훌륭하지는 않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옛 추억에 잠기며 나름 유쾌한 기분을 느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 학교, 약육강식의 세계


원소주기율표를 줄줄 외우는 미래의 MIT생인 과학 소녀 민디, 그리고 자작곡을 쓸 정도로 음악에 재능을 보이는 조디는 모든 일상을 함께 하는 단짝 친구 사이이다. 그런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교내 먹이 사슬 제일 밑바닥에 속하는 인물들로, 학교의 최고 서열인 휘트니의 주요 먹잇감이기도 하다. 이제 곧 졸업이라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괴롭힘을 어떻게든 버텨 보려던 둘은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르고, 이성적인 대화만이 합리적인 해결 방법이라는 생각으로 휘트니를 찾아간다. 앞으로 평화롭게 지내고 싶으니 더 이상의 괴롭힘은 멈춰 달라는 두 친구의 차분하고 간곡한 부탁에 휘트니는 의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물론 두 사람을 파티에 초대까지 한다. 교내 ‘루저’ 집단에 속해 있던 민디와 조디는 무려 파티에 초대받았다는 사실에 기뻐 선물까지 들고 파티에 찾아간다. 그러나 학교 아이들이 잔뜩 모인 그곳에서 휘트니는 조디의 노트북 캠코더를 해킹해 찍은 영상들을 공개해 그에게 망신을 준다. 그 이후 독재자처럼 군림한(?) 휘트니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민디와 조디는 일생일대의 작전을 세운다.


조디와 민디 (왼쪽) / 휘트니와 그의 무리들


민디와 조디의 목표는 교내 다양한 무리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아 이러한 투쟁에 동참시키는 것. 두 친구는 자신들의 계획에 관심을 보이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본인들의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는지 저마다의 가치와 흥미를 지녔던 각각의 개성 넘치는 집단으로 흩어져 아이들은 어느새 '체제 전복'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똘똘 뭉치고, 덕분에 휘트니를 필두로 한 잘 나가는 아이들의 위치는 휘청이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루저들의 역습'이 멈추었다면 특정 소수의 아이들이 분위기를 주도하고 통제하지 않는 평화로운 학교 생활이 되었을 터. 그러나 민디는 처음으로 맛 본 권력의 맛에 서서히 심취해 가고, 그 와중에 조디에게는 남자 친구가 생기게 된다. 왠지 친구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듯한 기분에 서운함을 느끼던 민디, 설상가상으로 너무나 가고 싶어 하던 MIT에 합격하는 대신 대기 명단에 오르게 된 그는 조디와도 서서히 멀어지면서 점점 더 막 나가기 시작하다가 결국 휘트니의 비밀을 학교 전체에 공개해 버린다. 조디는 자신이 당했던 똑같은 방법으로 휘트니에게 굴욕을 준 민디를 질책하지만, 이미 서운함이 쌓여 있던 그는 친구의 비판 따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조디와 민디, 그리고 친구들


그렇게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두 사람. 영혼의 단짝과도 같던 조디와 사이가 멀어진 민디에게는 이제 휘트니가 그러했듯 학교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뿐이다.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진 민디는 자신이 개발한 ‘진실의 약물’을 곧 있을 졸업 파티에 뿌릴 계획까지 세우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디는 어떻게든 친구를 막으려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모든 것은 휘트니가 꾸민 계략으로, 반란의 주축인 민디와 조디의 사이가 멀어진다면 자신이 다시 권력을 되찾을 것이란 계산에서 벌인 일이었다. 이 날의 해프닝으로 휘트니의 바람처럼 두 친구의 사이는 파국에 가까운 상황을 맞이하고, 민디는 자신이 만들어낸 약품으로 인해 경찰 조사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한때는 교내 권력 구조를 뒤집어엎자는 목표로 의기투합했던 각각의 루저 집단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학교는 결국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 그때 그 시절의 진짜 주인공우정


10대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이틴 영화들의 경우 10대 시절에만 겪을 수 있는 특유의 공통된 감성과 함께 필수로 등장 요소들이 있다. 농익은 맛이라곤 없는 풋풋한 로맨스, 부모님과의 갈등, 교내 인기 학생과의 대치 상황, 조금은 지질해 보이지만 왠지 그리워지는 우정, 그리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성장 서사까지. 하이틴물은 보통 이 모든 것들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적절히 섞여 있다. 다만 이 요소들 중 어떤 부분에 좀 더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전개 방향은 조금씩 달라진다. 영화 ‘루저의 역습’의 경우 위와 같은 분류 중에서도 우정 이야기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우정을 메인 주제로 하는 하이틴 영화 쪽이 좀 더 취향이다.


아무리 사람 사는 모습이 근본적으로는 거기서 거기라지만 아무래도 미국의 하이틴 영화 속 풍경과 내가 실제로 겪었던 학창 시절의 그림은 제법 다른 것이 사실이다. 잔디라고는 없는 모래만 날리는 운동장에, 조금은 삭막하게까지 느껴지는 건물 외관, 그리고 왠지 모르게 퀴퀴한 냄새가 나는 듯한 교실까지. 고등학생 때는 그나마 교복 디자인이라도 예뻤지만, 중학생 시절 입던 교복 재킷은 오묘하고도 촌스러운 색상 덕에 낯빛을 다 죽어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게다가 원하는 과목을 골라서 듣는 행운 따위 존재하지 않았으니, 억지로 책상 앞에 붙어 있었던 탓에  당시 수업 시간의 반은 졸았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물론 하이틴 영화 속 풍경도 과장과 미화가 된 부분이 꽤 많겠지만 평생을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입장으로서 약간의 환상 (그리고 나는 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는 막연한 불안)이 없지는 않다.


비교적 재밌고 화려하며, 이미 인생을 한껏 즐기는 듯한 영화 속 10대들의 (심지어는 교내 혁명까지 꿈꾸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는 와중에도 꽤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주인공들의 우정이다. 성인들이 하루 대부분을 직장과 일에 붙들려 있듯이 학창 시절에는 보통 같은 반 친구들과 한 공간에 묶여 있다. 대부분의 선택권이 박탈당하고, 자유가 제한된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친구들과의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아침 일찍부터 등교해 피곤해 죽을 것 같지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친구에게 쪼르르 달려가 수다를 떨기 사작하면 정신이 번쩍 들곤 했다. 수업 내내 동태눈을 하고 있다가도 점심시간에 교실을 박차고 나가는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맑고 또렷해졌다. 시험 기간이 끝나면 함께 분식집에 가서 배를 채우고 노래방에서 악을 쓰다 나왔으며, 조금 더 친한 친구와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부모님이나 담임 선생님과 했던 것보다도 더 심각한 태도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이처럼 그 어떤 장면들보다도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감정들이 더욱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무엇을 배웠고, 어떤 사건이 있었으며,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했는지 같은 것들보단, 남은 점심시간 동안 모든 혼을 불태우듯 친구들과 정신줄을 놓고 복도를 뛰어다니던 모습이 가장 또렷하게 떠오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심지어는 그때의 내 기분, 그리고 나와 친구들의 웃음소리마저 아직까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로 영화 ‘루저의 역습’을 보는 동안에도 다른 부분보다 두 주인공 민디와 조디의 우정, 그리고 주변의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성에 더욱 이입이 되었다. 로맨스나 라이벌과의 경쟁, 부모나 가족들 간의 갈등이나 성장담 같은 것들은 하이틴물이 아닌 다른 장르에서도 충분히 심도 있게 다룰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대 시절의 우정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다른 시기에 비해 친구나 또래 아이들에 대한 의존도가 유난히 높을 수밖에 없는 특수성, 웃음도 울음도 끊이지 않는 예민한 감수성과 미래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혼재된 복잡한 머릿속, 1도 10만큼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 새로울 어린 나이까지. 모르긴 몰라도 스스로 평범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에서 무작위로 대여섯 명쯤 데려다가 그들의 학창 시절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엮어 각색하면 꽤 괜찮은 코미디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의 성향 자체는 과거보단 현재에, 현재보다는 무조건 미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편이다. 과거로, 혹은 학창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크게 공감도 되지 않는다. 정작 소울 메이트랄 수 있는 가장 소중은 친구는 스무 살에 만났으니 아쉬운 마음도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틀에 나를 맞추어야만 했던 학교라는 공간과 학창 시절, 친구들과 쉼 없이 깔깔대고 떠들던 그 시간이 인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순수하게 즐거웠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94132

IMDB : https://m.imdb.com/title/tt2597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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