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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Dec 24. 2021

[더 룸] 욕망, 과연 그 끝은

꼭 나쁘기만 할까






이제 더는 어리다는 소리는 듣지 않는 나이가 되고 나니 인간이 지닌, 어쩌면 모든 생명체가 지녔을 ‘욕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생각이 재정립되었다. 동식물들에게도 나름의 감정과 생각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인간이 지닌 욕망의 스펙트럼이 아마 좀 더 깊고 다양하며 때로는 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리고 나 자신이 인간 당사자이기에 아무래도 다른 생명체보다는 인간의 욕망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욕망이라는 단어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좀 더 강했다. 그 원인을 찾자면 아무래도 내가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던 미디어의 탓을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지배적이고 보편적으로 갖는 생각이나 인식 대부분 역시 마찬가지로 교육이나 각종 매체의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나,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에는 좀 더 다양한 시각을 접할 기회가 늘어난다. 머리가 커지면서 어른들이 종종 입에 올리는 ‘원래 그래’라든가, ‘다들 이렇게 살아’라는 말에 의문을 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사춘기 전의 나이대에는 다수가 지닌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특히나 아무 생각 없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던 만화 영화라든가, 어른들이 읽으라기에 보던 책들 같은 경우 어린 시청자와 독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란 거의 비슷하다. 하나같이 사랑의 가치,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찬양하거나, 꿈과 우정을 아름답게 묘사한다. 내용이 행복하게 끝나든, 슬픈 결말을 맞이하든 예외를 찾기는 힘들다. 그나마 ‘자살 토끼’ 정도가 내가 어린 시절 접했던 이야기 중 주류의 생각에서 벗어난 작품이었달까. 지금에서야 그 작품이 엉뚱하면서 극단적인 전개를 통해 삶의 허무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만 할 뿐, 당시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림이 귀여워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


어쨌거나 세뱃돈 덕분에 부모님 몰래 ‘자살 토끼’를 읽게 된 어렸던 나는 어느새 성인이 되어 예전에 무조건적으로 주입된 가치와 개념들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란 없으며, 당연하게 살아온 제도나 누군가의 행동에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정립하게 된 것이다. 또한 막연히 부정적이라고 인식하던 것들에 대해서도 좀 더 비틀어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달리 받아들이게 된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욕망’이라는 개념이다. 표준대국어사전에서 ‘부족을 느껴 무엇을 가지거나 누리고자 탐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정의하는 이 욕망이라는 것은 내가 어릴 적, 심지어는 성인이 되고서 접한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썩 긍정적으로 그리지는 않고 있다. 왜 이 욕망이라는 것이 비교적 부정적인 방식으로 묘사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손에 없는 무언가를 갈망한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묻고 싶다. 욕망의 끝이 과연 불행하기만 할까.



원하고 또 원하다


케이트와 맷은 새 출발을 위해 뉴욕에서 조용한 시골로 이사를 온다. 집 청소를 하던 중 두 사람은 벽에 있는 수상한 구멍을 발견하게 되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벽지를 모두 뜯어낸다. 그리고 드러난 기묘한 방. 그날 밤 술에 취한 맷은 그 방에 들어와 혼잣말로 술 한 병을 더 마시면 좋겠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그 순간 방의 불이 깜빡거리더니 그의 눈앞에 술 병 하나가 나타난다. 방의 비밀을 알게 된 맷은 케이트에게 방의 작동하는 방식을 알려주고, 두 사람은 돈부터 시작해, 음식, 보석 등 온갖 것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방의 기능을 마음껏 즐긴다.



한편 두 사람이 이사를 오며 불렀던 전기 기사가 도착하고, 그는 맷에게 이 집에서 살던 부부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맷은 신원 미상(존 도)이라고만 알려진 범인이 그 방이 살인을 저지르게 만들었다는 진술을 한 것을 보고 꺼림칙한 마음에 범인을 직접 찾아가기에 이르고, 그런 맷에게 범인은 늦기 전에 그 방에서 나오라는 경고를 한다. 기분이 더욱 찝찝해지기만 한 상태로 집에 돌아가던 맷은 주머니 속, 방이 만들어준 돈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더니 집에 도착해서는 문밖에 두었던, 마찬가지로 방에게서 얻은 그림이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한다. 방의 진실을 깨달은 맷은 집안에 들어와 케이트가 갓난아기 한 명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기를 없애려 하지만, 케이트의 만류와 서럽게 울어대는 아기로 인해 결국 마음이 약해진다. 그렇게 일단 살아남은 아기는 집안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점점 성장한다.



영화 '더 룸'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궁금해진다. 내가 그 방에 들어간다면 어떨까. 방 자체가 집과 한 세트이니 지금은 가지지 못한 집을 달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고, 아마 근사한 서재와 DVD나 블루레이를 모아둘 수 있는 공간부터 만들어 달라고 했을 듯하다. 그동안 궁금해하던 향수들도 모조리 다 요청하리라. 하지만 인간 아기를 만들어 달라고 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는 나의 생식 능력의 문제 유무나 출산 혹은 양육 의지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아무래도 추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고와 의식 수준을 갖추게 될 가능성이 큰 인간 아기를 부탁하기에는 어쩐지 개운치 않다. 살아 있는 것을 바란다면 털이 북슬북슬한 동물 친구들 정도는 유혹을 느낄 법 하기에 바깥 산책이 필요 없는 고양이는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이 또한 방의 비밀을 알 경우의 이야기이다. 만약 비밀을 모른다면 커다란 개 한 마리도 같이 부탁했다가 엄청난 비극을 마주했으리라. 물론 아기를 원하지만 두 번이나 유산 경험이 있고, 아마도 입양은 고려해 보지 않은 듯한 부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영화 전개 상 꼭 필요한 설정일 것이다.



• 본능, 그리고 원동력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정과 나쁘지 않은 전개에 비해 영화의 결말은 다소 김이 빠진다. 이를 해피 엔딩이라 해야 좋을지, 새드 엔딩이라고 해야 할지도 애매하다. 굳이 말하자면 주인공들 입장에서는 해피 엔딩이나, (나와 비슷한) 관객 입장에서는 새드 엔딩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럭저럭 이야기를 잘 꾸려나가다가 막판에 고꾸라진 격이랄까. 주인공들에게 어떻게든 한 줄기 희망의 빛을 안겨주고 싶은 감독 혹은 각본가들의 의지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 역시 다른 영화나 책,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등장인물들이 무한히 펼칠 뻔하던 욕망 그 자체에는 부정적인 시선을 갖추고 있다. 소소하게 술 한 병으로 시작했던 부부는 점점 더 큰 것을 바랄 뿐 결코 왔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리고 이는 지켜보는 이들에게 마찬가지로 몸집을 서서히 불려 가는 불안을 자아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마저도 질린다는 듯 허무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 역시 왠지 끝없는 욕심의 자연스럽고도 합당한 처벌이자 말로처럼 느껴진다.


각종 매체에서 사람들을 가장 많이 파국으로 끌어내리는 요소들 중 한 가지는 단연 돈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 돈 자체를 미친 듯이 좇다가 행복한 인생을 맞이한 이야기 속 주인공은 없다. 어딘가 있더라도 드문 것만은 확실하며, 필연적으로 불행한 결말을 맞이하진 않더라도 그들을 향한 영화의 시선은 분명 비판적이다. 오히려 돈은 없지만 가족끼리 화목하고 항상 가진 데 만족할 줄 아는 등장인물들은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이렇게 가난하고 단란한 족들 중 꼭 한 명은 그들의 여유롭지 못한 사정에 불만을 품곤 하는데, 결국에는 다른 가족들의 사랑 덕분에 이를 반성하고 가정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굳이 돈이 아니더라도 사랑이나 (상업적이고 물질적인 성공과는 무관한) 꿈, 혹은 이에 상응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무언가를 열렬히 갈망하는 인물들은 보통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스토리의 주제 자체가 실존 인물의 성공 신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이왕이면 돈이 많았으면 싶다. 내가 이와 같은 생각을 내비치면 주변 사람들은 너무 돈돈 거리면 안 된다거나,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재벌들이 행복해 보이느냐 같은 반응들을 보이곤 한다. 물론 나처럼 솔직하게 돈을 많이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다. 돈 욕심에 대해 불편해했던 사람들의 대답이 본심이었을지는 일단 제쳐 두자. 다만 한 가지 의문은 고 넘어가고 싶다. 이러한 반응들은 지금껏 인생을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에 기반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동안 노출되어 온, 정확히는 물질적인 가치와 이에 대한 욕구를 부정적으로만 그린 각종 매체의 영향도 분명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문에 본인의 솔직한 생각과 관계없이 습관적으로 정답이라고 주입되어 온 답변만을 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 끊임없이 바라고, 유혹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 믿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본성이 막연히 악한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말하자면 내게 있어 하나를 가진 후 그다음 또 하나를 바라는 모습 자체는 선과 악은 물론, 호와 불호의 평가 밖의 영역이다.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영화나 드라마 등을 감상할 때 사랑 등 순수한 (혹은 그렇다고 여겨지는) 감정들만이 최우선 가치이며, 돈이나 성공에 대한 욕심은 사람을 망가뜨린다는 식의 일차원적 메시지가 읽힐 때마다 마음은 편치만 머릿속은 불편해지는 기이한 경험을 하곤 한다. 때론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자리에 안주하게 만들어 더 큰 것을 바라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는 아닐까 하는 과한 비관주의를 잠재울 때도 있다. 그러나 대중에게 잘 팔리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생각하면 이처럼 순결하기 그지없는 주제의식이 무조건 잘못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나 또한 웬만한 종류의 사랑들을 현재 수행 중에 있고, 이것이 주는 기쁨을 긍정한다. 그러나 욕망이라는 개념에 대한 나의 결론은 변함이 없다. 욕망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으며, 더 큰 발전을 이루게 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도덕성과 적절한 윤리의식만 잃지 않는다면 말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3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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