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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Dec 31. 2021

[말할 수 없는 비밀] 무모한 사랑 이야기

모든 걸 버릴 수 있을까






나는 현실에 집중하기보다는 비교적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낭만적인 편은 못된다. 잘 만든 영화나 잘 쓰인 소설을 읽고도 감흥이 없는,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현실이 아닌 작품 속에 빠져 있을 때만큼 감정과 생각이 풍부해질 때도 없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인간관계에서의 낭만이다. 특히나 연인 관계에서의 낭만이. 부끄러운 말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노력을 들이는지 알고는 어떻게 저게 가능하나 싶어 충격과 반성을 동시에 느낀 적이 종종 있다. 연인을 위한 혀 짧은 소리 같은 건 시도는 해보았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정도를 조절해 상대방이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히 질투하는 법도 모른다.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로봇처럼 뻣뻣하게 굴기 일쑤였고, 그나마도 도대체 뭘 어떻게 표현하라는 것인지 당황스러울 때가 많았다. 이런 나 자신을 솔직하고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차라리 평생 혼자 사는 편이 나은 인간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런 나이기에 로맨스 장르에 상대적으로 공감이 덜 갔던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인 사이의 깊고 복잡한 감정들과, 오로지 상대방을 향해 신경이 민감하게 곤두서 있는 모습들, 서로를 제외하곤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까지. 거기다가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와 자존심으로 인해 너무나 쉽게 틀어져 버리는 관계들을 보고 있노라면 서서히 스트레스가 밀려오는 것이다. 심지어 나는 연애 중일 때에도 주변 친구들에게 성적인 긴장감이나 행위가 동반된 사랑이란 그저 동물적 본능에 기반한 원초적인 무언가 일 뿐이라는 주장을 펼치곤 했다. 이러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이제는 적어도 성애적 감정에 기반한 연애가 원초적 본능 단계에서 좀 더 숭고한 감정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처럼 유연한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최근, 가까운 사람에게 로맨스 영화 한 편을 추천받았다. 제목은 ‘말할 수 없는 비밀’로, 영화 첫 시작 때 정보 표기에 뜬 ‘공포’ 아이콘과 예상치 못한 전개로 인해 잠시 장르 상의 혼란을 느꼈으나 결론적으로는 왜 유명한 지 이해가 가는 작품이었다.



• 이것은 로맨스인가 호러인가


음악 교사 출신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피아노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이는 상륜은 예술고등학교에 전학을 오게 된다. 혼자서 학교 건물을 둘러보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홀려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그렇게 도착한 오래된 음악실에서 상륜은 자신을 이끈 멜로디만큼이나 신비로운 샤오위와 만나게 된다. 상륜은 방금 연주한 곡의 제목을 묻지만 샤오위는 비밀이라고 답한다. 그렇게 마주친 두 사람은 점점 더 서로에게 빠지지만, 상륜이 샤오위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비밀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한다. 게다가 샤오위는 툭하면 학교에 빠져 상륜의 속을 더욱 타들어 가게 만든다.


상륜과 샤오위


두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상륜은 샤오위에게 곧 음악실이 철거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려주고, 그런 상륜에게 오위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연주했던 곡을 마침내 가르쳐 준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돌아가야 할 때면 그 곡을 빠르게 연주하며, 오래된 음악실에서는 이 곡을 연주하면 안 된다는 아리송한 말을 건넨다. 그러다 샤오위는 우연히 다른 여학생 청의가 상륜에게 입 맞추는 모습을 목격하는 바람에 그를 오해하게 되고, 또 한참을 학교에 나타나지 않는다. 상륜은 샤오위의 집까지 찾아가 보지만 그곳에서도 그를 만날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졸업식이 다가오고, 상륜은 피아노 연주 도중 다시 찾아온 샤오위를 발견하고 무작정 뒤를 쫓아간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장면들


상륜은 다시 만난 샤오위에게 이제 더는 사라지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교실에서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상륜이 차고 있는 청의 팔찌로 인해 샤오위는 또 한 번 상황을 오해하고, 상륜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 샤오위는 이미 사라진 뒤다. 상륜은 마침 교실에 있던 친구들에게 축제 때 자신과 춤을 췄던 여학생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고, 친구들은 그런 상륜에게 그날 그가 파트너 없이 혼자서 춤을 추었다고 대답한다. 샤오위의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상황을 돌이켜 보던 상륜은 서서히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듯 늘 혼자였던 샤오위.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책상 위에 메시지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나 샤오위야. 나는 너를 사랑해. 너도 날 사랑하니?’



• 무모하지만 아름다운


2007년에 개봉한 데다 많은 인기를 얻은 작품인 만큼 아마도 나 말고 모두 반전부터 결말까지 전부 알고 있는 그런 영화인 듯 해 감상 이후 조금은 멋쩍은 기분이었다. 분명 제목은 어디선가 들어 본 기억이 나고, 남주인공 역시 너무나 유명한 배우가 연기했다. 아마 상대적으로 로맨스물을 즐겨 보지 않고, 비교적 할리우드 영화에 더 익숙한 나의 영화 편식 때문이리라. 나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추천한 이의 영화 취향은 그야말로 나와 상극이다. 그가 추천한 또 다른 영화는 2004년도 개봉한 일본 버전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내 기준에서 매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두 주연 캐릭터와 시대에 뒤떨어진 설정들 때문에, 제법 근사한 연출이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보는 행위는 감상이 아닌 거의 고문이 되었을지 모른다. 덕분에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보는 게 다소 우려스러웠지만 이미 꼭 보겠노라고 약속을 한 탓에 뱉은 말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감상은 꽤 만족스러웠다.


영화의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남주인공 상륜처럼 샤오윈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책상 위에 샤오윈의 메시지가 뜨는 순간 약간의 소름이 돋았다. 그제야 로맨스 영화라면서 공포 아이콘이 떠 있던 이유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 부분은 분명 엄청난 반전이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국에는 로맨스 장르라는 선로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샤오윈의 정체 못지않게 상륜의 선택 역시 나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간단히 이야기해 상륜은 샤오윈을 위해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쌓아온, 사랑해 온 모든 것들을 과감히 포기한다. 내가 정말 이런 쪽으로는 낭만이 부족한 인간인 탓인지 상륜의 행동으로 인해, 시각과 청각 모두 사로잡는 웅장한 연출을 바라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에게는 결코 닿지 않을 질문을 속으로만 쉼 없이 던졌다. 진짜로? 지금 진심이야? 정말 그걸 하겠다고?


책상 위에 나타나는 샤오위의 메시지를 발견한 상륜


물론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영화일 뿐이다. 이 작품 속에서 벌어진 상황은 영화가 아니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영화 속의 비현실적인 설정들을 무척이나 사랑한다. 히어로물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말도 안 되지만 잘 만든 세계관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 현실성이 떨어지는 세계관 속에서도 현실적인 선택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어벤져스 : 엔드 게임’ 속 수많은 가상의 사건들과 터무니없는 설정들은 그러려니 넘어가더라도, 소울스톤을 두고 블랙위도우와 호크아이가 서로 희생하려는 대신 상대방을 죽음으로 떠밀려 든다면 저게 말이 되나 싶어지는 식이다. 그동안 보아온 그들의 성격을 고려했을 때 상대방을 사지로 몰아넣는 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상륜의 선택을 보고 내가 느낀 기분이 딱 그러했다. 영화 속 판타지에 가까운 요소들은 쉽게 넘겼지만 사랑에 눈이 먼 상륜의 과감한 행동을 보고는 저게 말이 되나 싶어졌다.


상륜 아버지의 앨범 사진 속 샤오위


상륜의 선택으로 인해 혼란과 충격을 느끼던 나는 그나마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안심할 수 있었다. 비록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슬픔이 찾아왔을지 모르나, 적어도 상륜과 샤오윈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상륜이 나와 어떤 식으로든 친근하게 얽힌 관계였다면 그런 행동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고, 내가 그의 입장이었대도 동일한 선택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이 크게 뻔하지 않고, 꽤 잘 만든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이나 친구 사이의 사랑과 달리 연인 간의 사랑은 어느 정도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할 때가 있다. 스스로를 버리는 행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 때도 있고, 반대로 비극을 불러올 때도 있을 것이다. 아집처럼 붙들고 있던 본인의 나쁜 면들이 상대방을 통해 균형을 찾을 수도 있고, 연인에게 모든 것을 내던져 자아를 잃는 것 또한 가능하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서도 연인 관계의 이러한 양면이 잘 표현됐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감히 감독이나 각본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리 없다) 상륜은 분명 본인의 선택으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있겠지만 다행히 행복해 보인다.


태생적으로 쓸데없이 생각이 많고 어느 정도는 계산적인 면이 있는 나로서는 아마 평생 사랑 앞에서 상륜과 같은 과감한 모습은 보이지 못할 듯하다. 영화 속 그의 선택이 낭만적이기는 하나 지나치게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상륜의 계획이 성공해서 망정이지 만약 조금만 틀어졌다면 그의 멀쩡하고 창창하던 인생은 그대로 꼬여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이런 냉정한 생각과는 별개로 대책 없어 보이는 상륜이 나에게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준 것도 사실이다. 물론 영화 속 상황과 설정은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그와 같은 열정과 사랑으로 가득한 마음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팍팍한 세상에 약간의 낭만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낭만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기에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같은 아름다운 작품도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영화들 덕분에 나 또한 가끔씩이나마 촉촉한 감성에 젖을 수 있는 것이리라.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44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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