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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an 21. 2022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

길을 잃어버린 자아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할 듯싶지만 내가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중 가장 처음으로 접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만의 방’이다. 번역의 문제인지 내 이해력의 한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내내 문장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만 파운드가 필요하다고, 그렇지 않더라도 글을 쓰고자 하는 용기를 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이 작품은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아갔을 당시의 여성 인권을 고려했을 때, 그가 느꼈을 좌절과 번민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진 것은 물론이다.


생각해 보면 온전히 자기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본인만의 생각에 몰입하기 위해서라도 개인 공간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혼자만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내면의 생각에 집중함으로써 수행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비단 글쓰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다 못해 극세사 이불 밑에 숨어 우울을 곱씹는 한이 있더라도 남이 아닌 오로지 본인 자아의 욕구와 의식에 기반한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이를 지켜내고자 한다면 자기만의 방이란 개념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직 울프의 소설을 많이 접한 것은 아니지만 위에 서술한 ‘자아’라는 개념을 기준으로 두고 생각했을 때,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자아를 지니고 유지하는 행위에 기반했을 때 연관 지을 수 있는 또 다른 작품이 다름 아닌 ‘댈러웨이 부인’이 아닐까 싶다. 솔직히 ‘댈러웨이 부인’ 역시 ‘자기만의 방’ 못지않게 이해가 쉽지 않았지만, 작품 내내 ‘혼란’이라는 감각만큼은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댈러웨이 부인의 파티는 모두를 즐겁게 해 주고, 이를 통해 그 역시 기뻐하는 듯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진정한 만족을 얻지는 못한다. 거리낄 것 없이 자유롭고 젊던 클라리사는 이제 남편의 성을 따른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댈러웨이 부인의 내면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좀 더 쉽고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이 사실이다.



•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그때의 나는 어디로 갔나


평화로운 아침, 댈러웨이 부인은 오늘 있을 자신의 파티 준비를 위해 거리로 나서고, 우연히 옛 친구 휴와 마주친다. 휴와의 만남 덕분에 댈러웨이 부인은 한때 자신을 설레게 했던 피터의 존재를 떠올리고, 그의 기억은 열정 넘치는 친구들과 함께 마냥 즐겁고 자유분방하던 30년 전의 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추억을 곱씹고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짐에 따라 댈러웨이 부인은 현재의 자신에 대해 회의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모험적인 피터 월시 대신 안정적인 리처드 댈러웨이를 선택한 지금, 남편과 딸의 뒷바라지를 하고 화려한 파티로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끼기 시작한다.


파티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댈러웨이 부인


영화 ‘댈러웨이 부인’은 소설 못지않은 섬세한 묘사와 여운을 안겨주는 대사, 그리고 마치 움직이는 명화를 보는 듯한 연출을 자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단연 작품의 제목을 차지한 댈러웨이 부인일 것이다. 그는 어떤 식으로 보아도 거친 면이라고는 없고, 본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절제하는 다. 이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영화의 분위기와 끊임없이 혼란을 느끼는 그의 내면이 극적으로 대비되어 마치 소리 없는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그는 더 이상 무엇이든 꿈꿀 수 있던 순진한 청년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로서 불리고 있으며, 뽐낼만한 업적과 평판이라고는 파티의 안주인 노릇뿐이다.


젊은 시절의 클라리사


주인공이 댈러웨이 부인 외에 관심을 둘만한 또 다른 캐릭터는 전쟁 후유증으로 인해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셉티머스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전쟁 중 포탄을 맞아 죽은 친구를 목격했을 때 자신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이처럼 인간성을 잃은 듯한 스스로의 무감각함을 경멸한다. 셉티머스의 아내는 어떻게든 남편을 치료해 보고자 하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본인보다 더 큰 무감각함을 목격하고 만다. 셉티머스가 자신의 비인간성을 증오한 것은 역설적으로는 그가 죄책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인간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셉티머스가 전쟁이 마치 남의 일인 듯 지내는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의 상실감은 결코 작지 않았으리라. 결국 그는 이러한 세상의 무감각함과 비인간성으로부터 탈출한다.


전쟁 후 후유증에 시달리는 셉티머스


댈러웨이 부인과 셉티머스 두 사람 모두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 본인의 내적 고뇌와 번민을 투영한 인물들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시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고 이에 만족해야 했던 여성의 위치와, 한 개인으로서 극복해 내기에는 너무나 큰 현실의 벽으로 인한 좌절감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영화 ‘댈러웨이 부인’에선 아름답고 잔잔한 연출 덕분에 역설적으로 두 인물의 치열한 내면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인생의 필요조건



셉티머스 역시 원작에서나 소설에서나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인 댈러웨이 부인의 생각과 감정의 흐름에 좀 더 눈길이 갔다. 두 캐릭터 모두 울프의 내면을 반영한 캐릭터라고 생각하지만 셉티머스에게는 전쟁이라는 특수성이 있다면, 댈러웨이 부인에게는 현재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기 때문이다. 댈러웨이 부인이 느끼는 뒤늦은 혼란과 공허함의 근간은 단단하지 못한 자아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생에서 무언가를 강렬하게 바랐다거나, 어떻게든 지켜내려 했다거나, 크게 고집을 부린 일이 없다. 도전을 하기보단 언제나 주어진 선택지 중에 가장 안전한 쪽을 택했으며, 남들의 의견과 시선에 생각과 기준이 좌지우지되었다. 이를 정리하자면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복합적이고, 이는 잘 써지고 잘 만들어진 소설과 영화의 등장인물은 예외가 아니기에 댈러웨이 부인에게서도 긍정적으로 읽힐만한 요소는 많으며 그가 살아가는 시대를 고려하면 이해 가는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주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고, 그가 지닌 이러한 면은 꼭 이전 시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도 아니다.


댈러웨이 부인과 남편 (왼쪽) / 클라리사와 피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도 나름의 규칙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바탕으로 일종의 사회성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인간이 상대적으로 더 세심하고 복잡한 사회성을 지녔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처럼 고도의 사회성이 발달된 인간이라는 종은 본인들의 역사 동안 지속적이고 빠르게 쌓고, 비교적 더디게 수정해 온 체계와 문화를 마냥 무시하고 살 수 없다. 한 개인이 불만을 느끼더라도 다수가 예전부터 내려온 전통이라느니, 좋게 넘어가라느니 하는 말로 압박해 오면 마다하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20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호기롭던 나는 그런 건 전통이 아닌 인습이라며 어른들에게 따지고 들었지만 어느 순간 산통을 깰만한 소리를 던질 기력조차 없어졌다. 이것이 나이가 든 탓인지, 반복되는 상황에 지친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본인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형성된 거대한 사회 구조와, 이에 기반해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들을 강요받아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A인데 나의 성별, 인종, 출신지, 그 외 내가 어쩔 수 없는 조건들 때문에 B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입받는 상황은 일종의 인지부조화를 불러일으킨다. 나 같은 경우 어린 나이의 패기만 믿고 생각 그대로를 내뱉었다가 온갖 핀잔에 시달려야 했고, 이후 남들 다 불만 없이 사는데 내 성격이 이상한가, 알고 보니 내 인생 자체가 ‘트루먼 쇼’는 아닌가 회의감을 느낀 끝에 우울증겪었다. 그러다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늘고, 멘털이 좀 더 단단해진 덕에 최소한 겉으로만 말을 잘 듣는 척 실제로는 내 고집에 충실한 생활을 하게 됐다.


비록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심적으로 너덜너덜해지다 끝내는 건조 해졌지만 최소한 나 자신은, 그리고 나의 자아는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아무런 저항 없이 혹은, 나름의 고군분투 끝에 결국 세상의 틀과 기준에 스스로를 맞추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전자와 같이 의문과 주관이 없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좋아하든 말든 그들의 인생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이들처럼 그저 정해진 규칙대로만 살아가는 이들로 인해 남들에게도 ‘원래 그렇게 사는’ 삶을 강요하고,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가 견고 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반면 후자의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자신의 분명한 가치와 기준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각은 고독과 좌절을 안겨준다. 이러한 감정과 생각에 매몰되지 않으려다 보면 세상에 나를 끼워 맞추고자 하는 유혹이 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처럼 나 아닌 다른 무언가를 기준으로 나 스스로를 바꾸려는 순간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밖에 없으며, 여기서부터 한 개인으로서의 비극이 시작된다.


사회의 기준과 다수의 생각에 나를 맞춘다는 건 연인이나 친구 사이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배려나, 무난한 사회생활을 위한 적당한 연기 같은 것들을 뜻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본인의 주관을 억누르고, 정신승리를 해야만 하는 과정들을 의미한다. 주어진 선택지에 만족하고 정해진 방식에 기꺼이 따르는 최소한의 주체성과 존재감 없는 자아를 지닌 편이 차라리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더 유리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거대한 자의식으로 유아독존의 삶을 사는 것이 이상적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단단한 주체성과 안정적인 자아는 한 개인이 본인답게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나아가야만 하는 이 길의 끝에서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말이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41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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