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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Feb 04. 2022

[유니콘 스토어] 꿈을 졸업하다

그래도 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기






나의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던가.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글보다 그림에 훨씬 더 흥미가 많았다. 미대 입시도 꿈꾸어 미술 학원도 다녔고, 가족들 역시 나의 진로에 대해 나름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돌연 학원을 그만두고 그림은 취미로만 즐기겠다고 선언했다. 부모님은 이러한 나의 의사를 존중해 주셨는데, 아마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장래희망 같은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다고 여기신 듯하다. 하지만 우습게도 고등학교에 올라간 이후에 나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이야기를 꺼냈고, 다행히 실기 없이 의상을 전공할 수 있는 대학교들을 찾아 지원했다. 성적에 맞춰 간다면 학교 간판이 달라질 수 있었기에 담임 선생님이 설득을 시도했으나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비록 이제는 패션의 f와도 관련 없는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났기에 다행히 후회는 없다.


어렸을 적 (직업적) 꿈에 대해 변덕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는 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결코 변하지 않은 것들도 존재한다. 순진하기만 하던 초등학생 시절이나 머릿속이 탁해질 대로 탁해진 지금이나 나는 언제나 상상력을 활용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추측하건대 내가 어렸을 적 미술에 먼저 흥미를 보였던 것은 이모와 고모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다. 두 분 모두 그림에 재능이 있었고, 심지어 이모는 미술 전공자였으며 한동안은 같이 살기도 했다. 고모는 주말마다 나를 여러 근사한 전시회에 데리고 가주셨다. 혹은 그때는 그저 색연필과 크래용을 잡고 끄적이는 쪽이 좋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딴에는 부푼 꿈을 가지고 입학한 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을 우선시해야 하는 업계 특성에 어느 순간 질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의 재능 역시 이런 경향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훌륭하지 않았다. 그 결과 언제나 책을 좋아하던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에 취미가 생기더니 그때부터 새로운 방식으로 나의 상상력을 펼치고 싶어졌다. 그리고 여전히 이 꿈을 붙든 채 고군분투 중이다.



어설픈, 불안한, 웅크린


꿈 많은 미술 전공생 키트는 교수들의 혹평을 받고 낙담해 미대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이것만도 서러운데 키트의 부모님은 그를 옛 친구와 은근히 비교하고, 앞으로의 마땅한 계획도 없는 딸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긴다. 이러한 한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키트는 충동적으로 한 회사의 임시직에 지원하고 덜컥 취업에 성공한다. 마침내 출근을 한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누군가의 복사를 도와주는 단순 노동. 사회 경험이 전무한 탓인지, 순진하기 때문인지 상사의 성희롱도 구분 못한 채 흘려들으며 첫 회사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키트는 ‘The Store’라는 곳으로부터 의문의 초대장 하나를 받게 된다.


교수들의 혹평에 망연자실한 키트
가게에 방문한 키트


키트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가게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만난 ‘판매원’에게서 이 가게는 손님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판매한다는 말을 듣는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마침 한 가지가 있다. 다름 아닌 유니콘. 그런 키트에게 판매원은 유니콘을 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알려준다. 첫째로 유니콘이 지낼 장소가 필요하고, 두 번째로 유니콘이 먹을 건초가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유니콘이 잘 살 수 있도록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그는 결국 유니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해나간다. 이러한 준비 과정에서 키트는 유니콘의 집을 짓기 위해 들른 철물점의 직원 버질과 가까워지고, 와중에 얼떨결에 맡게 된 청소기 홍보 프레젠테이션까지 준비한다.


가게의 판매원과 키트


앞으로 모든 것이 잘 풀릴 것만 같은 바로 이 순간부터 키트는 다시 미끄러진다. 한껏 의욕을 품은 채 자기 식대로 준비한 프레젠테이션에는 싸늘한 반응만이 돌아오고, 유니콘을 맞이할 준비하는 과정에서 버질과 갈등하는 것은 물론 부모님까지 걱정시키고 만다. 유니콘을 만나기 위한 준비 자체도 만만치 않다. 미대에서 쫓겨난 후 새롭게 품은 희망의 불씨가 다시 꺼지려는 위기 상황에서 그는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또 한 번 애를 써본다.



그래도 내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프란시스 하’가 현실적인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면, ‘유니콘 스토어’는 동화 같은 이야기로 어른들의 마음을 보듬는다. 미대를 뛰쳐나와 방황하기 시작하는 키트의 모습은 아마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그림일 것이다. 나 역시도 다정하지만 본의 아니게 눈칫밥을 주는 부모님과 갈등하고 단전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짜증과 자기혐오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키트의 모습이 마지막 회사를 박차고 나왔던 나의 상황과 겹쳐 보였다. 그러나 ‘유니콘 스토어’는 지켜보는 이들의 감정을 마냥 바닥으로 끌어내리지는 않는다. 일단 부모님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말에 감정이 상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기 고집을 밀고 나가는 키트의 뚝심 있는 성격이 한몫한다. 게다가 없는 게 없는, 심지어 유니콘까지도 파는 가게의 존재 역시 영화의 분위기가 처지지 않도록 끌어올려 준다. 하루 종일 이리저리 치이고 우울을 씹던 키트가 가게에 들어섰다 하면 마치 그와 함께 꿈을 꾸는 기분마저 든다.


하지만 키트는 결국 임시직으로 일하던 회사에서도 해고당하고, 결국에는 가게에서도 떠나게 된다. 이는 어릴 적 가슴에 품고 있던 순수하기만 하던 꿈에서 졸업하는 동시에, 바깥세상에 억지로 자신을 맞추려던 노력 또한 그만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꿈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에게 제일 잘 맞는 타협점을 발견해 나가는, 즉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 오른 것이다.


키트와 그의 어머니


‘가장 어른스러운 일은 네가 아끼는 일에서 실패하는 거야.’


영화 ‘유니콘 스토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단연 위와 같은 키트의 엄마가 딸에게 건네는 말일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한때 품었던 꿈이라는 것이 진정한 꿈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욕심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건 그때의 나는 패션 디자이너로서 승승장구해서 지금 내 나이쯤에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누구나 본인의 인생의 주인공이기에 아무리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없다고 한들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가장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일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고, 나의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어쨌든 잘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와 같은 낙관은 아직 잃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상당 부분이 변했다. 꽤 절대적인 나 스스로와 미래에 대한 믿음 덕분에 다시 한번 꿈을 재정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인정하기 싫은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바로 나의 꿈이 반드시 나의 것이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잔인한 현실을.


'유니콘 스토어'의 한 장면


아직 어디 가서 주름잡을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살, 한 살 더 먹어가면서 나에게만은 만만할 줄 알았던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지 여실히 깨달아가는 중이다. 그나마 다행히 하루하루 흐를수록 더욱 가혹해지는 현실만큼 나 역시 늘어가는 나이와 덕에 점점 둔감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현실 앞에 마침내 어른이 되고 말았다. 앞으로 내가 몇 번을 더 넘어질 것인지 알 수 없다. 결국에는 내가 간절히 바라던 것을 손에 넣지 못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은 반드시 찾아오기에 좀 더 단단해진 마음에 기대어 제자리에 멈추고 싶지는 않다. 분명 나의 것이 아닌 꿈도 존재하겠지만 꿈 그 자체를 잃어버리지는 않기를 그 무엇보다 간절히 바란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8033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2338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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