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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un 24. 2022

[바바둑] 모성애라는 이름의 족쇄

찬양과 경멸 사이 그 어딘가의 존재, 엄마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다. 20대 초반까지는 이 문구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어쩌면 어느 정도는 이 말에 동의했던 것도 같다. 어쨌든 중학생이 된 이후부터 여성인 내가 남동생보다 물리적 힘이 강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오로지 자식을 구하기 위한 일념으로 초인적인 힘 비슷한 것을 발휘한 어머니들에 관한 기사를 종종 봤으니까. 그러나 당시 얼마간 공감했던 이 표현은 지금에 와서 보니, 처음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사람을 비웃어 주고 싶게 만든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그 말에서 발화자의 바람이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평균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신체적인 힘이 부족해졌다. 그 원인을 되짚어 보자면 남성들이 여성들로 하여금 육체적인 활동을 비롯해 온갖 기회를 박탁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약 1100년 전 바이킹 전사의 유골 DNA를 확인해 보니 여성이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워낙 성별 고정관념이 강해진 탓에 그동안은 남성으로 간주되었다가 뒤늦게 여성임이 확인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당연하게 배웠던 선사시대 여성은 채집을, 남성은 수렵을 맡았다는 가설 역시 뒤집혔다.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남성에 비해 떨어지는 여성의 신체 능력은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사회문화적으로 개량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사회는 (혹은 남성은) 여성을 약한 존재로 만들고, 그 믿음을 견고히 하는 데 그리 애를 썼던 것일까. 아마 여성을 남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위치에 두고, 이와 더불어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지켜 줄 남성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신화를 심어주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래야만 여성이 독립적인 존재로 남는 대신 남성과 함께 가정을 꾸리는, 동물로 치면 짝짓기에 해당하는 행위를 할 테니까. 오랜 시간 여성들이 경제적 능력을 키울 기회를 박탈당하고, 현재는 견고한 유리 천장이 존재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이리라. 그래서 결국 실제 여성들이 나약한지 여부와 관계없이, 그리고 여성 개인의 특성과 무관하게 여성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연약한 존재라는 딱지가 붙었다. 그런데 왜 어머니는 강하다는 예외 사항이 뒤따르는 것일까. 결국 앞선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다. 남성의 씨를 받아 아이를 낳고 어떻게든 지켜내는 일, 자신의 자아와 주체성, 심지어는 목숨까지 포기하고 그 일을 해내는 일, 그것이야말로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바라는 궁극적인 역할이기 때문이다.



엄마, 미치 


출산이 임박한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병원까지 차로 이동하던 아멜레아는 그만 사고가 나는 바람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불의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들 사무엘은 무사히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행동장애를 지니고 있다. 남편도 없이 홀로 장애를 지닌 아들을 키우기 위해 아멜리아는 좋아하던 글쓰기도 관두고, 요양원에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 나간다. 게다가 불면증까지 앓고 있어 더욱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던 와중에 아들 사무엘이 학교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학교 측은 사무엘을 전담할 특별 감시 요원을 고용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이에 모욕을 느낀 아멜리아는 자신의 아들을 존중해줄 다른 학교를 알아보겠다며 사무엘을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멜리아


그러던 어느 날 사무엘은 아빠의 유품을 보관한 지하 창고에서 ‘바바둑’이라는 책 한 권을 가지고 와 아멜리아에게 읽어 달라고 조른다. ‘한 번이라도 입에 담거나 보게 된다면, 넌 절대 바바둑을 벗어날 수 없어’ 읽으면 읽을수록 공포스러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내용으로 인해 사무엘은 결국 겁에 질리고, 아멜리아는 그 책을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치워 버린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수프에서는 유리 조각이 나오고, 남편과 같이 찍은 사진에 불쾌한 낙서가 되어 있는 등 이상한 일들이 하나 둘 발생한다. 사무엘까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하자 아멜리아는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혀 바바둑 책을 다시 찾아내 갈기갈기 찢어 버린다.


불길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집, 그리고 서서히 광기에 사로잡히는 아멜리아


이후 아멜리아의 동생 클레어의 딸 루비의 생일 파티에 간 두 사람. 여전히 공포에 질린 채 바바둑을 언급하던 사무엘은 급기야 사촌 루비까지 다치게 만들고, 완전히 지쳐버린 아멜리아는 사무엘에게 먹일 진정제까지 처방받기에 이른다. 진정제 덕에 사무엘이 일찍 잠들고, 아멜리아도 모처럼 개운하게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 본 그는 자신이 찢어서 버렸던 바바둑 책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놀라서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온 책 속에는 바바둑에 사로잡혀 반려견과 사무엘을 죽이고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담겨 있다. 결국 책을 태워 없애지만 의문의 전화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그는 서서히 책 속에 묘사된 광기 어린 모습처럼 변해간다.



모성은 불완전하


영화 ‘바바둑’의 마지막 장면은 어머니와 아이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사무엘의 생일날 애정이 넘치는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아멜리아. 이 둘 사이에는 그 어떤 비극이나 미움도 끼어들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완전한 해피 엔딩이 아니다. 바바둑에 완전히 사로잡혀 미쳐가던 아멜리아는 결국 반려견을 죽이고 사무엘까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다행히 다시 이성을 찾았다. 그러나 아멜리아의 몸에서 쫓겨난 바바둑은 지하실로 숨어들었고, 이후에도 아멜리아는 주기적으로 바바둑이 먹을 것을 챙겨 준다. 지하실에 남아 있는 바바둑, 이는 무엇을 뜻할까. 아니, 그전에 바바둑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어머니로서의 여성이 억누르도록 강제당한 분노와 욕구일 것이다. 표출하지 못한 이러한 감정들은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어르고 달래고 잠재울 뿐이다. 여전히 아멜리아의 집 지하실에 머물고 있는 바바둑처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아멜리아와 사무엘


미/비혼 여성들은 결혼해서 정상 가족을 꾸리길 강요하는 분위기를 견디고, 여러 관계 속에서 비슷한 위치에 있는 남성보다 더 많은 돌봄 노동을 요구받지만, 그래도 타인보다 자신을 더 우선시할 여지는 존재한다. 그러나 여성 개인에서 어머니로서 위치가 변하는 순간 이는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주말에 엄마가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아이 밥도 제대로 안 차려주는 무책임한 엄머라는 힐난이 날아와도 이상할 게 없다. 반대로 아빠가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면 평일에 힘들게 일하고 주말에 아이의 끼니까지 챙겨주는 다정한 아빠라는 칭찬을 듣게 될 확률이 더 높으리라. 엄마는 뭐하길래 아빠 혼자 애쓰냐며 엉뚱한 데 불똥이 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맘충’이라는 단어의 존재가 이 세상이 엄마라는 존재에 얼마나 가혹한지 충분히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아빠는 아이의 식사를 챙기지 않고, 학교 준비물을 모르고, 집에 늦게 들어오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와 충분히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남들이 나서서 이래서 아빠한테 애를 맡기면 안 된다며, 깎아내리는 척 실은 편의를 못 봐주어 급급하다. 아빠가 비난을 들을 때는 폭력을 휘두르는 등 극단적인 상황뿐이다.


물론 아버지의 고충을 외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어머니보다 못할 것이 없겠지만, 양육자로서의 부담은 분명 어머니 쪽이 훨씬 더 크다. 대신 아버지가 홀로 가족을 부양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필연적인 부작용이다. 먼 과거에는 여성들에게 교육과 임금 노동의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고, 현대에 와서는 고용과 승진에서의 차별로 어떻게든 여성들을 가정으로 몰아내려 애썼으니 더 많은 경제력을 차지한 남성 쪽이 더 큰 책임과 부담을 지는 것은 불가피하다. 게다가 여성은 아이가 생긴 이후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여성은 가정과 아이에게 묶이게 된다. 아이가 주는 기쁨을 부정하려는 것 또한 아니다. 비록 나는 어머니가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확률 또한 높지 않지만 나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키워낸다는 것은 분명 경이로운 일이라 생각한다. 내 아이가 생긴 상황을 그려보았을 때 왠지 모르게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어쩌면 내 목숨보다 아이가 더 소중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평생 나부터 신경 쓰고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던 내가, 나의 필요와 욕구를 뒤로 한 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우선시하고 그것이 당연히 여겨질 상황을 떠올리자 이내 가슴이 답답해졌다.


약 3년 전쯤, 내가 아직 회사원이던 시절 외근을 갔다가 보았던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느 지하철 역, 아마 아기 엄마인 듯한 여성이 유아차 손잡이를 붙들고 멍하니 서 있었고, 유아차 속 아기는 목이 터져라 울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으나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나 비극적으로 비쳤다. 서럽게 울고 있는 아기가 안쓰러운 건 말할 것도 없고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한 장면과 겹쳐 보이기까지 한, 초점 없는 아기 엄마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무서웠다. 당시 옆에 있던 친절한 성격을 자랑하던 나의 사수는 곧장 같은 여성인 아기 엄마의 행동을 비난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는 나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위치란 이러한 것이다. 순간의 실수도, 잠시 지쳐있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어미 동물들 역시 새끼를 정성스레 돌보지만 본인의 신변이 위태로워지는 순간 기꺼이 소중한 새끼를 버린다. 이것이 생명체의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살기로 선택했으니, 아이를 탄생시킨 순간부터 아이 또한 인간답게 살도록 모든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그럴싸하지만 족쇄나 다름없는 말로 옭아매고 모든 책임을 전가한 채, 그들 역시 어머니이기 전에 자아를 지닌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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