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인 Aug 05. 2022

[메이의 새빨간 비밀] 엄마를 이해하기까지

그리고 성장통






어쩜 이렇게나 다를까. 나와 엄마에 대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하게 든 생각이다.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 할지라도 개별적인 두 존재가 다른 면을 지닌 것은 당연지사일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아빠나 남동생에게는 이렇게까지 느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엄마와 나는 겉으로 느껴지는 기질부터가 정반대다. 방에서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길 선호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취미로 피아노를 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즐긴다. (이제는 기력이 딸려 자제하지만) 나는 산통을 깨더라도 입바른 소리를 안 하고는 못 넘어가는 반면, 엄마는 아무리 상대 때문에 기분이 상해도 가능하면 좋게 넘어가는 편이다. 단순히 좋게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화려한 언변으로 공격성은 전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례하게 군 상대 쪽에서 먼저 멋쩍고 미안해지게 만드는 우아한 기술까지 있어,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속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일종의 페르소나를 장착해야만 탈 없이 사회생활이 가능한 나와 달리 엄마는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 그야말로 타고났다.


엄마와 나의 다른 점에 대해서 열거하자면 끝도 없지만, 공통점을 찾자면 부지런한 편이라는 것 정도를 간신히 꼽는 수준이다. 질풍노도보다는 칙칙하고 건조한 쪽에 가까웠던 나의 사춘기 시절, 엄마와 내가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딸로서 나는 당연히 아빠보다는 같은 여자인 엄마 쪽에 나를 더 투영하곤 했다. 그러나 아빠나 남동생보다 생물학적 공통점이 훨씬 더 많은 엄마가 오히려 공감하기 어려웠고, 같은 맥락으로 엄마는 왜 아빠보다도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할까 고민했다. 서운함과 오해는 그렇게 에누리 없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더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한때 나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가감 없이 솔직하게 대해야 된다고 믿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내 믿음과 태도는 엄마와 나 사이에 더 큰 갈등을 일으켰다. 지금 와 돌이켜 보면 너무 어리고 순진했기에 가능했던 생각인 듯싶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마침내 내가 이만큼 성장하기까지 그 누구보다, 심지어는 나 자신보다도 엄마가 더 큰 인내심을 발휘했으리라는 것을.



Growing up is a beast


성적도 우수하고, 악기 연주도 열심히 하며, 선생님들마저 부담스러워할 정도로 학교 생활에 열정적인 메이. 메이는 그런 자신이 진취적이고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그의 삶의 중심에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획하는 엄마 밍이 있다. 메이는 때마다 엄마를 도와 사원 일을 돕고, 엄마를 실망시키지 않고 자랑스러운 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메이는 언제나처럼 열심히 공부를 하던 중 동네 편의점의 훈훈한 아르바이트생 데번을 떠올린다. 처음에 메이는 그저 공책 구석에 조그맣게 데번의 얼굴을 그려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한창 사춘기에 접어든 메이는 어느 순간 자신과 데번이 등장하는 남에게, 특히나 엄마 밍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있는 응큼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하필 밍이 그 그림들을 발견하고, 그는 데번이 순진한 자신의 딸을 꼬드겼다고 오해해 곧장 메이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찾아간다. 엄마 덕분에 손님으로 가득한 편의점에서 공개 망신을 당한 메이는 그날 밤 기묘한 꿈을 꾼다.


주인공 메이
메이의 엄마 밍과 아빠 진


그리고 다음 날.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일어난 메이는 화장실 거울 속에서 낯선 존재를 발견한다. 화장실을 가득 채우는 커다란 덩치, 쫑긋한 귀, 둥글고 기다란 꼬리, 그리고 전신을 덮는 다홍빛 털까지. 밤새 메이는 거대하고 붉은 래서 판다로 변해 있었다. 패닉에 빠진 채 방으로 돌아온 메이는 일단 차분하게 상황을 판단하려 애쓰고, 그가 긴장을 푼 순간 뾰족한 두 귀가 사라진다. 메이는 곧 자신이 감정적으로 격해졌을 때만 래서 판다로 변신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정상적인 학교 생활을 위해 마인드 컨트롤하려 애쓴다. 한편 딸에게 무언가 변화가 일어났음을 깨달은 밍은 메이가 걱정되는 마음에 학교로 찾아가고, 딸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학교 관리인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목격하고 창피함을 느낀 메이는 결국 참지 못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또다시 거대한 래서 판다로 변신해 버린다.


래서판다로 처음 변신한 메이
분노 폭발 메이


알고 보니 메이가 래서 팬다로 변하게 된 것은 모계 유전, 정확히는 가족들이 사원에서 모시는 조상님 '선 이'의 탓이다. 먼 과거 남자들이 전쟁으로 나갔던 시기 선 이는 붉은 달이 뜨던 날 밤 자신의 딸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빌었고, 결국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 자신의 감정을 이용해 래서 판다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됐다. 이후 그 능력은 딸에서 딸로 대물림되었고 마침내 메이의 차례가 온 것이다. 하지만 붉은 달이 다시 뜨는 밤 봉인식을 치르면 래서 판다의 힘을 봉인할 수 있다는 엄마의 설명을 듣고 메이는 어쩔 수 없이 다음 달까지 참고 기다리기로 한다. 그러던 와중에 메이와 친구들은 사랑해 마지않는 보이그룹 포타운이 다음 달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콘서트를 연다는 소식이 듣게 된다. 간절히 콘서트에 가고 싶지만 표를 살 돈이 없던 메이와 친구들은 엄마 밍 몰래 래서 판다의 귀여움을 이용해 돈을 벌기로 한다. 그렇게 포타운의 콘서트와 메이의 봉인식 날짜가 점점 다가온다.


메이와 친구들



아직도 알아가는 중


메이의 엄마로 나오는 밍을 보면서 생각했다. 오, 내 엄마랑 제법 닮았는데? 웃긴 것은 그 생각이 들기 전에 먼저 주인공 메이의 모습을 보면서 안경을 끼고 장난기 많아 보이던 내 어린 시절과 비슷하다고 느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메이처럼 학교 생활에 적극적이지도, 성적이 우수하지도 않았으며, 성격이 활발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춘기 전까지 잠시나마 엄마에게 순종했던 메이와 달리 나는 고분고분 알겠다고 넘어간 적이 거의 전무하다. 변명을 해보자면 이는 엄마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나 같은 딸을 키우느라 엄마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고됐을까 싶어 유감스럽다. 엄마로선 그나마 다행히도 나는 타고나길 내향인에 내성적이었기에, 입 밖으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는 몰라도 몸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걱정만은 끼치지 않았다.


영화 ‘메이의 새빨간 비밀’의 영문 포스터의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Growing up is a beast'. 구글 번역기에 돌리면 ‘성장은 짐승이다’라는 결괏값이 나온다. 영화가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고, 내 경험을 반추해 보아도 틀린 말은 아니다. 메이는 하필 격변의 사춘기에 래서 판다로 변신했다. 비록 메이는 실제로 래서 판다로 변할 수 있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감정을 사용해 래서 팬다로 변신하는 능력은 상징이자 은유이다. 사춘기에는 전에 없이 감정의 폭이 커지고, 종잡을 수도 없는 시기이다. 덕분에 메이는 시도 때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래서 판다로 변신하려는 자신의 몸을 통제하느라 애를 먹는다. 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친구와의 갈등을 경험했고, 머릿속은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음흉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휘몰아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이는 무조건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던 엄마에게 반항하기 시작한다. 즉 포스터의 문구를 반대로 뒤집에 설명하자면 메이에게 있어서 래서 판다라는 짐승은 바로 성장 그 자체인 것이다.


래서판다로 변신한 메이와 친구들


하지만 여타 성장물과 ‘메이의 새빨간 비밀’ 사이에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물론 덩치에 맞지 않게 깨물어주고 싶은 래서 판다의 비주얼도 중요한 이점 중 하나이지만, 그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메이가 자신의 성장을 통해 엄마가 겪었을 성장통 역시 이해했다는 점이다. 엄마를 위해 자랑스럽고 완벽한 딸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메이는 엄마 밍 역시 할머니를 만족시키기 위해 똑같이 애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제법 흔한, 본인도 하기 싫었던 걸 강요하는 엄마와 그로 인해 원망을 느끼는 딸 사이의 갈등이 해소된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와 엄마 사이는 어디쯤에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비록 내가 털북숭이 동물로 변신한 적은 없지만 나의 성장기 역시 메이의 그것 못지않게 나름대로 격렬했다. 그리고 머리가 커가는 나를 보는 내 엄마의 심정 또한 밍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이가 들게 되면 겪게 되는 당연한 수순인지 아니면 노력의 결과인지 언젠가부터 엄마가 어느 정도 이해되기 시작했다. 평생을 나와 다른 걸 보고 겪고 배웠을 엄마를 이제 나의 시선이 아닌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반쯤 우스갯소리이지만 엄마에게 재미로 해보라고 부추긴 mbti 테스트 덕에 엄마와 내가 단순히 세대 차이만 나는 것이 아니라 사고체계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가족들 중 엄마를 가장 사랑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나와 다르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싶기도 하다. 아마 나 또한 엄마가 된다면 나의 엄마를 좀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나리오는 별로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의 앞날이 어떻게 전개되든 부디 엄마와의 미래가 과거나 현재보다 좀 더 평화롭고 유쾌하기를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사진 출처 : IMDB

https://m.imdb.com/title/tt8097030/

작가의 이전글 [노매드랜드] 고정되지 않은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