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인 Jul 22. 2022

[노매드랜드] 고정되지 않은 삶

그럼에도 계속해서 살아가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의식주(衣食住) 중에서 옷을 뜻하는 의(衣)와 집을 뜻하는 주(住)가 아닐까 싶다. 그 종류는 제각각 다르지만 음식은 생명 유지를 위해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이지만 옷과 집은 조금 다르다. 인간은 씻거나 성관계를 하는 등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항상 옷을, 최소한 속옷이라도 걸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에게 심어진 수치심 때문이다. 집은 어떠한가. 인간 외 종들도 집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번식을 위한 장소로서 잠시 사용되거나, 새끼가 일정 기간 성장할 때까지만 유효한 공간으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비교적 쉽게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집은 좀 더 복합적인 개념을 지녔다. 이곳에서 먹고 자고 비우는, 생명체로서의 기본 활동은 물론 가정을 꾸려 다른 종들의 번식에 해당하는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사색에 잠기고 자아를 실현하며, 방이라는 개인 공간에서 남들과는 분리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자기만의 욕구에 충실해질 수 있다.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집이란 단순히 생리와 안전 등의 하위 욕구를 넘어 존경, 사회, 자아실현 등의 상위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필수적인 공간인 것이다.


이러한 집이 없는 삶은 어떠할까. 지금 사는 곳은 슬프게도 완벽한 의미로서 내 집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당장은 큰 고민 없이, 근시일 내에 나갈 확률이 낮은 주거 공간을 확보한 상태이다. 덕분에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에서 마음껏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자기만족에 빠지는 일이 가능하다. 재택 근무자인 주제에 매일 같이 머리를 감는 사치도 누리고 있다. 이처럼 소중한 집에서 내쫓기는 상황은 솔직히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굳이 가정을 해보자면 하루의 대부분을 공중화장실을 찾아다니는 데 허비하고, 밤마다 어디서 자야 할지 걱정하느라 바쁠 듯하다. 간신히 밤을 보낼 곳을 찾아도 편히 잠 들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러한 생활이 싫어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진다고 해도 결국 한계에 부딪히리라.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결론적으로 집이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집을 포기한, 혹은 이별한 이들이 존재한다.



• 평범한’ 삶의 방식에서 밀려나


2008년 미국 금융 붕괴의 여파로 주인공 펀(Fern)이 살던 동네는 완전히 몰락해 버리고, 남편과도 사별하면서 그는 밴 한 대를 집 삼아 여기저기 떠도는 노매드의 생활을 시작한다. 밴을 타고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숙식을 해결하는 펀은 이러한 생활이나마 유지하기 위해 여러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하고 있다. 그러던 중 펀은 일하다 알게 된 린다의 소개로 그들처럼 노매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임 RTR(Rubber Tramp Rendezvous)에 참여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른 노매드들에게서 자급자족하며 생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운다.


주인공 펀


이후로도 펀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시한부 스웽키와는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자유롭게 떠돌며 둘만의 추억들을 쌓고, 국립공원 캠핑장에서 만난 데이브는 함께 자신의 아들의 집으로 가서 지내자고 제안하지만 펀은 이를 사양한다. 하필 밴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펀은 수리 비용을 빌리기 위해 찾아간 여동생을 찾아가고, 그는 이만 정착해서 같이 살자는 동생의 권유마저 거절한다. 얼마 뒤 결국 세상을 떠난 스웽키를 추모하고, 한때 남편과 살던, 이제는 폐허처럼 변해버린 엠파이어 시의 옛 집을 둘러본 이후 펀은 또다시 길을 나선다.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 누가 그들을 비난하는


집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거운 한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비록 당장 거주할 주거 공간은 있지만 완벽한 내 집이 아니기에 안정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마저 박탈당한다면 어떨까. 영화 ‘노매드랜드’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채 감정적인 호소를 배제하고 있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원체 상상력이 풍부하고 영화 속 상황에 스스로를 대입하곤 해서 밴에서 지내며 여기저기 떠도는 나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 보지 않을 수 없던 탓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집이란 단순히 몸을 쉬게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박탈당한 채 기본적인 생리 욕구만 채우기 급급한 상황에 내몰리는 것도 모자라, 자조적으로 '호빗'이라 부르는 나의 왜소한 여성 신체로 밤거리에서 잠이 드는 상황은 그야말로 끔찍하다.


'노매드랜드'의 한 장면


영화의 원작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단순하게도 소설일 줄 알았건만, 알고 보니 저널리스트인 제시카 브루더가 노매드들과 직접 밴 생활을 하고 그들을 인터뷰한 내용들을 기록한 책이었다. 원작의 인터뷰 중 인상적인 내용이 한 가지 있다. 노매드 본인들은 ‘홈리스(homeless)’가 아닌 ‘하우스리스(houseless)’로 불리고 싶다는 것. 온라인 영어사전에 홈리스를 검색하면 가차 없이 노숙자라는 설명이 따른다. 아마 노매드들의 삶의 맥락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럴 생각이 없는 이들에겐 그들의 생활 방식이 노숙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보였던 모양이다. ‘하우스(house)’가 단순한 주거공간으로서의 개념에 가깝다면 ‘홈(home)’은 물리적 장소로서의 의미를 넘어 안정과 안식의 상징과도 같다. 때문에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하다고 할 때 ‘feel at house’가 아닌 ‘feel at home’라고 하는 것이리라. 이러한 정의에 따르자면 노매드들은 그들의 주장대로 주택이 없을 뿐이지 집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다시 밴을 타고 길을 나서는 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단기 일자리만을 전전하는 노매드들의 생활 방식은 언뜻 불안하고 답답해 보일 수 있다. 대부분 중노년인 노매드들의 연령대는 그들이 책임감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닌지 섣부른 의심을 하게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무관심을 등에 업은 비난의 시선을 거두면 결국 모든 것은 개인으로서는 어쩌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특정 시기와 여타 조건이 맞아떨어졌더라면 노매드들의 삶이 우리 자신의 삶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일자리와 생활 터전을 잃고 희망마저 잃을 수 있던 상황에서 그들은 현실적이고도 최선인 선택을 했으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책임을 다하고 있다.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어도 나 역시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은 채 어떻게든 살아갈 용기를 발휘할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지만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기 힘들다. 노매드들이 보여주는 삶의 의지에 겸허해진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43567

작가의 이전글 [썸원 그레이트] 나만의 그 사람, 이미 곁에 있었음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