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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02. 2022

[나이트메어 앨리] 오만의 종착지

자신감과 자만의 경계






누구나 특히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의 없는 사람, 시끄러운 사람, 이기적인 사람, 의존적인 사람, 남 험담하길 좋은 사람 등등. 이런 이들은 누구라도 좋아할 이유가 없을 인간상이지만 그중에서도 본인이 유달리 꺼리는, 심하게는 경멸까지 하게 되는 유형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처음엔 주관이 없는 사람을 떠올렸다. 그러다 이내 더 나은 대답을 찾았다. 바로 오만한 사람. 오만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 검색하면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런 태도나 행동’이라는 설명이 따른다. 이 오만이라는 것도 한 사람의 인간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발현 방식은 어떤지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때문에 단순히 오만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고 해서 나의 경멸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오만과 관련해 내 지인 한 명과 관련한 경험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나는 썩 편하지 않은 사람 앞에서는 말 수가 적어지고 내 솔직한 의견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설명해 봤자 의미가 없을 게 뻔해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편이다. 지금 이야기하려는 지인이 바로 그런 대상이다. 내가 굳이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내 머릿속을 굳이 다 알려줄 필요가 없는 부류. 어떤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지인이 내게 나는 나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일차적으로 나에 대해 함부로 판단한 것이 불쾌했지만 그동안 보아온 그 지인과의 대화 패턴을 고려했을 때 일일이 이유를 들어가며 반박해 보았자 동의나 이해, 하다 못해 인정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한숨을 삼키며 이야기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내 친구들 중 그런 식으로 말한 이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고.


내 말의 의도는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것보다는, 내 주변 가까운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남에 대해 그렇게 쉽게 판단하지 않는다는 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돌려 말했던 탓인지, 아니면 그 지인이 본인의 통찰력을 자랑하던 데 비해 숨은 뜻을 파악할 정도의 예리함은 부족했던 것인지 그는 이내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나의 친구들이 못 보는 것을 본인은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바로 이런 것이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자신만 옳을 것이라는 확신에 차 남들 모두를 자신보다 아래로 보는 것, 본인에게는 조금의 오류도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 여기서 나아가 좀 더 냉정하게 이야기하자면, 과한 자기 확신으로 인해 본인의 위치를 정확히 보지 못하는 것까지.



나는 ‘절대’ 아버지처되지


활활 불타오르는 집. 그 집을 뒤로한 채 한 젊은 남자가 유유히 밖으로 빠져나온다. 그의 이름은 스탠. 도망치듯 아버지와 살던 집을 떠나온 그가 도착한 곳은 한 카니발(carnival)의 서커스 극단으로, 그는 그곳에서 용역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닭의 피를 빨아먹으며 손님을 끌어모으던 기인(geek)이 우리에서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그를 스탠이 제압하면서 서커스 단장 클렘은 스탠에게 극단에 상주하며 일하기를 권한다. 기인들은 어떻게 구하느냐고 묻는 스탠에게 클렘은 알코올 중독자들을 고용해 아편이 든 술을 먹여 극단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극단 생활을 시작하게 된 스탠은 독심술 공연을 하는 지나와 피트 부부를 보조하며 그들에게서 독심술을 틈틈이 배운다. 하지만 피트가 스탠이 잘못 가져다준 메탈 알코올 술을 마시는 바람에 사망을 하면서 보안관의 단속까지 뜨지만, 피트는 그간 배운 독심술을 통해 극단을 위기로부터 구한다. 그 일을 계기로 피트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확신하고, 극단에서 만난 전기쇼 공연자 몰리를 데리고 뉴욕으로 향한다.


단장인 클렘과 함께 탈출한 기인을 찾아나선 스탠 (왼쪽) / 전기쇼 공연자 몰리와 사랑에 빠진 스탠 (오른쪽)


마침내 도착한 뉴욕에서 스탠과 몰리는 호텔의 부유한 손님들을 상대로 공연을 하며 서서히 명성을 떨친다. 항상 독심술 공연만 펼치던 스탠은 우연히 심령술까지 선보이게 되고, 이를 지켜보던 심리학 박사 릴리스가 그에게 접근한다. 스탠은 심적으로 절박한 상황에 있는 릴리스의 상류층 고객들을 대상으로 협업을 제안하고, 그렇게 스탠은 릴리스가 제공하는 고객들의 정보를 통해 그들을 속이면서 점점 더 부를 쌓아간다. 그런 스탠을 보며 몰리는 서서히 불안에 빠져 심령술을 그만두라고 말리지만 더 큰 성공에 눈이 먼 스탠은 사랑하는 연인의 말 따위 듣지 않는다. 오랜만에 만난 극단의 지나 역시 심령술은 관두라고 경고해 보지만 이 또한 먹힐 리 없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리던 스탠은 악명 높은 갑부 그린들을 만나게 된다. 불신으로 가득한 그린들은 스탠과 그의 심령술을 검증하기 위해 테스트까지 벌이지지만, 스탠은 특유의 기지와 독심술, 그리고 릴리스에게서 얻은 정보를 통해 그린들의 신뢰를 얻는다. 그린들이 오래전 죽은 옛 연인인 도리스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스탠은 열심히 그를 속이고, 안달이 난 그린들은 이제 그만 도리스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심리학 박사 릴리스와 스탠 (왼쪽) / 악명 높은 재벌 그린들 (오른쪽)


이제 정말 고지가 코앞이라고 확신한 스탠은 그동안 심령술을 말려온 몰리에게 그린들의 옛 연인 도리스로 분장해 연기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몰리는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다며 예전 극단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스탠의 간절한 설득 끝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돕기로 한다. 한편 릴리스는 스탠에게 그의 재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를 속일 뿐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지만, 이 경고 또한 스탠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침내 몰리와 함께 그린들을 상대로 심령술을 펼치게 된 스탠. 이제 곧 도리스가 나타날 것이라고 설명하던 스탠은 그동안 그린들이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나쁜 짓들을 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곧 도리스로 분장한 몰리가 등장하면서 둘의 대화는 중단된다. 멀리서만 도리스를 지켜보게 하려던 스탠의 계획은 그린들이 흥분하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스탠은 그린들과 그의 경호원 앤더슨까지 살해하기에 이른다. 결국 몰리는 더는 통제가 불가능한 스탠을 도망치듯 떠나 버리고, 스탠은 자신의 돈을 맡아주던 릴리스의 사무실을 찾아가지만 이내 자신이 그에게 그저 이용당했음을 깨닫는다.


스탠에게 경고하는 지나 (왼쪽) /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릴리스 (오른쪽)


하지만 뉘우침은 항상 늦는 법. 이미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른 스탠은 지금껏 쌓은 명성과 부를 버리고 그곳에서 도망치고, 그동안 절대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알코올 중독자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이어가던 스탠은 우연히 한 서커스 극단을 발견하게 되고, 그는 그곳의 단장에게 자신이 독심술에 재능이 있으니 고용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단장은 이제 독심술 같은 건 인기가 없다며 거절한다. 잠시 스탠의 추레한 행색을 살펴보던 단장은 그에게 술을 권하더니 임시로 할만한 일이 한 가지 있다며 그에게 묻는다. 혹시 기인 일이 뭔지 아느냐고. 자신 앞에 닥친 운명에 결국 굴복하고 만 스탠은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힌,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표정을 한 채 대답한다. 그건 타고났죠. (I was born for it.)



• 중요한 한 지, 자기 객관화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결코 그처럼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아버지를 죽도록 방치한 채 새 출발을 시도한 젊은 남자. 그렇게 도착한 서커스 극단에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오래지 않아 이를 사용할 기회를 얻으며 의외로 쉽게 사랑까지 쟁취한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기에는 여전히 너무 젊었다. 그저 마음속 깊이 증오한 자신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살겠다는 다짐과 성공에 대한 열망에 눈이 멀었던, 게다가 이에 제동을 걸 겸손이나 조심성 같은 자질이 결여된 한창때의 젊은 남자가 맞이할 최후라는 건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한국판 포스터에 요란하게 적힌 ‘지난 10년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이라는 문구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다만 오만행 열차 노선의 다른 역들을 모두 지나친, 모든 절차를 밟고 마침내 전부 다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혹은 더 이상의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진 주인공의 심정을 생생하게 표현해낸 브래들리 쿠퍼의 연기력이 뻔한 결말에 비참한 충격을 더해준다.


앞서 언급한 오만이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누군가의 눈에는 스탠이 물질적인 성공에 눈이 멀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모습이 가장 추해 보였을 수 있겠다. 그러나 나는 그가 지닌 경제적 성공에 대한 야심이나 명예욕 자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스탠이 모든 걸 뒤로 한 채 자신만 믿고 따라온 연인을 쉽게 저버리거나, 절박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기꺼이 이용하는 모습이 역시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 눈에 비친 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다름 아닌 오만함이다. 스탠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단 한 치의 의심도, 회의도 품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성공이란 가능성을 넘어 당연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얻어걸린 재주나 다름없는 본인의 독심술과 남들보다 빠른 편인 눈썰미를 과신해 남들이 모두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고 착각했으며, 본인의 능력을 벗어난 일까지 벌였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의 경고 역시 모두 무시했다. 이것이 오만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의 스탠


스탠의 서사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부실한 토대 위 세워진 야망, 그리고 여기에 기름을 부은 오만, 결국 맞이한 파멸. 더 간단히 말하자면 스탠은 본인의 주제를 몰랐다고 하겠다. 자신감과 오만함을 가르는 기준 또한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한다. 본인 스스로에 대해  잘 아느냐 모르느냐. 즉 자기 객관화가 되었느냐 되지 않았느냐의 차이이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은 본인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에 대해서도 잘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비판을 듣거나 심지어는 비난의 말을 들었을 때도 크게 개의치 않으며, 이 중에서 본인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말들을 취사선택할 줄도 안다. 하지만 오만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기보단 본인을 뽐내기 바쁘다. 응당 쳐내야 할 공격의 말뿐만 아니라 애정 섞인 충고나 걱정, 진심 어린 조언들 마저 재고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결국 본인의 의견과 생각만 옳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오만한, 정확히는 본인의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서도 이와 관련해 경계할 부분이 있음을 은연중에 느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나부터 다시 돌아 보록 해야겠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50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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