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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Sep 16. 2022

[피터와 드래곤] 공생에 관하여

우리가 잃어버린 것






어린아이 때를 떠올려 보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싶을 정도로 순수하게 느껴진다. 지금처럼 상대방이 한 말의 의도를 생각하거나 반대로, 나의 의도를 적당히 감추려는 계산 따위 없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이야기하던 그때.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은 엄마와 관련된 것이다. 우리 가족을 포함해 삼촌네 식구들까지 함께 여행을 갔을 때였다. 어쩐 일인지 작은 엄마는 첫날 저녁부터 컨디션이 안 좋았다. 지금 같으면 누가 아프다는 말에 병원 소리부터 하는 나이지만, 당시 나는 진심으로 작은 엄마가 걱정되고 속상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선가 꽃송이를 구해다가 잠든 작은 엄마의 이마에 얹어 놓았다. 재밌게도 그때의 나는 다음 날 아침, 한숨 자고 괜찮아진 작은 엄마가 진심으로 내 덕분에 상태가 좋아진 것이라고 믿었다.


조금 우스운 기억도 있다. 이 기억은 유치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치원 생활을 시작한 초반, 나는 책상 밑에 숨어 있을 정도로 내성적이었다. 그랬던 내가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인지 얼마 뒤부터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밥도 같이 먹기 시작했다. 그날도 친구 서너 명과 함께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그 나이 때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다들 자신의 엄마가 제일 예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마 당시의 나는 이러한 생각이 그 누구보다도 강했던 모양이다. 친구들이 서로서로 자신의 엄마가 더 예쁘고, 이래서 최고라고 열심히 떠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너희들은 그러시겠지.’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런 말을 했는지 의문이다. 아주 오래전 기억임에도 내 말을 들은 친구들의 황당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밖에도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모범적이고 성실한 친구들은 학급 회장 선거에 도전해 보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에 멋도 모르고 지원했던 일도 있다. 우습게도 그때의 나는 나 정도면 똑똑하고 착하고, 여러모로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반에서 친구 하나도 아직 못 사귄 내가 회장에 뽑힐 리 없었다. 무려 0표를 기록한 나는 이후 두 번 다시 학급 회장 선거에 나가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대책 없을 정도로 순진했던 그때로 인해 낯이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왜 지금은 어린아이 때처럼 단순하고 솔직해지지 못하는 건가 싶어서.



• Not an imaginary friend


부모님과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던 어린 피터. 갑자기 사슴이 튀어나와 차를 급하게 돌리는 바람에 피터 가족의 차는 깊은 숲 속에 전복되고 만다. 피터는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결국 홀로 숲 속 길을 나서던 피터는 늑대 무리를 마주쳐 위험에 처하는데, 어디선가 녹색빛의 거대한 용이 나타나 그를 지켜준다. 그 후로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피터는 용에게 엘리엇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용 엘리엇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는 피터


그러던 어느 날 피터는 엘리엇이 잠든 사이 숲을 돌아다니다 사람들이 모여 나무를 베고 공사하는 현장을 발견한다. 그들을 피해 다시 엘리엇에게로 돌아가던 피터는 자신의 또래인 공사장 책임자 잭의 딸 나탈리와 마주친다. 덕분에 나탈리를 찾던 공사장의 어른들이 함께 있던 피터를 발견하게 되고, 현장에 있던 공원 경비 그레이스는 오랜 시간 숲 속 생활을 한 피터가 걱정되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피터는 다시 깨어나자마자 다시 엘리엇을 찾기 위해 병원을 탈출하려다 실패하지만, 이내 다정한 그레이스와 잭, 그리고 나탈리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간다.


그레이스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피터 / 갑자기 사라진 피터를 찾아다니는 엘리엇


한편 공사장의 어른들은 갑자기 쓰러진 나무를 발견한 후 수상함을 느끼고는 그 원인을 찾아 깊은 숲 속으로 향한다. 결국 그들과 마주치고만 엘리엇. 잭의 형 개빈은 엘리엇만 차지하면 부와 유명세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료들과 함께 엘리엇을 잡기 위한 사냥에 나선다. 결국 개빈은 엘리엇을 포획하는 데 성공하지만, 피터와 나탈리는 어른들 몰래 엘리엇을 도와 그를 탈출시킨다. 그리고 그런 엘리엇을 뒤쫓는 개빈과 동료들. 평화로운 솦속의 일상을 깨뜨리고 자신을 공격하는 인간들로 인해 결국 엘리엇은 분노를 폭발시킨다.


엘리엇을 찾아 나선 개빈과 동료들



• 어른의 눈, 아이의 눈


‘피터와 드래곤’의 엘리엇은 피터와는 기꺼이 함께 살아가지만, 다른 인간들은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를 고려했을 때 엘리엇이 적대감을 보이는 인간이란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엘리엇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어른들의 모습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엘리엇의 경계심에는 근거가 충분해 보인다. 스토리를 따라가다 마침내 엔딩에 다다르면 엘리엇이 사실 무리에서 떨어져 길을 잃은 용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홀로 인간 세상에 던져진 신비로운 생명체가 그동안 겪었을 일들이 대충 짐작이 간다. 그런 와중에도 엘리엇은 망설임 없이 피터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를 도와주고 친구가 되어 준다. 물론 이 또한 피터가 순수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만약 내가 피터처럼 숲에서 길을 잃었다면 과연 엘리엇이 나서서 도와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싶다.


어른의 삶은 확실히 어린아이 때보다 복잡하다. 가장 큰 이유는 어른이 되면 자기 스스로의 생존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 대신 밥을 먹여주거나, 따뜻한 옷을 입혀주지 않는다. 쉽게 말해 본인이 직접 벌어먹고 살아야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조금 고단한 정도에서 그칠지 모르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서서히 농도가 짙어지기 시작한 경쟁은 사회인이 된 시점부터 더욱 노골적으로 변한다. 조금 심한 경우 누군가를 밟아야 내가 사는, 혹은 더욱 풍족한 조건을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모두가 같은 돈을 벌 수는 없고, 다 같이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없다. 게다가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하나를 가지면 또 하나를 바라게 되는 법. 적당히 먹고 살 정도가 되어도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 친구나 동료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욕심이 남들보다 덜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개인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면 안 그랬던 사람들도 마음이 퍽퍽해질 수밖에 없다.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고, 감성적인 생각에 빠져들 심적인 여유 또한 부족하다. 이런 어른들에게 있어서 정체 모를 거대한 초록 용은 마냥 낭만적으로만 보이진 않으리라.


피터와 엘리엇


여기까지가 어른들을 위한 변명이었다. 자신과 다른 존재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심까지도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건조한 심장의 어른들이 행하는 ‘착취’에 대해서는 변명할 길이 없다. 영화 속 어른들은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인 숲을 망가뜨린다. 본인들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적은 당연하게도 본인들의 이익과도 어떻게든 연관된다. 그렇게 숲을 훼손한 어른들은 엘리엇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았음에도 사냥에 나선다. 마침내 사냥에 성공했을 때는 엘리엇 또한 자신들처럼 숨 쉬고 감정을 느끼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못했다기보다는 굳이 그런 생각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데 가깝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면 엘리엇을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는 지구와 다른 생명체에 접근하는 인류의 태도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연을 망치고 다른 생명들을 해하는 것이 비단 영화 ‘피터와 드래곤’ 내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우리는 패션이라는 이름으로 동물들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내 우리의 소모품으로 이용한다. 우리의 미각적 만족을 위해 동물을 살해하고 그들의 살점을 취하는 일을 하나의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그나마도 도축 이전의 복지는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어떤 동물을 ‘반려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사정이 좀 낫지만, 그나마도 인형처럼 한창 예쁠 때는 품었다가 질리고 귀찮아지면 버려진다. 외에도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지구의 모든 것이 우리 인류를 위해 준비된 자원인 양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고려 없이 끊임없이 착취하고, 그 소용이 다 하면 고민 없이 버린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을 빌려 표현하자면 계속해서 지구와 다른 생명들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듯하다. 그마저도 착취자 어른들이 아닌, 이제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대가를 치를 확률이 높다는 점이 문제다. 만약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은 시각을 지닐 수 있었다면, 엘리엇과 친구가 된 피터처럼 우리도  그 어떤 편견이나 해하려는 마음 없이 다른 생명들을 소중히 하지 않았을까. 이 또한 결국 어른들을 위한 변명일지 모르겠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01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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