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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an 06. 2023

[이디오크러시] 낯설지 않은 이 느낌

나만 무섭니?






언젠가 남동생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요즘 한국의 문화는 마치 불닭볶음면 같다고. 사실 불닭볶음면을 먹어 본 적은 없다. 소위 말하는 ‘맵찔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맛을 예측하기란 크게 어렵지 않다. 맵찔이로서는 피할 수밖에 없는 ‘자극적으로 매운맛’으로 정의하면 적당할 것 같다. 그렇게 매운 음식을 먹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다시 요즘의 한국 문화로 돌아와 보자. 여기서 말하는 문화란 단순히 대중문화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 소비하는 콘텐츠, 그리고 전반적인 취미 생활 등 우리의 일상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


앞서 ‘맵찔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는데 이 외에도 공유되는 신조어들이 많다. 어떤 것들은 단순히 웃음을 자아내는 반면, 어떤 것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렸다가는 예민한 ‘불편충’ 취급을 받는다.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O린이’라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막 시작한 초보를 칭하는 용어로써, 단어에서 쉽게 느껴지듯이 어린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초보란 능숙함이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멀다. 서툴고 부족하며, 미성숙하다. 그렇다면 그냥 초보라고 하면 안 됐던 걸까. 어린이들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신체와 어른과는 다른 순수함 때문에 분명 보호나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 어떤 분야에서 어른보다 무언가를 더 잘 알거나, 잘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신보다 어린 존재에게 배울 것이 없고 무조건 가르치기만 대상으로 보는 것이야 말로 ‘꼰대’가 아닐까? 이런 점들을 지적하며 ‘O린이’라는 단어를 지양하자고 말하면 되려 비난의 화살이 날아온다. 애초에 왜 해당 단어에 대한 비판이 생겨났는지 고민해 볼 생각은 당연히 없으리라.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요즘의 독자들이 소위 말하는 ‘빌드 업’을, 즉 차근차근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을 견디지 못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매 회차마다 굵직한 사건이 빵빵 터지고, 속 시원한 사이다 전개를 원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금만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으로 표현해도 이해하지 못하며, 직설적으로 묘사해야만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는 추세라고 한다. 그 게시글에 나온 예시를 똑같이 들어 보겠다. 주인공이 길고양이를 발견한다. 그는 그 고양이에게 연민과 보호 본능 등 복잡한 감정을 느끼지만 여건 상 데려갈 수 없다. 그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는 이유를 떠올리며 치열하게 고민한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 주인공이 그 길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을 맺는다. 앞선 내용을 고려하건대 결국 주인공이 해당 고양이를 키우기로 결심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소설의 댓글 창에는 제발 그 고양이를 데리고 가 키우라며 눈물로 호소하는 댓글들이 많았다고 한다. 나와 같은 글을 본 것이 맞는지 의문이다.


요즘 누군가에게 취미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면 대부분 유튜브를 든다. 유튜브, 나도 굉장히 좋아한다. 고양이를 사랑하지만 키울 수 없는 입장으로서 유튜브의 고양이들 덕분에 대리만족이 가능하다. 또한 책을 읽거나 잠들기 전, 그리고 스트레스가 심할 때 유튜브의 ASMR을 즐겨 듣는다. 그러나 유튜브를 취미로 들기는 다소 애매하다. 고양이 영상은 주로 씻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거나 업무 준비를 할 때 배경 음악처럼 틀어 놓는 수준이고, ASMR의 경우 영상을 본다기보다는 듣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홀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영상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유튜브 외에 언급되는 취미들도 비슷하다. 인스타를 하루 종일 들여다본다든지, 웹툰을 밤새 본다든지 하는 식이다. 이 중에 ‘글’이라고 불릴만한 취미는 없어 보인다.


유행하는 영화나 드라마들도 썩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넷플릭스 같은 OTT 작품이든, TV 방송국 작품이든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부쩍 늘었다. 이러한 작품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미성년자들에게 노출되는 상황은 더욱 걱정스럽다. 그 외에 인기를 끄는 콘텐츠라면 아마 단순한 재미를 위한 예능 프로그램을 들 수 있겠다. 이처럼 원초적이거나 그 구성이 단순한 작품과 예능 프로그램만 지속적으로 접한다면 한동안 유행했던 말로 ‘도파민 중독’이 되기 쉽다. 이런 상황에서 전개가 느긋한 작품들이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방송들은 당연히 설 자리를 잃는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처럼 깊은 사고를 기피하거나 하지 못 하고 말초적인 자극과 시각 이미지에만 길들여진다면, 과연 미래의 인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과연 단순한 가상의 미래일까


가장 힘이 세고 빠르고 똑똑한 개체가 살아남아 번성한다는 자연도태의 원칙은 한 때 인류의 진화에 기여했다. 이 때문에 미래를 상상해 그려낸 많은 SF 작품들이 현재보다 더욱 지능이 높고 기술적으로도 발전한 인류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도태의 원칙과도, SF 속 미래의 인류 모습과도 서서히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후 화면이 등장하며 주인공 바우어가 등장한다. 아주 똑똑하거나 업무적으로 굉장히 특출 나지도 않은, 적당히 벌고 편하게 지내고 싶은 지극히 평범한 남자이자 군인 바우어. 그랬던 그는 지능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평균에다, 독신에 딸린 식구가 없다는 이유로 ‘인간 냉동 프로젝트’에 차출된다. 여자 중에서는 민간인 리타가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프로젝트 담당자 콜린스 대령이 매춘 알선 혐의로 체포되고 프로젝트는 완전히 잊힌다. 그러는 동안 인류는 서서히 멍청해진다. 그나마 똑똑한 과학자들은 발기부전이나 탈모 치료제 개발에만 매달려 멍청해지는 인류를 구원할 길은 사라져 버린다.


'인간 냉동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우어와 리타


500년의 시간이 흐른 2505년에야 우연히 동면에서 깨어나게 된 바우어. 그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다. 쓰레기가 넘치다 못해 산을 이루고, 식량은 턱없이 부족하며, 사람들의 언어 수준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이 세대에서는 손목 안쪽에 upc 문신을 새겨 신분증 역할을 대신하는데, 갑자기 미래에 떨어진 바우어는 upc 문신은 물론 지불한 돈 또한 없다. 덕분에 그는 경찰에 체포되어 수준 떨어지는 판사와 변호사 덕에 어처구니없게도 중형을 선고받지만, 멍청한 간수들을 쉽게 속여 탈옥에 성공한다. 바우어는 자신의 변호사를 속여 자신이 살던 시대로 되돌아갈 타임머신을 찾게 되지만 결국 다시 경찰에 붙잡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우어의 아이큐가 대통령보다 높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는 얼떨결에 내무부장관의 자리에까지 앉는다. 바우어는 그 자리를 극구 사양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황진을 멈추고 경제를 회복시켜 놓지 않으면 다시 감옥에 보낼 것이라고 협박한다. 얼떨결에 내무부장관으로서 일을 하게 된 바우어. 그는 식량 부족 사태의 배후에 브라운도라는 이온음료 회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식량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바우어



• 똑똑한 감독이 한 가지 놓친 것


영화 ‘이디오크러시’의 내용과 내가 불닭볶음면과 같다던 요즘 문화가 아주 다른 그림은 아닌 것 같다면 너무 간 것일까. 과한 평가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사회 전반적으로 깊은 사색과 사고가 부족한 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이에 대한 훌륭한 핑계는 존재한다. 분명 현대 사회는 실생활과 관련 없는 공상이나 철학적인 생각을 곱씹을 정도로 여유롭지 않다. 어린 나이 때부터 온갖 학원에 다니고, 중고등학교 때는 밤을 반납한 채 수능 공부에 매달려야 하며, 대학생이 되면 취업을 위해 바쁘게 스펙을 쌓아야 하고, 직장인이 되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워라밸’ 따위 잊고 지낸다. 특히나 한국 사회는 ‘빨리빨리’가 기본 소양으로, 누군가 조금만 느리거나 실수하면 용납하지 못하며 나이 별로 마땅히 성취햐야 할 것들이 정해져 있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도태된 취급하기 예사이며, 자신의 진짜 꿈이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과정 같은 건 사치로 여겨진다.


게다가 아날로그적인 과거에 비해 디지털 기기들을 또 다른 신체 부위인 듯 끼고 사는 요즘, 쉬는 날 온종일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보내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세상사에 의문을 품는 것은, 새롭고 긍정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본성은 아닌 듯하다. 이 모든 것들이 촘촘히 얽힌 지금, 우리가 영화 ‘이디오크러시’와 같은 미래로 향해가고 있다고 한들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6년도에 이러한 작품을 완성시킨 감독의 통찰력이 대단하다고 하고 싶지만 이처럼 똑똑한 그도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인류가 2500년대까지 생존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낙관적이기 힘든 전망을 계속 접하는 요즘이다. 2017년에는 스티븐 호킹이 30년 안에 지구를 떠나야 한다고 경고했고, 인류, 자원, 환경 등을 기준으로 지구의 미래를 연구하는 비영리 단체 ‘로마 클럽’이 제시한 미래 그래프에 따르면 2020년이 인류 문명에 변화가 일어나는 정점이며, 2040~2050년에는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2021년에 읽은 한 기사에선 당시를 기준으로 9년 뒤 서울과 인천이 바다에 잠길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기사들은 모두 신뢰할만한 언론사에서 작성한 것들이다. 이와 같은 기사가 아니더라도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는 흔하다. 2050년쯤으로 예측했던 고온 현상이 이미 2022년에 나타나는 등 지구촌 곳곳에서 이상 기후가 발생하고 있다. NASA의 기후 과학자인 피터 칼무스는 자신에겐 매일매일이 영화 ‘돈 룩 업’이며, 이대로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고 과장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생활하거나, 말로만 걱정하는 시늉을 하는 데서 그친다. 나조차도 음료를 테이크아웃 할 땐 텀블러를 사용하고, 주기적으로 옷을 쇼핑하는 습관을 버렸으며, 최대한 채식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제법 자주 배달 음식을 시키고, 일회용품을 더 줄일 수 있음에도 귀찮은 마음에 아직 과거의 습관들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집단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법과 제도적인 변화와 강제가 필요하지만 이 또한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이디오크러시’ 감독의 우려처럼 인류는 정말로 멍청해지고 있고 앞으로도 더욱 멍청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의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둘째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글에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무리를 짓고자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나의 낙관주의를 포기해야겠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42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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