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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Jan 20. 2023

[경계선] 편견 그 너머로

가려진 눈을 뜨게 하다






누구나 한 번쯤 기존에 알고 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깨닫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 정도에 따라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던 지식이나 관점을 배우게 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뒤집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전자에 속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작년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이하 우영우)를 들고 싶다. 비교적 단신(…)이라는 것 외에는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상태로 태어난 나로서 ‘우영우’는 미처 생각지도 못한 관점들을 가르쳐준 드라마였다. 이후 각 에피소드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한 네티즌들의 담론들 역시 그동안 나의 시야가 얼마나 협소했는지 일깨워주었다. 좀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나의 시각을 뒤바꾼 데는 페미니즘을 빼놓을 수 없다. 페미니즘을 접한 덕분에 막연하게 불편하다고 얼버무려졌던 생각들과 예민하다고만 여겨졌던 감정들은 이후 적확한 용어와 논리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나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준 작품으로 한 가지를 더 언급하고 싶다. 바로 영화 ‘경계선’이다. 


‘경계선’의 포스터를 처음 보았을 땐 인간들 사이에 섞여 들어가 살아가는, 무언가 다른 특별한 존재들에 관한 판타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딘지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배경의 분위기와,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주인공의 외모 때문이었다. 이렇게 글을 적으면서도 조금은 부끄러운 것이, 내가 생각했던 ‘평범하지 않다’의 정의가 썩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부정적이었다고까지 보긴 힘들지만 그 ‘평범하지 않음’에 내가 포함되어도 아무렇지 않겠느냐고 묻는다면 흔쾌히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내 낯을 뜨겁게 만든다. 그러나 진짜 부끄러워진 지점은 바로 영화를 관람한 이후였다.



• 모든 편견을 뒤흔드는


후각으로 상대방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출입국 세관 직원 티나. 그는 이 특별한 능력을 통해 불법적인 물건을 밀반입 하려는 사람들이나 범죄자들을 잡아낸다. 그러나 티나는 평범하지 않은 외모 때문에 남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외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누구라도 곁에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제대로된 연인이라 볼 수 없는 남자와 지내던 어느 날, 티나 앞에 수상한 짐을 잔뜩 든 보레가 나타난다. 티나는 보레와의 만남 이후 자신과 닮아 있는 그에게 서서히 끌리기 시작하고 둘은 결국 사랑을 나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티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한다. 그저 염색체에 문제가 좀 있는 줄로 여겼던 그의 몸에서 남성의 생식기가 솟아난 것. 보레 역시 수염과 체격, 걸걸한 목소리 등 겉으로는 완벽하게 남성으로 보였지만 그는 여성의 생식기를 지녔다.


티나와 보레의 첫 만남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후, 보레는 티나에게 보레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티나와 보레의 정체는 인간이 아닌 트롤이라는 것. 냄새로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번개가 따라 상처가 생기기 일쑤이며, 한때는 꼬리가 있던 흔적 역시 모두 그들이 트롤이라는 증거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핀란드에 그들과 같은 무리들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이어서 보레는 인간들이 트롤들로 인체 실험을 진행했고, 그로 인해 그와 티나 모두 부모님을 잃고 인간들의 세상에 내던져진 것임을 알려준다.


티나와 보레의 교감


한편 티나는 자신의 능력으로 경찰을 도와 소아성애 범죄자를 체포하는데, 그 과정에서 보레가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인간 여성과 비슷한 생식 능력을 지닌 보레는 주기적으로 수정되지 않은 난자이자 갓 태어난 인간 아기처럼 보이는 '히시트'를 생산해내는데, 보레는 그동안 히시트를 인간 아기들과 바꿔치기해 인간 아기들을 팔아넘겨온 것. 이는 트롤들의 삶을 파괴한 인간들에 대한 보레의 복수 방식이었다. 얼마 뒤 보레는 티나의 친구 부부의 아기마저 바꿔치기 하고, 결국 티나는 자신과 함께 트롤 종족을 되살리자는 보레의 제안도 마다한 채 그를 잡으러 나선다.



• 얽매여 있는 지금의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만큼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세상이 불안정하게 느껴지는 감정도 없을 것이다. 이를 극복하든 하지 못하든, 그 당사자는 결코 예전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경계선’의 주인공인 티나가 감정의 격동이 어렴풋하게나마 예상된다. 보레 덕분에 자신이 실은 트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 티나는 그저 자신이 못생기고, 몸에 문제가 있는 줄로만 알고 살아 왔다. 이러한 자조적인 스스로에 대한 정의를 통해 그가 그동안 감당해야만 했을 상처와 타인들(정확히는 인간들)의 시선을 통해 비추어진 ‘비정상적인’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전달되면서, 티나에게 있어 보레에 의한 예기치 못한 혼란과 변화는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티나가 자신의 트롤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 그를 괴롭혔을 요소들에 대해 들여다 보고자 한다. 영화 시작 초반부터 그는 한 남성에게 외모 비하를 당한다. 허구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평균적인 인간들과 다른 생김새를 지닌 티나는 설정 상 그때 처음 외모를 비하를 당한 것이 아닐 것이다. 여성의 외모에 더욱 각박한 가부장제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티나의 마음에는 더욱 큰 상처와 딱지가 생겼다가 덧나기를 반복했을 듯 하다. 티나의 신체 역시 인간들과는 차이가 있다. 그는 직관적으로는 여성처럼 보인다. 얼굴 뿐만 아니라 남성의 여유증과는 분명 다르게 발달한 가슴이나 상대적으로 체격 등도 티나가 여성으로 보이게끔 한다. 하지만 하필 생식기만 남성의 것에 가깝다. 이때문에 티나로서는 수치심은 차치하고라도, 성별에 따라 외모는 물론 사회적 수행까지 일치해야 하는 인간 세상에서 적응하는 데 있어 더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영화 속 티나의 모습


영화 ‘경계선’을 보고 나서 생각난 두 문학 작품 있다. 첫 번째 작품은 룰루 밀러의 에세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이 책을 간단히 요악하면 이러하다. 우리가 물고기라고 부르는 종들은 같은 이름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이 충분하지 않다. 그럼에도 직관적이지만 충분치 않은 공통점만으로 그들을 어류라는 이름으로 묶은 것은 결국 각 종들을 서열로서 구분해 인간이 만들어낸 사다리이며, 인간이 그 사다리의 정상에 머물기 위한 인위적인 구분일 뿐이다. 티나가 그동한 느꼈을 혼란과 자괴감은 이처럼 인간중심적인 시각으로 만들어진 일정 틀에 자신을 끼워맞추려는 노력에서 왔을 것이다. 보레는 인간들은 기생충처럼 지구의 모든 것을 써먹으며 인류 전체가 병폐라는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모든 것에 이름 붙이고, 본인들을 기준으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것 역시 기생충답게 모든 자원과 생명을 용이하게 착취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판단한다면 너무 가혹할까.


두 번째는 작품은 김멜라의 단편집 ‘적어도 두 번’ 중 첫 번째 이야기인 ‘호르몬을 춰줘요’이다. 이 이야기에는 인터섹스인 초등학생이 등장한다. 그는 곧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여성이 될지 남성이 될지 선택해야 한다. 그는 이러한 중대한 선택을 앞두고 자신이 뭔가 문제가 있는 존재라는 감각과, 진짜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는 열망에 끊임없이 시달린다. 주인공이 아직은 세상을 긍정적이고 마냥 밝게 보아야 할, 차라리 아무것도 몰라야 할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은 아마도 그가 태어난 그대로 존중 받을 수 없는 사회 구조와 인식 때문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은 타고난 성별, 외모, 그리고 이에 따른 내적 외적 수행이 일치해야 한다. 이에 어긋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고유함을 무시한 채 여자답거나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이 뒤따른다. 우리의 인식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성별 이분법’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여성과 남성을 각각 정해진 위치에 두어 그 명맥 (그리고 차별)을 유지하려는 가부장제에서 출발한다.


영화 '경계선'의 한 장면


이처럼 인간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치관 아래에서 불안과 소외감을 느끼는 존재가 비단 티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존재는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이는 생존 본능과도 얼마간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 다르다. 우리가 구분해 놓은 경계선들이 완벽하게 기능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티나는 트롤이지만 어떤 면에선 충분히 인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여성이기도 하면서 남성이기도 하다. 티나에게 둘 중 하나의 이름만을 허락하기엔 그는 너무나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티나는 그저 티나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지닌 편견과 고정관념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다면, 모든 존재들에 어떻게든 정해진 이름을 붙이고 일정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강요한다면, 결국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이는 아마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나의 세상이 지금껏 경험하고 알아온 세상에서 멈춰있길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를 둘러싼 경계선을 지금 넘어야 한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2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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