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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28. 2022

[코다] 가족의 의미

낯설지 않은 딜레마






현재는 환경 문제부터 시작해 여러 가지 이유로 내 인생에 자녀는 없을 계획이지만, 예전에는 종종 이런 상상을 해보곤 했다. 나 하나도 간신히 책임질 만큼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아이가 생긴다면, 그런데 그 아이에게 엄청난 재능이, 그것도 돈이 많이 들기로 악명 높은 예체능 쪽으로 탁월한 재능이 다면 어떨까? 아이 입장에서도 내 입장에서도 끔찍한 일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한 이후부터 나는 주변 친구들에게 말하곤 했다. 아이가 이루고 싶은 꿈을 끝까지 지원해 줄 수 없는데 아이를 가지는 것이 썩 이상적인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한 연예인이 방송에서 돈 없으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가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솔직히 얘기하면 그 연예인이 너무 직설적으로 말한 것 같기는 해도 의도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나 그 연예인이나 결국 아이를 낳는 부모 입장이 아닌 태어날 아이의 입장에서 한 이야기일 뿐이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누구도 부모에게 낳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한 아이의 탄생이 응당 축복받을 일이라는 것과 별개로, 이는 부모의 의지이자 욕심에 의한 것이다. 게다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즐거움으로만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아무것도 몰라도 되고 어른들의 도움으로만 편히 지낼 수 있는 시기는 무척 짧다. 그나마도 사회 전반적으로 경쟁이 점점 심해져 이처럼 자유로운 시기는 더욱 짧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아이의 탄생 이전, 아이가 하고 싶은 일을 뭐든 할 수 있게끔 준비를 해두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이런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어서일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수상해서, 그리고 푸른 배경의 시원스러운 포스터가 마음에 들어 선택한 ‘코다’를 감상했을 때 영화 중후반부까지 은은하게 속이 불편했다. 영화 자체가 별로여서 그랬던 건 결코 아니다. 주인공 루비의 재능이, 그리고 그의 꿈이 가족들 때문에 좌절될 위기에 처한 모습에 불안을 느낀 탓다.



농인 어부 가족들, 그리찾아


농인 가족들 중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고등학생 루비. 그는 새벽부터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배에 올라 물고기를 잡으러 다닌다. 비록 가족들은 들어주지 못하지만 루비는 배 위에서도, 그리고 혼자 시간을 보낼 때도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루비는 자신이 좋아하던 남학생 마일스를 따라 홀린 듯 계획에도 없던 합창단에 들어간다. 루비의 목소리를 들은 음악 선생님 미스터 V는 루비에게 마일스와 함께 듀엣 공연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 버클리 음대에 지원해 볼 것을 권유한다.


영화 속 루비


이후 루비는 미스터 V의 레슨을 받고 듀엣 공연을 준비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그리고 마일스에 대한 애정을 모두 함께 키워나간다. 이제야 자기 자신에 대해 서서히 알아가고 있다고 느낀 것도 잠시. 곧 루비의 일상은 가족들의 일로 꼬이기 시작한다. 연방 공무원들이 어장 보호를 명분으로 고기잡이를 나설 때 관찰관과 동행할 것을 지시한 것. 이때 관찰관 동행에 지불할 비용은 무려 800 달러. 이에 아버지와 오빠는 충동적으로 조합을 꾸려 다른 어부들과 함께 직접 생선을 팔 계획을 세운다. 덕분에 가족들을 돕느라 더욱 바빠진 루비는 미스터 V와의 레슨에 매번 지각을 하 미스터 V의 경고까지 받는다.


미스터 V, 마일스와 연습 중인 루비


간신히 미스터 V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얻게 된 루비는 가족들에게 마침내 털어놓는다. 자신은 음악을 사랑하고, 평생 가족들을 대신해 통역사 일을 하는 것이 지친다고. 설상가상으로 해경과의 해프닝으로 아버지와 오빠가 대신 무전을 받고 의사소통해 줄 사람이 없다면 다시는 배에 오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결국 루비는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가온 합창단 공연 날. 비록 소리는 듣지 못하지만 루비의 듀엣 공연에서 관객들의 반응을  아버지는 기분이 묘해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루비에게 듀엣 공연 때 불렀던 노래를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기에 목의 울림이라도 느껴보고자 루비의 목에 손을 올린 채로.


합창단 공연에서의 루비



축복과 족쇄 이 그 어딘


단순하게도 ‘코다’라는 제목이 주인공의 이름인 줄로 알았다. 영문으로는 ‘CODA’로서, 풀어서 쓰면 ‘Children Of Deaf Adults’. 즉 농인 어른들(부모)의 아이들이라는 뜻이 된다.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여동생 이렇게 네 식구인 루비네 가족들은 주인공 루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농인이다. 농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 하기에는 조심스러우니 넘어가려고 한다. 다만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 루비가 그동안 가족들을 돕고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을지가 눈에 선하다. 이 과정은 영화 내에서도 잘 그려져 있다. 그는 새벽부터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배에 오르고 아침이 밝아오면 등교한다. 학교에서 또래들이 생선 냄새가 난다고, 혹은 그의 가족들이 청각 장애가 있는 것을 두고 치졸하게 놀려대도 묵묵히 견딘다. 하지만 누군가 가족들이 농인이라고 만만하게 보거나 무례하게 굴면 적극적으로 맞선다. 성인이 될 시기를 앞둘 때까지 루비는 평생을 그렇게 가족들을 위해 지낸다.


버클리 음대의 오디션을 보는 루비


나라면 루비처럼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망설이지 않고 ‘아니오’라고 말하고 싶다. 천성이 개인주의적이고 나부터 생각해서 그럴지 모르지만 학교에 가기 전에 새벽부터 바다에 나가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피곤하다. 설령 어쩔 수 없이 루비처럼 가족들의 일을 돕더라도 결코 그가 그랬던 것처럼 밝은 태도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치사한 것 같은 마음에 입 밖으로 불평은 안 하더라도 하루 종일 표정이 굳은 채로 내 시간을 뺏겨 불만인 티를 냈을 것이다. 그랬던 루비가 단순히 재능을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재능을 인정받은 순간은 나조차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긴 시간 어부 생활과 가족들의 통역사, 그리고 학교 생활 사이에서 고군분투했을 그에게도 드디어 한 줄기 빛과 같은 일이 생겼다고 믿었다. 그러나 루비의 재능이 꿈으로 변해가는 순간부터 그의 일상은 다시금 꼬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꿈과 가족 사이에서 저울질해야만 하는 루비의 상황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졌다. 루비도 이제 그의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았다.


훌륭한 재능과 사랑하는 가족. 태어나 보니 이 두 가지를 모두 지니고 있다면 정말 기쁠 것이다. 하지만 이 둘 모두를 타고났으나 하나를 선택할 경우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면 이만한 비극도 없으리라. 루비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러한 딜레마는 제법 흔하다. 사소하게는 장기로 해외여행을 갔다가 스마트폰으로 문자조차 제대로 못 보내는 부모님이 걱정될 수도 있고, 조금 더 심각하게는 루비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따로 있지만 부모님이 바라는 일을 해야 하나 고민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는 부모님에 대한 사랑의 크기와 무관하게 마음에 짐을 지어주는 일이다.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싶다가도 죄책감을 느끼고, 다 무시하고 싶다가도 그런 마음을 억누르게 된다. 다른 인간관계와 달리 어떻게든 서로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으로 인해 완전히 인연을 끊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거나 무척 어렵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가족 관계는 일종의 족쇄이.



천만 다행히도 루비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루비의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노래하는 딸의 목에 손을 가져가 그 울림을 느꼈다. 그는 전혀 들을 수 없었을 테지만 노래하는 딸을 보고 느끼며 눈물을 쏟는다. 현실 속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의 재능이나 열정을 알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그 어떤 문제점이나 한계가 있더라도 결국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는 당연히 사랑이다. 두 번째는 항상 옆에 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 구성원이 독립된 한 개인이라는 의식이다. 정도의 차이뿐이지 부모들은 어느 정도 자식에 대한 소유욕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존재이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의 외로움을 달래주거나 혹은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자식이 (혹은 가족 구성원 누구든) 본인의 인생을 살도록 응원해 주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축복 따윈 없이, 오로지 족새로만 여기길 원치 않는다면 말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47452

IMDB : https://m.imdb.com/title/tt10366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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