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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Oct 14. 2022

[신체 강탈자의 침입] 세뇌, 그 달콤함

모두가 미친 세상에서 나만 정상인 것 같을 때






주관을 갖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내게 있어서 주관이 있다는 건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잡는 능력과도 같다. 안하무인격의 황소고집만 아니라면 본인만의 확고한 주관이 있다는 건 근사한 일이다. 이 주관을 통해 사소하게는 음악이나 음식 취향이 자리 잡을 것이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앞으로 추구할 커리어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형성할 수 있다. 즉 한 사람의 주관은 그 사람이 나아갈 방향과 삶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결정해 준다. 하지만 자신만의 명확한 주관을 갖는 일은 경우에 따라 피곤하거나 심지어는 고단한 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음속 깊이 믿고 있는 그 주관이 세상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 경우가 특히 그렇다.


그 예시는 다양하다. 공적인 자리에서는 단정하고 TPO에 맞는 차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여자에게 화장은 예의라고 잔소리를 듣는 경우. 워낙 집순이라 혼자 조용히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주변에서 외롭지 않으냐고 오지랖을 부릴 때. 동물도 인간만큼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는데 그래도 사람이 더 귀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마주하며, 채식 같은 건 왜 하느냐고 핀잔을 듣는 순간. 따돌리는 사람도 문제지만 따돌림당한 사람한테도 무언가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소리나,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편협한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순간. 합당한 주장을 하는 장애우들에게 왜 일반 시민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시위를 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을 목격한 경우.


이처럼 나의 주관과 거리가 있는 사람이 그저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이라면 잠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소수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좌절감은 썩 유쾌하지 않다. 어느 순간 나의 의견과 믿음조차 남들 앞에서 꺼내놓기 두려워지고, 나를 이해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나도 남들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정말 편할 텐데, 아무 생각 없이 무비판적으로 다수의 생각을 따를 수 있다면 지금처럼 힘들진 않을 텐데 하고 말이다.



다음은 당신이야


의사 베넬 박사는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환자들이 많다는 간호사 샐리의 긴급한 연락을 받고 회의 중 서둘러 자신이 살고 있는 산타마리아로 돌아간다. 그런데 웬일인지 막상 병원에 돌아오니 그를 만나겠다던 환자들은 줄줄이 예약을 취소한 상태. 한편 베넬 박사의 연인인 베키의 사촌 윌마는 자신의 삼촌이 진짜 삼촌이 아니라 주장한다. 그들의 외모와 말투, 기억과 제스처 등은 모두 똑같지만 예전에 그들에게서 느껴지던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윌마의 삼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베넬이 보기에도 그가 알던 윌마의 삼촌가 다를 바 없다. 베넬은 일단 윌마에게 심리 상담을 받아볼 것을 권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선 왠지 모를 불안이 싹튼다.


기이한 일들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병원에 방문한 아이는 자신의 엄마가 진짜가 아니라는, 윌마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급하게 연락을 받고 찾아간 친구 잭의 집에는 그와 똑 닮은 시체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 시체는 얼굴도 완성이 덜 되어 있는 듯 보이고 지문도 찍히지 않는다. 베키와의 데이트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주었을 땐 밤늦게까지 지하실에서 작업하다 나오는, 어쩐지 수상한 모습의 그의 아버지를 발견한다. 그 사이에 의문의 시체는 잭과 완전히 동일한 모습으로 변하고, 문득 불안해진 베넬은 베키의 집으로 다시 찾아간다. 그리고 베넬은 지하실에서 베키와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시체를 발견하고, 황급히 그를 데리고 집에서 탈출한다.


마치 친구 잭처럼 보이는 시체를 관찰하는 베넬 박사


이후 베넬은 베키, 잭 부부와 다 같이 식사하던 중 온실에서 수상한 식물을 목격하는데, 이를 확인한 잭은 그것이 자신의 집에서 발견한 시체의 원형이라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종자처럼 생신 수상한 물체가 몸의 주인이 잠든 사이에 자라나 복제된 몸을 만들어 본래 주인을 대체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상황은 점점 더 최악으로 치닫고, 탈출을 시도하던 도중 잭 부부는 결국 종자들에 의해 지배당하고 만다. 그렇게 산타마리아의 주민들은 하다 둘 자아를 잃어 간다.


신체 강탈자들은 고군분투하는 베넬과 베키를 설득하며 말한다. 자신들은 지구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며, 본인들과 함께 한다면 고통과 분쟁 없는 세상에서, 사랑 욕망 야망 진실 등 감정이 없는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힘든 탈출 과정에 지친 베키는 결국 잠들어 버리고 마침내는 그들 중 하나로 변하고 만다. 간신히 홀로 산타마리아를 벗어난 베넬은 이미 종자들이 이동하고 있는 도로 한복판에서 절규하듯 외친다.


‘이미 이곳에 도착했어. (They are here already) 다음은 당신이야. (You are next)‘


달아나는 베넬과 베키



주관으로 넘쳐나다양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설정은 어떤 면에서는 귀신이 나오거나 잔인한 연쇄살인마가 나오는 호러물보다도 더 공포스럽다. 나의 몸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차지해 버리다니. 그것도 나의 기억과 생각, 그 외의 사소한 모든 것까지 전부 차지한 채로 말이다. 와중에 나의 영혼만이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 나의 것이지 못한 상황. 한 개인의 주관이나 주체성, 독립성 같은 가치에 의미를 크게 두는 나로서는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공포 영화 마니아임에도 해당 장르에서 꽤 명작으로 손꼽히는 ‘스켈레톤 키’를 여태 못 보고 있다.


그러나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서와 같은 끔찍한 설정은 어떤 은유로 보이기도 한다. 신체를 강탈당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산타마리아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본인만의 감정을 느끼는 주체였다. 그러나 외계 생명체에 의해 장악당한 순간부터 그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만 작동하며, 같은 생각을 하고 동일한 목표만을 추구한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아마 역사 속 수많은 독재자 지배 하에 있던 국민들이 영화 속 산타마리아 주민들과 비슷한 처지였을 듯 싶다. 베넬과 사랑하며 살고 싶다던 베키는 결국 쏟아지는 졸음 앞에 굴복하고 만다. 단순히 사상이나 생각을 강요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기본적인 욕구나 권리까지 차단하는 상황 앞에서 끝까지 자신만의 주관과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역사 속 독재자까지 갈 것도 없다. 어느 국가 혹은 집단이든 지배적인 가치가 존재한다. 이런 것들이 꼭 나쁘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동의 가치나 목표 덕분에 본인의 소속에 대한 애정과, 나머지 구성원들과의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국가나 다수의 가치와 사상 하나하나가 모든 시대와 상황에서 옳을 수 없고, 당연하게도 모든 이가 이에 동의할 수도 없다. 이때 가장 중요한 건 다수에 속하지 못한 이들의 의견이나 입장에도 귀를 기울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배려를 바탕으로 한 필요한 절충이나 협상의 과정이 따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과정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덕분에 다수의 사상에서 배제된 이들은 소외감이나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영화 속 베키처럼 집단의 혹은 다수의 가치관을 내면화하게 된다. 그냥 순응해 버리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더 편하기 때문이다.


영화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한 장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해온 세상의, 국가의, 집단의, 그리고 가족의 가치를 무시하기란 어렵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일정 나이를 넘어서면 ‘원래 그래’라든지,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로 자신의 주관을 고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결국 다수의 사상에, 미디어에서 팔아 대는 유행에, 각종 기관에서 유도하는 믿음에 굴복하게 되는 것이다. 본인만의 주관이란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이를 추구하기 위해선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것에 의심을 품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은 결코 유쾌하거나 수월하지 않다. 차라리 혼란스럽고 심할 경우 배신감 같은 감정이 밀려들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자신만의 단단한 주관을 품은, 더 폭넓은 다양함으로 넘쳐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사진 출처 : https://movie.daum.net/moviedb/contents?movieId=13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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