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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Aug 25. 2023

[이별 조작단] 미워도 다시 한번

그런데 애인 말고







어렸을 적 영원한 사랑만큼이나 낭만을 품었던 것이 영원한 우정이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달려와 줄 수 있는 연인 못지않게,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슬퍼해 줄 한마음 같은 친구를 간절히 원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부터 이런 바람을 품었다. 그랬던 나였기에 누군가 편견에 똘똘 뭉쳐 여자의 적은 여자라거나, 여자들끼리는 진짜 우정이 불가능하다, 따위의 말을 할 때마다 주먹으로 그 입을 가격해 주고 싶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페미니즘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이러한 편견들이 전부 여성들에게 인생의 가장 큰 기쁨과 목표는 남성에게 선택받는 것이라고 세뇌하고, 결혼과 동시에 가정에 얽매이게 만드는 가부장제 탓이라는 사실 같은 건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이 중요한 원인을 깨닫기 전까진 친구와 갈등이 생길 때마다, 연애와 동시에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를 볼 때마다 진정한 친구를 원한다는 나의 로망과, 여자들끼리도 진한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나의 믿음이 흔들리곤 했다. 그러다 사회인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요한 진리 하나를 더 알게 됐다. 인간관계란 그냥 다 힘들다는 것을.



때문미치겠어, 하지만 너 없으면 안 되겠


평범한 이별이 불가능하거나, 그럴 용기가 없는 이들을 돕는 이별 대행사 ‘브레이커 어퍼러스’를 운영하는 멜라니와 제니퍼. 두 사람은 한때 바람둥이의 양다리 상대였으나, 현재는 우정 팔찌까지 나누어 소중한 사이가 됐다. 그런 그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고객 조던. 앳된 얼굴의 조던은 ‘연약한 꽃’ 같은 여자 친구 세파와 헤어지고 싶어 한다. 결국 계약을 하고 직접 마주친 세파가 연약한 꽃과는 거리가 멀어 당황한 것도 잠시, 흥분한 조던은 멜라니를 임신한 새 여자친구라고 소개해 버린다.


잠복 중안 멜라니와 제니퍼


일이 틀어지자 멜라니와 제니퍼는 말다툼을 벌이지만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멜라니는 그동안 신경이 쓰이던 고객과 어울리는 것도 모자라 조던과 데이트까지 시작한다. 제니퍼는 고객과는 사적으로 엮이면 안 된다는, 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규칙을 들먹이지만 멜라니는 이를 무시한다. 그러다 두 사람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에서 또 한 번 업무를 망치게 되고, 둘은 서로에게 언성을 높이다 더는 못 참겠다는 말과 함께 우정 팔찌까지 버리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업도 우정 점점 최악으로 치닫던 그때, 제니퍼는 결심한다. 모든 걸 예전처럼 되돌리겠노라고, 그리고 무엇보다 멜라니를 되찾겠노라고.


조던의 의뢰를 해결 중인 멜라니와 제니퍼



평가절하 된, 등한시된 


요즘은 이러한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때 로맨스 하면 여자들이나 좋아하는 장르쯤으로 치부되었다. 대부분의 스토리 라인이 유니콘에 가까운 모든 걸 다 가진 남자가 (어디까지나 설정 상) 평범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데서 벗어나지 않기에 현실의 여성들에게 환상만 심어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여전히 여성들 사이에서 로맨스물은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제는 수동적인 여자 주인공이 보기 드물어졌을 뿐만 아니라, 남자 주인공보다 능력이 좋은 경우도 흔해졌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를 꾀한 덕분인지 이제는 로맨스 장르가 남성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가 많아졌다.


하지만 최근의 변화 이전에, 그동안 왜 백마 탄 왕자와 같은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로맨스 장르가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멋지고 능력도 있는데 오직 나 하나만 바라봐 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분명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그러나 이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여성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배워 왔다. 물론 남성들 역시 비슷한 말을 듣고 자라지만 그전에 자신의 능력부터 갖춰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기에 따라 남성에게만 부담을 지우는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누군가의 남편이나 아빠가 되기 이전에 자기 스스로의 위치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여자와의 로맨스나 결혼은 남성에게 있어서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일종의 보상 차원이 된다. 한 가정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가장'이 자연스레 결혼한 남성에게 따라붙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별 조작단'의 한 장면


이와 달리 남성과의 미래가 우선순위라고 세뇌되어 온 여자들로서는 연애와 결혼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른 많은 욕구들 사이에서 나를 영원토록 사랑해 줄 남자를 만나고 싶은 열망이 가장 크고 굳게 자리하면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가 되는 데 몰입한다. 여자라면 결혼과 동시에 일을 관두어야 했던, 그리고 대학을 나오는 것만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을 살아간 여성들로서는 남자에게 선택받고 사랑받는 일이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한 시대를 지배한 풍조는 칼로 베듯 잘라낼 수 없고, 이 때문에 어머니나 그 윗 세대 여성들이 당연시 받아들이던 가치관이 아직까지 젊은 여성들에게도 은연중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전히 유효한 인습이나 편견, 그리고 이에 더욱 부채질하는 각종 매체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머리로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고, 여자 친구들과 평생 재밌게 지내고 싶다가도 불현듯 그래도 함께 늙어갈 남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불안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여자가 남자와의 관계를 우선시하게끔 부추겨지는 상황에서 한 여성이 같은 여성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한 무언가로 여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별 조작단’의 결말은 인상적이었다. 영화 속 멜라니와 제니퍼는 일 끊임없이 다투고 갈등한다. 그럼에도 결국에는 서로를 선택한다. 인생에서 결코 없으면 안 되는 단 한 사람이 다름 아닌 상대방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여성들 간의 우정을 그린 작품 자체가 남성의 우정에 대한 작품에 비해 여전히, 현저히 부족하지만, 이마저도 지나치게 낭만화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이별 조작단’에서 그려진 두 여성 사이의 우정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멜라니와 제니퍼에게는 서로가 애틋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밉고 짜증스럽고 답답하며 서운함도 느낀다. 나 또한 익숙한 감정이다. 그렇게 때문에 영화의 엔딩은 더욱 놀랍다. 이처럼 현실적인 우정을 위해, 그 어떤 성애적 감정이나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고받는 관계들을 뒤로한다는 것이.


'이별 조작단'의 한 장면


영화 속 제니퍼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옳건 그르건 우리 여자들은 항상 남자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에 제니퍼와 멜라니의 우정이 이렇게 오래간 것이 놀랍다고. 요즘의 로맨스 작품들이 서서히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그동안 다른 관계들보다 당연히 뒷전 취급을 받아 왔던 여성들의 우정에 대한 인식 역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누군가는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종종 다투더라도, 그리고 앞으로 그 어떤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게 되더라도 내 소중한 친구들이 평생 나의 친구로 남아 있어 주기를 바란다. 물론 나 또한 기꺼이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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