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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인 Aug 11. 2023

[플라이] 그의 변신이 더 무섭게 느껴지는 까닭

감독이 관객을 겁 주는 방법






언젠가 온라인에서 이런 게시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떤 고양이가 ‘자네 정신이 드는가?’ 류의 멘트로 주인공을 깨운 , 주인공이 한쪽 손을 들어 보니 고양이의 앞발로 변해 있다더라 같은. 내가 고양이라니.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뚱뚱하나 마르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고양이라니. 고양이로 변한다면 아마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나 만족도는 더 높아질 듯하다. 적어도 내 눈엔 고양이는 뭘 해도 예쁘기 때문이다. 아마 볼 일을 보고 나서 뒤처리도 안 한 채로 밖으로 나서더라도 많은 인간들이 귀엽다며 사진을 찍으려 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아늑한 집에 입주해 집사가 때가 되면 밥을 차려주고, 놀아 주고, 화장실도 갈아 주고, (아마 나는 싫겠지만) 씻겨 줄 것이다.


고양이가 된다면 인간으로 사는 지금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가 책임지고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내 김이 빠진다. 고양이로 변한다면 집 고양이일 경우 가고 싶은 곳도 마음대로 못 가고, 동네 고양이라면 인간들을 피하기 바쁘다. 먹고 싶은 사료도 내 맘대로 고르지 못할 테고. 당연히 영화나 책도 못 보겠지. 즉, 자유가 제한되고 주체성을 잃는다. 때문에 나는 아무리 살기 빡빡할지언정 계속 인간으로 고 싶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기에, 자고 일어나 보니 깜찍한 고양이 외에도 끔찍한 무언가로 깨어난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다. 내가 벌레라니. 유충이든 성충이든, 몸이 둥글든 길든, 다리가 많든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벌레라니. 적고 보니 고양이에 대한 묘사에 비해 불공평한 느낌이 들지만,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사실이다.


대학교 신입생 때 교양 수업 때문에 ‘변신’을 처음 읽고 마음이 괴로웠 기억이 난다. 나의 가족이나 친구 중엔 남동생을 제외하곤 모두 벌레를 잘 잡는다. 내가 벌레가 된다면 도움을 청하기도 전에 맞아 죽으리라. ‘변신’은 벌레가 된 그레고를 통해 인간이 도구로 전락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소외와 실존적 고민을 회피한 사물적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껏 가족을 위해 바쁘게 살았더니 벌레가 되다니. 이보다 억울할 수 있을까. 이보다 더 억울한 케이스는 모르겠지만 못지않게 좌절감이 드는 상황을 그리는 영화는 있다. 바로 ‘플라이(1986)’이다. ‘플라이’의 주인공 세스는 ‘변신’의 그레고에 비해 고민과 성찰은 많이 했다고 할 수 있다. 세스는 다름 아닌 세상을 바꿀 기술을 개발하던 과학자이니까. 그랬던 그는 결국 본인이 개발한 바로 그 기술에 잡아 먹힌다. 좀 더 정확히는 벌레가 되고 만다.



• Be afraid…Be very afraid.


과학 박람회에 참여한 물리학자 세스와 ‘파티클’의 기자 베로니카. 세스는 베로니카에게 호감을 느끼고, 자신이 세상을 바꿀 기술을 개발 중이라며 본인의 연구실로 데리고 간다. 연구실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거대한 전송기. 세스는 베로니카에게 전송기가 현재 무생물만 전송이 가능한 단계이기에, 아직은 기사화하지 말고 생명체의 전송이 가능할 때까지 실험 일지를 기록한 후 책으로 출판할 것을 제안한다.


세스와 베로니카의 첫 만남


연구 기록 과정에서 결국 연인으로 발전하는 세스와 베로니카. 1차 원숭이 전송 실험의 실패 이후, 세스는 컴퓨터의 오류를 찾아내 마침내 2차 원숭이 실험을 성공시키고 은 이를 자축한다.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베로니카는 ‘파티클’의 편집장이자 전 연인이었던 편집장 보랜스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세스에 대한 기사를 내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늦은 밤 사무실로 향한다.


직접 전송기에 들어간 세스 / 그 안에 있던 파리


베로니카가 전 연인을 만나러 간다고 확신한 세스는 속상한 마음에 술에 취한 채 스스로 전송기 안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전송을 마치고 나온 세스는 전보다 자신의 신체 능력이 좋아진 것을 느끼고 흥분한다. 최종 목표였던, 인간인 스스로를 전송하는 일에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세스는 자신의 전송 기록을 확인하다 1차 전송체인 본인 2차 전송체인 파리가 전송 과정에서 성된 것을 깨닫게 된다.



• 인간성의 상실


영화를 본격적으로 즐겨 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포 영화하면 그저 귀신이 등장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필 제대로 처음 본 공포 영화가 ‘주온’이었고, 덕분에 이후 침대에서 유령이 나올까 무서워 이불 밑단을 접어 발끝이 닿은 채로 잠을 잤던 나로서는 한동안 편견이 가득한 채로 공포 영화를 피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오컬트, 심리물, 슬래셔, 좀비물 등 공포 영화의 하위 장르는 무척 다양했다. 또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은 꼭 귀신이 등장하는 정통 공포 영화만 진짜 무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이나 ‘겟 아웃’, ‘스켈레톤 키’처럼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게 되는 상황 역시 유령을 마주하는 것 못지않게 끔찍하다.


몸은 내 몸이되, 더는 사람 몸이 아닌 ‘플라이’ 역시 좋은 예일 것이다. ‘플라이’는 엄연히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제법 잔인한 편이지만, 아무래도 80년대 작품인지라 웬만한 시각적 자극에는 익숙해져 있는 21세기의 관객들이 경악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에도 ‘플라이’가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연출을 자랑하는 최근의 공포 영화들 못지않은 공포를 자아내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바로 주인공 세스가 인간성을 잃어 가는 과정 때문이다.


전송기 실험 이후 점점 변해가는 세스


요즘의 공포 영화, 혹은 그저 요즘 영화에 절여져 있던 나로서는 당연히 세스가 이 사람 죽이고 다닐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저 몇 명쯤 다치게 했을 그가 죽음으로 몰고 간 타인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플라이’가 선사하는 공포는 광포한 크리처의 살인 과정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경악스러운 부분은 사람에서 파리가 되어 가는 과정 그 자체이다. 어느 순간 세스의 피부에서는 점액이 흘러나오고, 손톱이 빠지고 귀가 떨어지며, 음식을 먹기 위해 체액을 토해낸다. 그리고 어느새 벽과 천장을 타고 이동하기에 이른다. 이처럼 인간의 형상을 잃어 가는 것은 물론 인간적인 내면까지 상실하는 과정들은 어떻게든 관객을 겁 주려는 듯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음에도 충분히 소름 끼치고 서늘하다.


‘플라이’의 감독 데이비드 크로넌버그는 파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통해 질병이나 노화를 묘사하고자 했다고 한다. 극적인 설정일지언정 인간에서 파리가 되어 가는 과정처럼, 질병이나 노화에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역시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와닿는 설명이다. 과학자로서의 열정을 실현시켰을 뿐이지만 결국 파리 인간이 된 세스의 심정을 상상해 본다. 아예 인간인 적이 없었다면 모를까, 한때는 인간이었으되 더는 인간이지 못한다는 것은 인류애가 없는 나에게도 끔찍한 가정이다. 그만큼 인간중심적 시각에 절여져 있는 탓도 있겠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누리는 이점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부디 자고 일어났더니  파리로 변해 있는 불상사만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본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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