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1화 첫 번째 결투 의식

by 태수련

루이는 정신이 혼미했다.

숨을 제대로 쉬기도 어려웠다. 격투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루이는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거기에 덧붙여 몹시 어지러워서 눈앞에 펼쳐진 숲의 풍경이 지금의 루이에게는 빙글빙글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투 의식’이 끝났다.

그걸 알아차린 순간에 안도감이 찾아왔지만, 그와 동시에 형이 물어뜯은 어깨의 상처가 맹렬한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맛보는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마치 어깨에 불이 붙은 듯했다.

결투 의식 중에 여덟 번째 형이 칼날 같이 날카로운 이빨을 루이의 어깨에 박아 넣은 것은 그야말로 찰나였다. 그러나 순식간에 일어난 공격임에도 타격은 확실했다. 형의 이빨이 살가죽을 뚫고 들어오는 순간, 둑이 터지는 찰나에 대포 같은 물살이 터져 나오는 듯한 기운을 품은 루이의 비명이 흑단 숲을 뒤흔들었다.

형의 이빨은 루이의 어깨 근육도 건드렸다. 살가죽 속 근육도 손상을 입은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면서 형은 무서운 악력으로 주둥이에 물린 루이의 어깨에 이빨을 더 깊숙이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대로 더 진행됐더라면 루이의 어깨는 떨어져 나갔을 것이고, ‘결투 의식’은 형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형이 루이의 어깨를 물었다는 건 형에게도 빈틈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지만 루이는 이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루이는 자신의 어깨를 물고 있는 8번째 형의 목덜미를 향해 앞발을 들어 올린 다음, 발톱을 높이 세워 그대로 힘껏 후려쳤다.

루이가 앞발을 들어 올린 것을 형도 눈치챈 듯 했다. 그가 눈동자를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대응은 늦었다. 형의 눈동자가 루이의 앞발에 시선을 주는 것과 거의 동시에 루이는 앞발을 내려쳐 발톱으로 형의 목덜미를 찢어버렸다.

그게 결정타였다.

여덟 번째 형은 눈을 크게 떴고, 눈동자를 다시 루이의 미간 쪽으로 움직여 그와 눈을 마주 보았다. 그 눈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전하지는 못했다.

그대로 형은 숨이 끊어졌다.

루이가 생전 처음 치른 ‘결투 의식’은 루이의 승리로 끝났다.

루이는 자신의 어깨를 문 붉은 털을 가진 늑대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루이는 지탱하던 뒷발에서 힘을 뺐다. 형의 몸뚱이와 겹치듯이 하는 모양새로 루이는 풀밭에 쓰러졌다.

그러나 목숨이 끊어졌어도 형은 루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루이는 형의 몸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죽고 나서도 루이의 어깨를 물고 있는 꽉 다물린 이빨은 그대로였다. 그래서 루이는 형의 주둥이 부분을 앞발로 잡고 한참 애쓴 끝에, 간신히 그의 입에서 어깻죽지를 빼낼 수 있었다.

어깨의 상처에서 끈적한 액체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지만, 살펴볼 정신은 없었다. 루이는 비틀거리면서 형의 시신을 앞에 두고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가, 눈앞의 몸뚱이에 시선을 던졌다. 그때 가느다란 햇빛 한 줄기가 형의 신체에 내려와 닿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여덟째 형의 시신이 늑대 모습에서 인간 모습으로 서서히 변하는 것이 보였다.

아, 벌써 새벽인가.

아까까지의 공포스러운 모습과는 다르게, 인간으로 변한 형의 모습은 가련했다. 늑대 왕의 아들들은 늑대 모습에서 인간 모습이 되면 일단 체격부터 순식간에 줄어든다.

숲을 빽빽하게 채운 나무들의 이파리 사이로 옅은 햇살의 줄기들은 조금씩 늘어났다. 햇살을 받은 형의 피부가 부옇게 빛을 내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피부 위로 무시무시한 상처들, 상처에 엉겨 붙은 핏덩어리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물론 모두 루이가 낸 상처다.

... 이 짓을 보름달 밤마다 계속해야 하는 건가? 13명 중에 한 명만 남을 때까지?

루이의 마음속에 혐오감이 밀려왔지만, 어깨의 엄청난 통증이 그 감정을 잊게 했다. 하지만 어깨의 물린 상처 이외에 다른 곳의 부상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루이 역시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루이는 어깨를 부여잡고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흑단 호수’까지 가야 한다. ‘결투 의식’이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결투 의식에서 이긴 늑대 왕의 아들들은 호수 밑바닥에 사는 ‘달그림자 신’에게서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 늑대 왕의 아들들이 결투 의식 기간에만 가지는 특권이다.

하지만 ‘달그림자 신’은 자신에게 찾아온 이들에게만 은총을 내려준다. 루이가 자신은 다쳐서 갈 수가 없으니, 여기까지 와달라고 부탁한다고 그녀가 루이를 찾아와서 은총을 내려주는 일은 없다. 다시 말해서, 달그림자 신에게 가다가 중간에 쓰러지면, 은총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죽게 된다.

루이는 갖은 애를 써서 호수를 향해 한 발짝 씩 힘겨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어깨에 입은 상처에서, 팔에 입은 상처에서, 그리고 등과 허리 등 몸 곳곳에 입은 상처에서 끈끈한 액체가 계속 흘러내렸다. 루이가 걸어온 궤적을 따라 붉은 흔적들이 기다랗게 이어졌다. 새벽의 햇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초록 풀잎사귀 위로 시뻘건 액체들이 뿌려져 있었다. 액체의 양은 상당해서, 루이의 지금 상태가 몹시 위험하다는 걸 짐작하게 했다.

결국, 한계가 왔다. 루이는 힘겹게 걷던 걸음을 문득 멈추었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쿵! 소리와 함께 풀밭에 쓰러진 루이는 땅과 부딪친 충격에 순간 움찔했지만, 이내 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새벽녘의 땅덩어리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피부에 느껴지는 까끌거리는 풀잎사귀의 감촉, 등줄기에 닿는 햇살의 따스함, 그리고 조금씩 커지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어깨를 비롯한 온몸에 입은 상처들의 통증. 이 모든 감각들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죽음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 죽고 싶지 않아.

루이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늑대 왕에게 제물로 바쳐진 여성들이 반드시 맞이하게 되는 그 결말대로 그녀도 사망했다.

그렇게 어머니와 사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덟째 형과 결투 의식을 치르게 된 거였다.

힘겨운 일은, 어째서 이렇게 한꺼번에 찾아오는 것일까?

하지만 이번 결투 의식에서는 승자가 없군. 형과 나 둘 다 사망이니까.

루이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바로 의식은 흐려졌고 루이는 몸뚱이가 무저갱으로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안개가 생겨나 땅 위로 얕게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기묘한 느낌이었다. 물론 숲에 안개가 끼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지금 루이에게 이 안개는 한여름 날에 눈발이 날리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이 안개는, 자연법칙과 ‘어긋나’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눈을 감은 채로 루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 사람이 나타났다.

루이의 신체는 엄청나게 뛰어난 감각 기관을 갖고 있다. 13명의 형제들 중 가장 약하다는 말을 듣는 아들이기는 해도, 그도 엄연히 늑대 왕의 아들인 것이다. 루이의 후각과 청각 등 오감, 그리고 그 오감을 넘어서는 다른 감각은 숲의 어떤 동물들보다 월등했다.

그런 루이의 코에 생전 처음 맡아보는 체취가 느껴졌다. 틀림없다. 이 숲의 수많은 동물들, 그리고 흑단 호수 아래쪽에 있는 인간 마을 구성원들 중 그 누구 하고도 다른 체취였다. 루이는 이 체취가 햇살을 받고 빛나는, 맑고 깨끗한 이슬이 맺힌 새벽 무렵의 풀내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체취의 주인이 루이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볍고도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루이는 지금 눈을 감고 있었지만, 움직임의 진동을 통해 다가오는 인물이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체구가 조그만, 15살 전후로 느껴지는 여자.

도대체 누구일까? 루이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도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구이며, 그리고 어떻게 흑단 호수 숲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대부분의 인간은 무서워서 접근하지도 못하는 곳인데...

그리고 피투성이가 되어 홀로 숲 속에 쓰러진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것도 기묘했다. 15살 정도 되는 소녀라면, 사방에 핏자국이 널린 이 살벌한 광경을 보는 순간 기겁을 하면서 도망쳐야 자연스러운 일인데...

그러나 이 낯선 여자는 전혀 겁을 먹지 않고, 다만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자는 루이의 머리맡에 섰다.

지금 루이는 고개를 들 힘도, 눈을 뜰 힘도 없었다. 그런 루이에게 다가온 여자는 조심스레 손을 뻗더니, 루이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졌다.

‘루이의 머리카락은 너무 아름다워.’

루이의 어머니가 늘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뽀얀 은빛을 띄는 루이의 머리카락은 끄트머리 부분에서 푸르스름하게 색이 바뀌었다. 루이의 눈 색깔과 똑같은 색깔로. 여기에 덧붙여 그의 머리카락은 햇빛이나 달빛을 받으면 마치 최고급 실크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 흑단 호수 숲에 사는 존재들 중 루이를 사랑하는 존재들도, 미워하는 존재들도, 루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에는 다들 감탄했다.

여자 역시 그런 듯했다. 루이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여자가 낮게 감탄사를 뱉는 것이 들렸다. 지금은 이 머리카락에 핏덩어리가 엉켜 붙어있어 평소보다 그 아름다움이 약간 덜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여자에게는 감탄스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이는 어머니 이외의 존재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평소라면 지금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는 이 여자의 손을 낚아채 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루이는 엄청난 부상을 입은 상태여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렇게 루이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여자가 이번에는 루이 어깨의 상처를 보는 듯했다. 한참 동안 아주 유심히 보았다. 그러고서 틈을 두었다가, 여자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 후에 여자는 약간 끈적거리는 무언가를 루이의 상처에 조심스럽게 바르기 시작했다. 어깨의 상처를 비롯해서 다른 상처에도 모두 발랐다. 다 바른 후에는 부스럭대더니 주머니에서 널따란 이파리 같은 것을 꺼내 상처 위에 붕대처럼 감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루이는 지금 상황이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전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자연법칙과 어긋나는 기이한 안개가 생기더니, 지금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자신을 보고 당황하지도 않고 겁을 먹지도 않고 다가와서 침착하게 살펴보는 알 수 없는 여자가 눈앞에 있다. 덧붙여 이파리를 붙이는 솜씨도 능숙했다. 이전에도 이런 일을 많이 해본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루이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상처의 통증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니라 진짜였다. 어깨에 불이 붙은 듯한 엄청난 고통이 줄어드는 듯하다가, 이제는 견딜만하다 싶더니 어느 순간 욱신대는 정도로 사그라들었다.

고통이 누그러지자,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루이는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소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