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2화 폭풍우의 밤

by 태수련

“엄청난 폭풍우네요.”

아내가 창문을 약간 열고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열린 덧창 너머에서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우르릉하는 천둥소리도 들렸다. 세찬 폭포수마냥 쏟아지는 강렬한 빗줄기 너머로, 먼발치에 보이는 산꼭대기에 푸른 번개가 내리치는 것이 보였다. 흑단 호수가 있는 쪽인 것 같다.

그 잠깐 사이에도 창문 안쪽으로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아내는 말을 마치자마자 창을 얼른 닫아야 했다. 그녀는 덧창을 닫은 뒤 뒤로 물러서며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물을 내려다보았다가, 품에 안은 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여섯 살 난 딸과 마주 보고 식탁에 앉아 있던 촌장도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두려운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식탁 위에 켜둔 굵은 양초의 일렁거리는 불빛을 응시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위험에 대해 헤아리고 있었다. ‘결투 의식’의 전조도 이렇게 두려운데, 앞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얼마나 더 무시무시하려나.

종종걸음으로 식탁으로 다가온 아내가 남편, 촌장에게 물었다.

“유랑 극단이 우리 마을에 들렀다 간 게 작년 가을이었죠? 마을 축제 때 말이에요.”

“그랬지.”

“그 사람들, 그때 우리가 부탁한 전갈 잘 전달했을까요?”

“그건 아무도 몰라.”

촌장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각자가 살고 있는 마을을 벗어난 곳에 존재하는, 먼 외지로 연락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 불확실한 시대였다. 꼭 연락을 해야만 하는 경우에는 전서구라든가 봉화를 이용하는 방법 등이 쓰였지만, 그런 방법도 이 경우에는 소용이 없었다. 연락을 받을 상대가 사는 곳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제일 확실한 방법은 촌장 본인이 직접 ‘그 인물’에게 찾아가서 마을로 데려오는 거였다. 하지만 그것도 어림없는 소리였다. 여자와 아이들을 두고, 게다가 나름대로 마을의 대표인 자신이 여러 달 이곳을 비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혹독한 겨울이 시작되기 전에 귀가하지 못한다면 가족들은 죽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대에 마을 밖의 상황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외지로 나간다는 것 또한, 촌장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선대 늑대 왕이 결투 의식을 치를 때도 무시무시했다면서요?”

“전해 내려 오는 얘기로는 그래. 그때는 마을이 거의...”

촌장은 입 밖에 내려던 말을 삼켰다. ‘마을이 거의 전멸할 뻔했다’는 얘기를 지금 이 상황에서 꺼내면 가족들을 더 겁먹게 만들 것이다. 촌장은 입을 다물고, 움츠린 채 아기를 꼭 안고 있는 아내와 그 옆에 앉은 딸을 바라보았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굉장한 은혜를 입고 있었다. 기름진 땅,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해가 잘 들어오는 지형. 여기에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는 시내가 마을 주위 곳곳에 흘러서 식수와 농수가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가뭄의 재앙에서도 이 마을은 비껴갔다.

여기에 덧붙여 외부 세력으로부터 상당히 안전했다. 강도 같은 위험한 무리들이 침입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친 노상강도 무리들도 이 지역은 습격하지 않았는데, 그들도 들은 바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마을 주변에서만 찾을 수 있는 소소한 약초들도 마을의 생존에 보탬이 되었다. 이 약초들은 병이나 부상에 특효였고, 또한 이곳을 벗어난 외지에서는 자라지 않는 식물들이어서 약제로 만들어 두었다가 팔면 꽤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을 위쪽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흑단 호수 숲’의 은혜라는 걸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점이 마을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했다.

노상 강도단이 이 마을을 건드리지 않는 것은 무시무시한 늑대 왕과, 그의 13명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잔혹하고 무자비한, 공포 그 자체인 늑대 왕과 그 아들들.

늑대 왕의 아들들이 아주 가끔이지만 마을을 습격하는 때가 있었다. 그리고 공격당한 주민들은,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했다. 아니 살아남기는커녕, 시체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압도적인 힘은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

“산 허리 쪽으로 올라갔다가 우연히 본 적이 있어.”

촌장은 땔감을 찾으러 흑단 호수 산에 갔다가 목격한, 늑대 왕의 아들들 중 한 명을 떠올렸다.

“그놈이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기척도 못 느꼈어. 그렇게 덩치가 컸는데도 말이야. 한참 도끼질을 하다가 숨소리 같은 게 느껴져서 뒤를 돌아보았더니, 바로 지척에서 나를 보고 있었어.”

촌장이 본 늑대 왕의 아들은 짙은 남색 털을 가진 놈이었다.

덩치가 엄청나게 컸다. 큰 곰과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두꺼운 기둥처럼 굵은 앞발, 그 앞발 끄트머리에서 튀어나온 칼날 같은 발톱, 살짝 드러난 송곳니는 섬뜩하게 하얬다.

그리고 그 눈은...

촌장은 기억을 떠올리다가 부르르 떨었다.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마주치고도 무사히 돌아온 게 어디예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제부터 의식이 끝날 때까지는...”

촌장 가족을 비롯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을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집이나 마차가 부서지는 것은 감당할 만했다.

진짜 문제는 늑대 왕의 아들들은 가축, 그리고 사람도 잡아먹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작년 가을 축제 때 마을을 찾아온 유랑 극단의 단장에게, 촌장은 부탁을 한 거였다.

전설의 ‘위칸’을 이 마을로 불러달라고.

“그 ‘위칸’, 굉장한 권능을 가졌다던데...”

아내가 촌장에게 말했다.

“날씨를 자유자재로 바꾸고 부러진 뼈도 아물게 할 수 있다면서요?”

“떠도는 얘기를 너무 믿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러나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을 만큼 지금은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 여자 위칸의 명성은 촌장의 할아버지 대부터 내려왔다. 못 부리는 마법이 없으며, 세상에 돋아나는 모든 풀과 나무를 꿰고 있고, 거기에 그 풀과 나무들을 여러 방법으로 정제한 후에 다양하게 뒤섞어 갖은 약제로 만들 수도 있는 인물. 그렇게 만든 약제들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그 인물이라면 결투 의식이 마무리될 때까지 마을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그 위칸에게 부디 이 마을로 찾아와 달라는 전갈을 유랑 극단의 단장에게 맡긴 거였다. 각지를 돌아다니는 유랑 극단 사람들은 그 위칸의 행방을 안다고 했다.

촌장은 극단의 우두머리에게 전갈이 제대로 전달된다면, 올해 가을 축제 때 거기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로 어떻게 됐으려나.

그때 문득, 아내가 촌장에게 말했다.

“폭풍우 소리가 잦아든 것 같지 않아요?”

......? 그러고 보니 그랬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폭풍우 소리가 상당히 줄어들었는데, 무슨 일일까. 갑자기 빗줄기가 약해진 건가.

촌장은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빗줄기는 약해지지 않았다. 아까와 변함없이 땅을 뚫을 듯이 맹렬한 기세로 퍼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집 주위에 짙은 안개가 서려 있었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 중이니 안개는 충분히 생길 수 있다. 다만 안개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했다. 한여름의 농지에 눈이 내린 광경을 보는 것처럼 무언가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광경을 목격한 느낌이었다. 촌장은 자신의 이런 느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안개가 점점 농밀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촌장은 작년 가을 유랑극단이 보여준 마술 공연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텅 빈 무대가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희뿌연 연기가 무대를 에워싸듯이 생겨났다. 흰 연기는 목적과 의지를 가진 것처럼 텅 빈 무대 위로 빠르게 밀려 올라갔다. 연기가 무대를 완전히 감싸버렸고, 구경하던 마을 사람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순식간에 연기는 사라지고 비어있던 무대 위에는 단장이 서 있었다.

조종하는 것이 불가능한 연기를 마치 훈련시킨 동물처럼 다루어 보인 놀라운 공연이었다. 모여 앉아 있던 마을 사람들 모두가 넋을 잃고 박수를 쳤다. 보이는 것을 무조건 믿지 말고, 여러 번 관찰을 한다던가 해서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판단하자는 생각을 가진 촌장조차도 그 공연은 ‘마법’이라고 인정했다.

딱 그때가 연상되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땅바닥에 가라앉은 듯한 모양새를 보이던 안개가 순식간에 ‘자라났다’.

안개의 덩어리는 창문 높이까지 덩치를 키우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지붕까지 닿았다가 순식간에 지붕의 한참 위쪽까지도 뒤덮어버렸다.

마치 고치처럼, ‘안개의 막’이 촌장의 집을 한 겹 싼 듯한 상황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안개의 밀도는 점차 빽빽해지더니 시야를 하얗게 차단해 버렸다. 농도 짙은 안개 때문에 빗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촌장의 가족은 당황했다. 틀림없다. 자연스러운 안개가 아니다. 어떤 존재가 주술을 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 누가?

아니, 그게 아니면 ‘결투 의식’의 ‘전조 현상’ 중 하나인가? 늑대 왕이, 혹은 그 아들들 중 하나가 뭔가 조화를 부리는 걸까? 의식을 치르기 전에 배를 채우려고 안개를 만들어서 우리 가족을 집 안에 가둔 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네 가족 모두 겁에 질려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똑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촌장의 가족은 흠칫 놀랐다. 지금은 한밤중이다. 이 시간에 촌장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거기에 이 거센 폭풍우와 기이한 안개를 뚫고 찾아올 수도 없다. 그래서 잘못 들은 것인가 하고 있는데, 다시 소리가 들렸다.

작고, 낮지만 분명한 노크 소리.

지금 촌장의 집 밖에서 누군가가 매우 정중한 태도로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고 있었다.

촌장은 아내 쪽을 잠시 보았다가, 용기를 내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갯속에,

맨발의 소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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