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안개를 몰고 온 소녀
문 앞에 한 소녀가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녀였다. 어두컴컴한 가운데서 살펴본 거지만 틀림없었다. 마을 사람이 아닌 생면부지의 소녀 한 명이 촌장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촌장이 가진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한밤중, 거기에 뭔가 주술적인 느낌의 안개가 밀려들어 집 전체를 완전히 둘러싸버렸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집 앞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소녀.
촌장과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문 앞에 선 소녀를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낮고도 그윽한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단장.”
...? 무슨 소리지? 촌장의 가족들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소녀는 말을 계속했다.
“단장, 유랑 극단의. 이 마을에서. 요청한다고. 도움을. 위칸의, 도움을.”
“아하!”
그제서야 촌장은 이 상황을 알아차렸다. 문 앞의 이 소녀가 그러니까...
“당신이 그 전설의 위칸이신가요?”
소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까딱했다.
전갈이 제대로 전달됐구나...! 촌장의 가족들은 당혹스러운 가운데 자신들이 절실하게 바라던 희망이 찾아왔다는 걸 알았다. 촌장은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소녀가 문안으로 들어섰다. 이때 열린 문안으로 안개가 함께 밀려 들어왔다. 삽시간에 눅눅한 안개가 집안에 가득 들어찼다. 그러자 오두막 내부의 시야가 흐려지고 동시에 숨이 막힐 것처럼 집안이 습해지기 시작했다. 촌장의 아내와 딸은 당황해서 촌장에게 다가가 그를 꼭 붙들었다.
바로 그 순간, 소녀가 왼팔을 천천히 들었다. 그런 후에 왼팔을 살짝 뒤틀었다. 그러자, 집안에 바람이 이는 듯하더니 집안에 들이찬 안개가 문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절벽에서 폭포수가 떨어질 때처럼 아주 빠른 속도였다. 그렇게 안개가 모두 빠져나간 순간, 문이 탁! 소리를 내면서 닫혔다.
언제 그랬었냐는 듯, 집안은 화덕에 지펴진 불로 환하고 따뜻하고 아늑한 공간이 되었다. 주위 모습도 분명하게 보였으며 습한 느낌도 모두 사라졌다.
그때 직감적으로, 촌장과 가족들은 이 ‘안개’가 ‘소녀가 몰고 온 것’이라는 걸 알았다.
집안에 들어선 소녀를 촌장과 아내는 유심히 보았다. 조금 전에는 소녀가 집 밖에 서 있던 상황이라 어두컴컴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이제 화덕의 불빛이 비추는 소녀의 모습을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촌장과 아내는 ‘전설의 위칸’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무의식 중에 그 위칸이 주름투성이의 노인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위칸은 나이가 아주 젊었다.
15살에서 17살 정도의 나이. 체구는 자그마하고 마른 편이었고, 키도 그리 크지 않은 듯해서 촌장과 마주 보고 선다면 촌장의 턱 정도까지 오는 키였다.
길고 풍성한 검은 머리가 허리께까지 내려왔다. 다만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여자라, 촌장의 아내는 위칸이 입은 옷과 그녀의 피부를 좀 더 자세히 보았다. 소녀는 덧옷을 입고 있었고, 그 덧옷 안쪽에는 목까지 오는 얇은 옷을 한 벌 더 껴입고 있었다.
그 덧옷의 만듦새가 굉장했다. 처음 보는 천으로 만든 거였는데 천이 두툼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덧붙여 박음질도 훌륭했고, 여기에 덧옷 가장자리에 놓인 자수는 이제껏 촌장의 아내가 본 자수 중에서 제일 뛰어난 솜씨의 자수였다.
이거 어디 유명한 장인이 품삯을 받고 만든 것이겠지? ... 아니 그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만든 건가? 그렇다면 굉장한데...
마을 사람들이라면, 1년에 한 번 있는 축제 때나 꺼내 입을 옷이었다. 이런 옷을 소녀는 마치 일상복처럼 입고 있었다.
소녀의 맨발도 눈에 띄었다. 지금이 초봄이기는 해도, 맨발로 다니기에는 추울 텐데...
그리고 어두운 밤에 화덕의 불빛에 의존해서 보니 정확한 판단은 아니겠지만, 위칸의 피부는 굉장히 좋은 것 같았다. 피부는 불빛을 받아 부옇게 빛났는데, 아주 희고 깨끗한 피부인 듯했다. 흠이 없는 피부.
그리고 하나 더. 지금 위칸은 세찬 비가 몰아치는 폭풍우를 뚫고 온 것인데, 그럼에도 비에 거의 젖지 않았다. 물론 머리카락과 입은 옷에 물기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흠뻑 젖어있어야 자연스러운 상황인데도 그렇지 않고, 그냥 물방울들이 머리카락과 옷에 살짝 맺혀있는 정도였다. 그 모습도 아주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분명히 사람인데,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느낌의 사람...
일렁거리는 화덕의 불빛을 잠시 응시하던 위칸 소녀는, 촌장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지켜달라고. 목숨을. 마을을. 그런데, 무엇으로부터?”
“...? 아아, 우리 마을의 뒤쪽 산에는 예로부터 늑대 왕이 살고 있습니다.”
촌장은 설명을 시작했다. 올해 초부터, 그 늑대 왕의 아들들 사이에 결투 의식이 시작됐다. 아들들은 모두 13명인데, 그중 한 명만 남을 때까지 의식이 계속된다. 그런데 그동안에 마을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하니, 부디 위칸의 권능으로 늑대 왕의 아들들에게서 우리들을 지켜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촌장의 설명을 들은 위칸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움직이는데 기척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정말 조용하게 사뿐사뿐 움직였다. 소녀 위칸은 다가가서 창문을 열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폭풍우의 빗줄기 사이로 마을을 내려누를 듯이 압도하는 높은 산이 보였다. 정말 높고 거대한 산이었다. 이렇게 창에서 올려다보니, 저 높은 산이 시야를 모두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산의 가장 위쪽은 고개를 한껏 젖혀야 간신히 눈에 들어왔다.
한밤의 산은 먹물같이 시커먼 외피를 두르고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산의 꼭대기에 파란 불빛이 이따금 번뜩이는 게 보였다.
“저 번개가 결투 의식이 시작되는 신호라고 합니다.”
촌장이 위칸의 등에 대고 말했다. 위칸은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고개를 뒤로 젖혀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가, 뒤로 슥 물러나며 창을 닫았다.
돌아선 위칸은 촌장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촌장은 이 행동의 의미를 몰라, 잠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위칸이 말했다.
“사례를.”
“... 아 참! 여보, 준비해 둔 그거 있지? 어서 드리도록 해.”
촌장이 말하자, 아내는 얼른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손으로 자신의 윗도리 안쪽을 더듬었다. 잠시 후 그녀는 품속에서 꺼낸 낡은 천 주머니를 위칸에게 내밀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은 거예요. 마을에서 내어줄 수 있는 것 중에, 제일 값나가는 거예요.”
위칸은 주머니 속의 물건을 자신의 왼손 손바닥 위에 떨어트렸다. 11개의 금화, 제법 커다란 흑요석의 원석, 그리고 마른 나뭇잎으로 싼 약제였다. 위칸이 이 ‘사례물’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촌장의 아내가 다시 말했다.
“그 약제는 도시 쪽에 가서 팔면 금화 20개 넘게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우리 마을에서만 만들 수 있는 만병 특효약이에요.”
위칸은 아내의 말에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고, 사례물 중에 금화 하나를 골라내어 촌장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말했다.
“가짜. 이것은.”
...? 가짜 금화라고? 촌장 부부가 서로 눈을 마주치는데, 위칸은 사례물들을 천 주머니 속에 넣은 다음 덧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촌장이 그녀의 뒤에 대고 물었다.
“어디 가시는 거죠?”
“허락.”
위칸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촌장에게 대답했다.
“인사. 머물게 해달라고. 늑대 왕에게. 요청을.”
말을 마친 후에 위칸은 문을 열었다. 문밖에 아까의 농도 짙은 안개가 주위를 에워싼 것이 보였다. 위칸은 그 안갯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조용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집 밖으로 걸어 나갔다.
걸어가는 위칸의 주위로 안개가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했으나 틀림없었다. 촌장은 작년에 보았던 유랑 극단의 마법 공연을 다시 떠올렸다. 그때와 거의 똑같이, 안개 덩어리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의지를 가지고 위칸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위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안개도 완전히 사라졌다. 안개가 사라진 순간에 빗소리도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안개가 소리를 차단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밤중에 안개를 몰고 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기묘한 소녀. 촌장 부부는 다소 넋이 나간 상태였다. 하지만 위칸이 보여준 여러 기이한 모습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촌장의 가족들 모두.
저 소녀는 전설의 위칸이 틀림없어. 부부는 확신했다.
촌장은 문득 자신이 위칸이 되돌려준 금화를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짜라고? 그는 손에 든 금화를 이로 세게 깨물어보았다. 순간 금화를 감싸고 있던 껍데기 같은 것이 살짝 벗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정말로 가짜 금화였구나.
그때 촌장의 아내는 위칸의 말을 떠올렸다. ‘늑대 왕’에게 인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늑대 왕이 사는 산꼭대기는 인간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일단 이 마을에서 숲이 시작되는 산 허리까지 가는데도 성인 남자 걸음으로 꼬박 하루 정도는 걸린다. 게다가 지금은 폭풍우가 치는 한밤중이다. 도대체 어떻게 가겠다는 거지?
폭풍우는 계속됐다.
그리고 그 어둠과 폭우를 뚫고, 하얀 안개의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