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죽음을 가져다줄 남자
안개의 덩어리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산의 능선을 올라갔다.
네 발 짐승이 사냥감을 쫓을 때를 연상시키는 속도였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한밤중, 잿빛 구름이 요동치는 하늘 아래에서 시커먼 어둠에 물든 산을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하얀 안개의 덩어리.
그렇게 안개의 덩어리는 흑단 호수가 있는 산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다다른 순간, 안개는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그런 후에 안개의 덩어리는 아주 천천히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개가 공기 중으로 사라지자, 위칸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 꼭대기에 닿을 듯한 높은 산 정상에 도착했는데, 소녀는 전혀 지치지 않아 보였다.
인간이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에, 인간이 내기 불가능한 속도로 도착했지만 체력을 써서 올라온 것은 아닌 듯했다.
안개가 물러가자, 소녀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온갖 나무로 빽빽하게 들어찬 숲은 어둡고, 고요했다.
산 정상에는 오히려 비가 내리지 않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별이 가득 보이는 맑은 밤하늘이었다.
다만 그 정적 속에 터질 듯 한 긴장감이 서려 있는 것을 소녀는 알 수 있었다. 이 긴장감은 전쟁이나, 혹은 목숨을 건 싸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인데...
소녀는 발을 옮겨, 먼발치에 보이는 바위 쪽을 향했다.
산 정상에 우뚝 솟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육중한 바위였다. 어두운 밤, 달빛조차도 삼킬 듯이 시커먼 색을 띤 거대한 바위가 산 꼭대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인간들이 사는 집을 7채가량 쌓아 올린 정도의 부피를 가진 바위였다.
여기에 중량감도 굉장한 것이 떨어져 서 있어도 보는 사람을 짓누를 것 같았다. 바로 눈앞에서 보면, 산 위에 또 다른 산 하나가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바위 앞에 다가서자, 소녀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바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순간, 바위의 윗부분, 하늘과 맞닿을 것 같은 바위 끄트머리 부근의 공중에 빛나는 하얀 실 같은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얀 실은 처음에는 가느다랬으나 점차 굵어졌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모양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 팔뚝만 한 굵기가 되었다. 물론 바위의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그 정도 굵기가 되어도 소녀에게는 바위 위쪽 공중에 떠 있는 가느다란 실뭉치로 보였다.
기이한 실뭉치는 중간 부분에 금이 가더니, 그 금이 벌어지면서 동그란 눈동자 같은 것이 생겨났다. 조금 지나서 그 옆부분에도 금이 가고 벌어지면서 눈동자가 보였다.
소녀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무언가는 바위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바위가 아니었다.
그는 이 숲을 다스리는, ‘늑대 왕’이었다.
그가 소녀의 기척에 눈을 뜬 것이다.
자신을 응시하는 ‘눈동자’를 향해,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인사드립니다. 왕, 늑대 왕, 흑단 호수, 그 숲의.”
하얀 실덩어리 속의 눈동자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녀와 신비한 눈동자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후 눈동자를 감싼 흰 실뭉치가 눈동자를 천천히 덮었다가 다시 천천히 드러냈다. 마치 눈을 감았다가 뜬 것 같았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머물러도... 좋다...”
땅을 울리는 듯한 묵직한 목소리였다.
“다만...”
무거운 목소리는 말을 이었다.
“... 의식이 끝날 때까지만...”
말이 끝나자 하얀 실뭉치는 연기가 흩어지는 듯한 모습으로 사라졌다.
보통 인간은 발도 들일 수 없는 신비의 숲. 그곳을 다스리는 왕에게 들어와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진 것이다.
기한을 정해주셨네. 소녀는 왕의 말을 기억했다.
이렇게 허락을 받은 후에 위칸 소녀는 발을 돌려, 아까 느낀 그 긴장감이 발산되었던 곳을 향하기 시작했다.
흑단 호수 숲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은 지형이 매우 험악했다. 일단 산비탈이 거의 직각으로 뻗어있어 서 있기조차 쉽지 않았고, 여기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날카로운 바위, 흙 위를 뒤덮은 빽빽한 풀들도 곳곳에서 진로를 방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한밤중이어서 온통 컴컴했다.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 어둠 속을, 아까의 안개 덩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안개는 조금 전 산을 올라올 때보다는 훨씬 옅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안개의 중심부에 위칸 소녀가 있었다. 이렇게 험악한 산에서도, 소녀는 걷는데 전혀 힘들어하지 않았다. 잘 다져진 평지 위를 걸어가듯이 아주 능숙하게 걷고 있었다.
걷는 도중에 무언가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숲을 뒤흔드는 듯한 격렬한 소리가 계속 들렸다. 여기에 땅이 흔들리는 듯한 진동도 함께 느껴졌다.
소리의 진원지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진동은 더 커졌고, 격한 소리도 귀를 찢을 듯이 커졌다.
마침내 소리의 진원지에 닿았다. 소녀는 멈춰 섰다가, 옆에 있는 나무 뒤쪽에 일단 몸을 숨겼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었다. 한 마리는 붉은색 털을, 다른 한 마리는 은빛 털을 가졌다.
털 색깔이 다른 이상으로 두 늑대의 덩치 차이가 확연했다. 은빛 털 늑대의 몸뚱이는 기껏 해봐야 인간 성인 남자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붉은 털 늑대 쪽은 대충 봐도 곰의 두 배 정도 되는 몸집을 갖고 있었다.
붉은 털 늑대는 몸집이 큰 만큼 타격도 강력했다. 이 늑대가 앞발을 한 번 휘두르면, 주위에 바람이 일었고 근처의 나무들이 우수수 흔들렸다. 그리고 붉은 털 늑대의 공격은 물리적인 힘도 굉장했지만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붉은 늑대는 그 큰 몸집을 무기처럼 휘두르면서 은빛 늑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일단은, 붉은 털 늑대 쪽이 지금 이 싸움에서 우세해 보였다.
그러나 은빛 털 늑대는 몸집이 작은 대신에 아주 재빨랐다. 민첩함만큼은 은빛 털 늑대 쪽이 몇 수 위로 보였다. 또 몸집이 작았기 때문에 오히려 붉은 털 늑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데는 더 유리했다. 목숨이 달린 상황이라서 그렇겠지만, 은빛 털 늑대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은빛 늑대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붉은 털 늑대의 공격을 계속해서 잘 피하고 있었다. 붉은 털 늑대의 험악한 공격은 연속해서 빗나갔다.
그러다가 은빛 늑대가 빈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 은빛 늑대가 붉은 털 늑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털 늑대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은빛 늑대가 이를 드러내 붉은 털 늑대의 목덜미로 박아 넣으려 했다.
붉은 털 늑대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따악! 상대의 목덜미 대신 허공을 물어버린 은빛 털 늑대의 이빨이 서로 맞부딪치며 허공으로 날카로운 소리를 울렸다.
위칸 소녀는 지금 늑대 왕의 여덟 번째 아들과 열세 번째 아들의 결투 의식을 보고 있었다. 오금이 저릴 만큼 무시무시하고, 그러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광경이었다.
감히 누구도 이 의식에 끼어들 수가 없을 것이다. 끼어드는 순간, 흥분한 저 두 늑대 중 하나가 몸뚱이를 찢어버릴 테니까.
소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의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소녀는 은연중에, 은빛 털 늑대 쪽을 응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응원은 먹히지 않은 듯했다. 엎치락뒤치락 험악하게 싸우던 두 마리 중 붉은 털 늑대가 은빛 털 늑대의 어깨를 물었다.
은빛 털 늑대가 숲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섬뜩한 비명이었다. 소녀는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곧 반전이 일어났다. 기세 좋게 자신의 어깨를 물고 있는 붉은 털 늑대의 목덜미로 은빛 털 늑대가 앞발을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내려쳐 찢어버렸다!
공격이 제대로 먹혔다. 붉은 털 늑대는 움찔하더니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아주 천천히 몸을 늘어트렸다.
죽은 것이다.
폭풍우가 치는 보름달 밤에 벌어진 첫 번째 결투 의식은, 은빛 털 늑대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살아남은 은빛 털 늑대의 상태도 그리 멀쩡하지는 않았다. 은빛 털 늑대는 숨이 끊어진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어깨를 물고 있는 붉은 털 늑대의 주둥이를 애써 벌리게 해서 겨우 어깨를 빼냈다. 그런 후에 비틀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크게 다쳤다는 걸 먼발치에서도 알 수 있었다. 몸 곳곳에 입은 상처, 그리고 왼쪽 어깨에 입은 치명상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빽빽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희뿌연 빛줄기 아래에서, 은빛 털 늑대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찬찬히 모습을 바꾼 은빛 털 늑대는 어느 순간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은빛 털 늑대는 라이칸스로프였다.
하지만 늑대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어도, 같은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늑대 모습일 때와 똑같은 빛깔을 가진 소년의 머리카락이 햇빛 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빛 머리카락의 소년은 한껏 힘을 짜내어 한발 한발 비틀대면서 걷고 있었다. 그러나 힘겨운 듯했다. 부상이 심각한 상태니까 당연할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결국 소년은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채로 미동이 없었다.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소녀는 나무 뒤에서 나와 은빛 머리카락의 소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더욱 아름다운 은발이었다. 햇살이 비추자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고급스러운 실 같았다. 그리고 은발 끄트머리는 시안색으로 바뀌었다.
정말 희귀한 색이네. 소녀는 라이칸스로프 소년의 머리카락을 살짝 만지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꾸었던 꿈을 다시 떠올렸다.
‘은빛 머리카락... 끄트머리 부분은 새파랗게 빛나는... 이제 눈동자 색만 확인하면 돼.’
소년의 부상은 심각했지만, 위칸에게는 능히 치료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소녀는 특효약을 꺼내 발라준 후, 이전에 지내던 곳에서 가져온 마른풀로 상처를 감아주었다.
치료가 끝나고 잠시 시간이 지났다. 소년이 몸을 살짝 떨더니, 눈을 떴다.
눈을 뜬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가 위칸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머리카락 끝부분의 푸르스름한 색과 동일한 밝게 빛나는 시안색 눈동자...
이 소년이군. 위칸 소녀는 생각했다.
‘내 삶에 죽음을 가져다줄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