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5화 죽음, 그리고 검은손

by 태수련

루이는 ‘둥근 빛의 고리’를 보았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그녀는 루이에게 이 숲에 전해 내려오는 많은 전설들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들은 전설들 중에 하나가 이 흑단 호수 숲에 들어온 어느 인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인간이 의도하지 않게 이 숲에 들어오게 되었다. 흑단 숲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그 인간은 숲의 압도적인 무서움 앞에 겁에 질렸고 결국 죽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그때 나타난 신비한 존재에게서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고, 그 뒤에는 구사일생으로 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존재’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무언가였고, 존재의 머리 뒤쪽에는 둥그렇게 빛나는 고리 같은 것이 보였다고 했다.

루이는 그 전설 속에서 언급된 ‘고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사람의 머리 뒤쪽에서 빛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리는 은은한 금속 같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루이는 그 빛의 고리를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세게 흔들어 정신을 추슬렀다. 그런 다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한번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관찰해야겠어. 루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빛의 고리’는 역시 루이가 잘못 본 거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보니, 이 사람의 머리 뒤쪽에 그런 것은 없었다. 눈앞의 사람은 그냥 평범한 인간이었다. 인간 종족 소녀.

다만 바로 그 점이 의아스러웠다. 인간이 이 숲에, 그것도 흑단 호수가 지척에 있는 숲의 중심부까지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숲 가장자리까지 들어온 사람은 본 적이 있지만 그런 경우조차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숲에 발을 들인 인간들도 대부분 죽거나, 혹은 공포에 미쳐 도망치거나 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신체도 정신도 아주 온전해 보였다. 두려운 감정도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소녀는 침착한 모습으로 루이와 마주 보고 풀밭에 앉아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소녀였다. 루이는 숲 아래쪽 마을 사람들의 체취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녀의 체취는 난생처음 맡아보는 것이었다. 즉 흑단 숲 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더 먼 외지에서 온 인간이라는 것인데. 하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루이는 소녀를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체구는 아까 루이가 쓰러져 눈을 감은 상태에서 파악한 그대로였다. 키는 루이와 마주 보고 선다면 루이보다 다소 작을 듯했고, 몸집은 자그마하면서 마른 편이었다.

다만 나이는 가늠하는 게 어려웠다. 15세 전후라고 생각했고, 눈을 뜨고 살펴보니 확실히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소녀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새카만 머리카락이었다. 길고 풍성하며, 군청색이 살짝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이 허리께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찰랑거리면서 윤기가 흐르는 멋진 머리카락을 보면서, 루이는 명마의 갈기를 떠올렸다.

소녀가 입고 있는 옷도 눈에 띄었다. 루이는 인간들이 입는 옷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옷을 비롯해서 인간 종족들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을 혐오했다.

루이의 어머니는 생전에 언제나 근사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어머니의 옷은 늑대 왕이 하사한 것으로, 만듦새가 인간 종족들이 걸치는 옷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멋진 옷을 보면서 자란 루이가 가끔씩 보게 되는 인간들의 옷은 추레한 헝겊 조각으로 보였다. 낡고, 너덜너덜하고, 흙과 검댕이 묻어 있는 천 쪼가리.

게다가 그 너절한 천 쪼가리를 두고 서로 네 것 내 것 하면서 싸우기도 한다고 들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들은 그 천 쪼가리를 걸치지 않고서는 집 밖에 나오지 못한다는 규칙도 만들어서 지킨다고 했다. 루이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이 내려준 아름다운 몸뚱이를, 잘 만들지도 못한 허접한 천으로 가리는데 목을 매는 종족은 루이가 아는 한 인간들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루이의 눈에도 지금 소녀가 입은 옷은 상당히 괜찮아 보였다. 인간들이 만든 옷 중에서 그래도 제법 잘 만든 옷이군. 루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옷을 관찰한 후에, 루이는 이제 소녀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루이는 이 소녀의 눈동자에서 흑단 호수가 가장 어두울 때 보여주는 색깔이 떠올랐다. 흑진주 같은 눈이었다. 아주 새카만 눈동자여서 홍채와 동공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검은 눈동자와 대조되는 흰 피부도 눈에 띄었다. 눈동자가 흑단 호수의 물 색깔을 연상시킨다면, 피부는 호수의 포말을 연상시켰다.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포말 같은 피부.

루이는 소녀를 바라보는 동안에 자신의 명치가 저릿하다는 것을 문득 느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긴장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이러는 거지?

루이가 그렇게 소녀를 살펴보는 동안, 소녀 역시 눈동자를 루이에게 향한 채로 유심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관찰은 끝났다. 결국 루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누구야, 너?”

루이의 질문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고도 그윽했다.

“죽음.”

“... 뭐라고?”

“죽음... 아주 이른... 죽음. 손 발도 채 갖추지 못한...”

“무슨 소리야? 너 누구냐고?”

“둘러싼... 빙그르르... 검은 손들... 순간에, 마지막의...”

“무슨 엉뚱한 소리야?!!... 도대체 누구야, 처음 보는데... 인간이야?”

“감당해야만 하는... 슬프지만...”

... 뭐야, 이 여자 천치인가?

그런 생각이 든 루이는 다시 한번 소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소녀가 천치는 아닌 게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눈동자가 반짝거리는 것에서 소녀가 명민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아, 그거구나. 이 여자, 흑단 호수 숲 가장 깊은 곳에 들어오면서 무서워서 정신이 나가버린 거로군... 그게 아니면 아버지의 ‘벌’을 받은 거야.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저 인간 소녀가 이 높고도 깊은 숲까지 다다른 것인지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어쨌건 간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거 같으니 내가 단번에 물어 죽여주지.

그게 너한테는 더 자비로울 거야. 저렇게 정신이 나간 상태로 다니다가 다른 형들의 눈에 띄는 것보다는.

그런 생각을 한 루이가 몸을 일으키면서 이를 드러내려고 할 때, 소녀가 한 마디를 던졌다.

“받았어, 허락을.”

“뭐?”

“왕께. 받았어. 머물러도. 끝날 때까지. 의식이.”

괴상한 말투였지만, 재밌게도 알아듣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루이는 소녀의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가... 저 소녀가 이 숲에서 지내도 좋다는 허락을 내렸다고? 인간 종족을 너저분한 벌레 취급하는 아버지가?

바로 얼마 전에 힘겨운 결투 의식을 벌인 데다가, 낯선 소녀, 그것도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녀가 갑자기 등장한 상황에 루이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런 루이 앞에서, 소녀는 사뿐하게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흑단 호수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때 루이는 아까 쓰러졌던 상태에서 느꼈던 안개가 다시 땅 위로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지금 나타난 안개는 밀도는 아까보다 옅었지만 근방을 메우듯이 몸집을 키우더니, 소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평범한 인간이 아니군. 루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렇게 걸어가는 소녀의 등뒤로 루이가 소리쳤다.

“너, 이름은?!!”

“마레네.”

소녀가 냉큼 대답했다. 목소리가 안개를 지나면서 살짝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 마지막. 가장.”

이름을 알려준 소녀는 숲의 나무들 사이로 스르륵 사라졌다.

안개도 사라졌다. 넋을 놓고 그 모습을 보던 루이는, 문득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상처가 놀라운 속도로 아물어 붙고 있었다. 다 아물 때까지는 약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라면 달그림자 신의 은총을 청할 필요는 없을 거 같다.

저 기이한 소녀가 이렇게 해준 건가? 굉장하다... 입은 옷도 그렇고, 인간인데 상당히 쓸만한 재주를 갖고 있군. 그런데 저 소녀의 말투는 어째서...

그때 갑자기 루이는 오한을 느꼈다. 소녀가 한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둘러싼... 빙그르르... 검은 손들...’

검은 손들.

저 애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걸까?

어머니를 데리고 가버린, 그 ‘손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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