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붉은 구슬을 삼키다
호수 근처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호수의 물은 오늘도 변함없이 묵직한 검은빛을 발하며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흑단黑檀’ 호수라는 이름은 호수의 물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어둡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렇다고 오염된 물도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호수의 물을 떠올리면 새벽이슬 이상으로 맑고 깨끗하며, 향기롭기까지 한 물이었다.
호수의 물빛이 어두운 것은, 신비로운 힘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호수의 물결 아래, 달그림자 신을 비롯해 온갖 두렵고도 강력한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거주했다.
그런 호수였기 때문에, 일렁거리는 얕은 물결조차 강렬한 권능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루이는 호수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고개를 돌려 네 클라프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마레네를 보았다.
마레네는 지금, 뭔가 아주 기이한 행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 풀밭 위에 돌멩이 같은 것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는 듯했다. 그걸 다 마치자 몸을 곧추세우더니 하늘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 후에는 무언가 이것저것 원 안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늘어놓는 것들은 숲에서 주워 온 것인듯했다. 나뭇잎, 돌멩이, 새의 깃털, 그리고 거미줄 뭉치 같은 것들... 숲에 흔하게 굴러다니는 별 볼 일 없는 잡동사니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레네에게는 이 잡동사니들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았다. 하나하나 금붙이를 다루듯이 아주 소중하게 내려놓았다. 그렇게 다 늘어놓고서, 마레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꺼낸 물건이 달빛에 반짝거렸는데, 루이는 빼어난 시력으로 그것이 대략 한 슈판네 정도 길이의 작은 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호신용 무기로 보기엔 어려운 칼이었다. 일단 매우 낡았고, 칼날 쪽의 이가 다 나간 것이 루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 칼로 뭔가를 공격하려는 게 아니라 이 의식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듯했다.
칼을 손에 쥐고 품에 바싹 끌어다 잠시 숨을 고르던 마레네는, 루이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소리 없이 다가왔다.
루이의 코앞에 서자, 마레네는 그녀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루이. 치를. 의식으로. 지금부터...”
루이는 지금은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마주 보고 서자, 루이는 마레네의 키가 자신의 눈 정도까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은 숲에 사는 산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따뜻하고 유연하고 작은 몸. 그 몸이 루이의 눈앞에서 천천히 숨을 쉬고 있었다.
루이는 조금 전 마레네를 등에 태우고 이곳까지 달려오던 순간을 떠올렸다. 흑단 호수로 돌아가려고 하는 루이에게 자신을 태워달라고 마레네가 부탁했다. 부탁을 들어줄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루이는 그렇게 했다. 늑대 모습인 상태에서 그녀를 등에 태우고 호수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그때 자신의 등에 착 달라붙은 작고 가벼운 몸뚱이. 따뜻하고 말랑하고, 새벽 풀향기를 계속 맡을 수 있었는데...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뭔가 몸에서 열이 오르는 듯한데, 그 열기를 루이는 애써 외면했다. 루이는 자신의 눈앞에 바싹 다가서 있는 마레네를 두고 눈을 피했다. 그런 루이에게 마레네가 그녀 특유의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영약을. 싸워. 다음번. 의식에서. 결투. 이길 수. 높여줄. 네. 영력을.”
... 오호, 그래? 그런 거라면 빨리 내놓으라고.
그때 문득, 루이는 생각난 게 있었다. 인간 사회를 비롯해서, 흑단 호수 숲에서도 적용되는 ‘규칙’이 떠올랐다. 그것은 무언가를 받았으면 거기에 걸맞은 대가를 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상한 여자가 그렇게 굉장한 것을 지금 나한테 준다는 건,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거 아니야? 그 생각이 떠오른 루이는 마레네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대가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해치지. 인간을. 말아줘. 우선.”
루이는 코웃음을 쳤다. 산 아래쪽에 모여 사는 너저분한 그 종족들. 땅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보다 더 하찮은 그 종족을 도대체 왜 잡아먹으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내 영력을 높일 뭔가 값나가는 걸 주겠다면, 뭐 그놈들을 잡아먹는 건 당분간 참아주지.
“그래 알았어. 그리고 또 뭘 바라.”
“하지. 가까이. 말아줘.”
마레네가 말했다.
“여자. 다른. 나. 말고는.”
...? 이건 무슨 소리인가? 루이는 방금 들은 말이 잠시 이해가 되지 않아, 마레네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가운데 마레네의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는 게 보였다.
“바라봐 줘. 하나만. 나...”
루이는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계집애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하나만 바라보라고? 어, 무슨 우두머리 취급해 달라는 건가? 그리고 난 네 부하가 되고?
루이가 마레네의 알다가도 모를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고자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동안, 마레네는 아까 그 원으로 다시 갔다. 원의 중심에 선 마레네는, 서서 몸을 곧추세우더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서서히 팔을 뻗어 아까 손에 쥐었던 작은 칼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런 후에, 오른손에 든 그 칼로 자신의 왼쪽 손목을 찔렀다.
...!! 루이가 깜짝 놀라 마레네를 보는데, 마레네의 왼쪽 손목 상처에서 무언가 빛나는 조그만 방울 같은 것이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방울은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붉은빛이었다. 그런 방울이 삽시간에 아주 많이 상처에서 흘러나오더니 공중에 떴다가 마레네의 몸 주위를 순식간에 빙 둘러쌌다. 그리고 제각각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어두운 밤, 달빛만이 유일한 광원인 어두운 숲 속.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반딧불들이 마레네의 몸 주위에 모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빛의 방울들이 이번에는 길게 궤적을 남기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에 그림을 그린 것처럼 방울들은 재빨리 움직이더니 이제는 가느다랗고 길면서 빛이 나는 선들이 되었다.
빛나는 붉은 선들은 마레네의 몸 전체를 에워쌌다. 선들은 불규칙한 모양으로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면서, 정교한 그물이 마레네를 에워싼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붉은빛을 내고, 마레네가 숨을 쉴 때마다 같이 약동하는 그물.
꼭 인간 몸의 핏줄 같아. 루이는 생각했다.
이 시점에서 마레네는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루이는 처음 듣는 거였지만, 그것은 주문이었다. 이 주술을 절정으로 이끌고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한 주문.
주문이 시작되자, 붉게 빛나는 허공의 그물은 마레네의 눈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 점을 향해 선이 모이고 점이 커지고, 또 다른 선이 모여들어서 그 점이 더 커지더니...
마레네가 주문을 마친 순간, 모든 선들이 한 점에 모였다. 이제 아까의 그물 모양은 사라졌고, 마레네의 눈앞 허공에 둥실 뜬 붉은빛의 점 하나로 변했다.
공중에 둥둥 뜬 붉은빛의 점-지금은 구슬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은 진주 정도 크기였다. 붉은 구슬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공중에서 빙글빙글 돌며 빛을 사방에 뿌리고 있었다.
그 구슬을 향해, 마레네는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리더니 다시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것이 신호인 듯, 붉은빛의 구슬은 쏜살같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더니 루이의 코앞에 닿았다.
루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붉은빛을 발하는 구슬을 바라보는데, 마레네가 소리쳤다.
“먹어.”
... 왠지 거역할 수 없는 말이었다. 루이는 입을 열었는데, 그 순간 붉은빛 구슬은 루이의 입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가 잠시 의식을 잃었다.
루이는 금방 정신을 차렸다. 쓰러지지는 않았다. 다만, 가슴이 엄청나게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평소와는 몸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달랐다. 물론 늑대 왕의 아들로 태어나 받은 신체는 이미 강인했지만, 붉은 구슬을 삼킨 지금은, 뭐랄까 큰형인 검은 털 늑대와도 맞붙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도대체 이게 다 뭐지? 흑단 호수 숲에서 온갖 신비롭고 무서운 존재들과 어울려 자랐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너,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이야?
의문에 가득 찬 루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루이는 마레네가 바닥에 쓰러진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