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9화 고통을 공유하다

by 태수련

루이는 지금 눈앞의 광경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까의 박력이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지금 마레네는 마치 시체처럼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면, 마치 헝겊 조각이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루이는 이 흑단 숲에서 태어났다. 늑대 왕에게 제물로 바쳐진 인간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루이에게는 이 숲에서 본 존재들이 거의 전부였다.

그런 루이에게 인간들의 생각이라든가 흔히 하는 행동들을 어머니가 알려주기는 했었다. 그러나 루이가 늘 신경 써야만 했던 것은 이 숲에 사는 존재들이었다. 여러 동물을 비롯해, 달그림자 신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 유령들, 기괴한 괴물들, 때로 존재를 드러내고 말을 거는 무생물들.

그리고 사나운 형들과 무시무시한 아버지.

그런 이유로, 루이가 인간 종족에게 가진 감정은 아주 최소한의 관심, 그리고 혐오가 전부였다.

일전에 마레네가 흑단 호수로 들어갔을 때 곧장 뛰어든 것은, 흑단 호수가 워낙 무서운 곳이라는 걸 어렸을 때 경험했던 루이의 신체가 반사적으로 움직인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저 소녀가 왜 쓰러진 것인지, 소녀가 위급한 것인지, 그리고 혹시 위급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 아무튼 인간 여자잖아. 내 어머니도 아주 나약한 신체를 가졌었지. 이 숲은 머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기력을 갉아먹는다고 했었어. 저 인간 여자도 지금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한데, 들여다보기나 할까.

그런 생각이 든 루이는 찬찬히 쓰러진 마레네에게 다가갔다. 가서 들여다보니, 마레네는 아주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원래의 핑크빛이 살짝 도는 흰 피부가 지금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고, 숨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아주 힘겨운 일을 하다가 지쳐 쓰러진 것처럼 보였고, 전반적인 기력도 아주 내려가 있었다.

... 아까 그 이상한 의식이 체력을 엄청나게 잡아먹은 거 같은데. 루이는 쓰러진 채 가쁜 숨을 쉬는 마레네를 내려다보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루이는 그러다가, 잠시 뒤 몸을 일으켜 돌아선 다음 자신의 영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알게 뭐야.’

루이는 생각했다. 저 계집애, 난 도와달라고 한 적 없는데 마음대로 한 일 아니야. 그렇다면 뒷감당은 알아서 하라고. 뭔가 여러 가지 재주가 많은 거 같던데, 자기 몸 정도야 알아서 추스르겠지.

그렇게 걸어가는데, 루이는 문득 자신의 왼쪽 손목이 욱신거린다는 걸 느꼈다. 어라, 모르는 사이에 다친 건가? 루이는 재빨리 손목을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상처도 없었고 아주 멀끔했다. 하지만 통증은 분명히 느껴졌다.

그때 갑자기, 루이는 아까 의식 도중에 마레네가 자신의 손목을 그 짧은 칼로 찌르던 광경이 떠올랐다. 그때 마레네는 왼쪽 손목을 찔렀다.

루이는 뒤돌아서, 재빨리 마레네에게 다시 다가갔다. 아까 쓰러진 상태 그대로인 마레네를 루이가 잡고 일으켰다. 마레네는 몸을 일으키는 듯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루이의 가슴팍에 쓰러졌다.

...... 거 참 들이대는 거 좋아하는 계집이네. 짜증이 난 루이는 마레네를 밀어낼까 했지만, 짜증을 누르고 그녀에게 물었다.

“너 아까 그 이상한 의식... 나한테 무슨 짓 한 거야?”

“... 높이는. 영력을. 네. 피의. 내. 구슬...”

“그런데, 왜 지금 내 손목이 아픈 거야?”

“... 나하고. 되어있어서...”

“뭐가 됐다는 거야?!!”

“... 연결.”

마레네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가냘프게 대답했다.

“나하고. 되었어. 연결이. 그래서. 쓸 수 있어. 네가. 힘을. 내 힘을. 다만...”

“다만, 뭐?!”

“서로의. 같이. 고통도. 느끼게 돼.”

루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계집애가 다치면 나도 그 통증을 느끼게 된다는 거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잠깐, 그렇다면 앞으로 있을 결투 의식에서 내가 다치면 이 계집애도 그 고통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건가?

그 생각이 떠오른 루이는 놀란 눈으로 마레네의 얼굴을 보았는데, 마레네가 고개를 살짝 끄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루이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결투 의식은 참혹하다. 몇 군데 찢어져 나가거나 뼈가 부서지는 일도 예사다. 앞으로 그런 무서운 일을 치르게 될 나와, 고통을 같이 느끼게 됐다고?!

마레네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았다. 루이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왜 이 소녀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지, 아 그러니까 어머니가 생전에 해준 이야기 중에 있었는데...

“... 너, 무슨 속셈이야?”

차가운 말투로 묻는 루이의 목소리에, 마레네는 고개를 살짝 들어 루이의 눈을 보았다. 마레네의 눈빛이 무슨 말이야 하고 묻고 있었다. 루이는 냉정하게 말했다.

“... 너 혹시 내가 늑대 왕이 되었을 때, 신부新婦가 되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마레네의 가느다란 눈썹이 살짝 찌푸려지는 게 루이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는 계속 말했다.

“너 아까 나 하나만 봐달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늑대 왕의 신부가 되고 싶어서 그런 거지, 그렇지?”

마레네는 대답하지 않고, 루이의 눈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역시 그거군. 루이는 혀를 찼다. 루이는 인간 여자들의 권력욕에 대해 어머니한테 들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재물과 지위, 그리고 질투에 미쳐 눈이 뒤집힌 인간 암컷들.

루이의 어머니는 마을 제일 가는 미인이었다. 바로 그 미모 때문에, 어머니는 여러 가지 부당한 일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녀가 성인이 된 후, 늑대 왕에게 바쳐질 제물로 선택되었을 때도 다른 마을 여자들이 난리를 쳤다고 했다.

늑대 왕의 제물이 된 여자가 반드시 겪을 결말을 잘 알면서도.

그러니까 이 계집애, 자꾸 나한테 엉겨 붙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게 다 계획이 있었던 거였어. 인간 여자치고는 아주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인간은 인간이니까. 동물들 중에서 제일 타락한.

루이는 거칠게 마레네를 밀어내고, 그녀에게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물론 내가 다음번 늑대 왕이 되겠지만, 널 신부로 맞이할 일은 없어! 너저분한 인간 종족과 연을 맺거나 하지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내가 늑대 왕이 되면...”

루이는 매서운 말투로 덧붙였다.

“산 아래쪽 인간 마을은 몽땅 전멸시킬 꺼야!!”

... 어머니를 괴롭힌 놈들을 향한 복수다. 루이는 이 말은 마음 속으로 했다.

마레네는 가만히 루이를 바라보았다. 루이도 그녀를 바라보는데, 마레네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늑대 왕은. 다음 번. 가졌어. 검은 털.”

“뭐?!!”

루이는 화들짝 놀랐다. 지금 이 계집애가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다음 늑대 왕은... 그러니까 첫째 형이 될 거라고?!

마레네가 어떻게 다음번 늑대 왕이 될 아들의 털 색깔을 저렇게 확신해서 말하는 건지, 그리고 저 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루이를 당황하게 했다. 무엇보다, 마레네의 저 말은 자신이 결투 의식에서 질 거란 예언 아닌가!!

루이는 이 해를 넘기기 전에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말에는 힘이 있다. 방금 마레네가 한 말은 루이의 불안한 감정을 제대로 건드렸다. 루이는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다그치기 위해 마레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레네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마치 땅속에서 솟아 나오는 듯한 기세로 순식간에 짙은 안개가 생겨나더니 마레네를 감싸버렸다. 마치 수증기의 벽 같은 밀도 높은 안개였다. 루이가 멈춰서서 안개를 바라보는 동안, 마레네를 완전히 감싸버린 안개는 어느 순간 옅어지더니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그리고, 마레네는 사라졌다.

루이는 어둠이 내려온 숲을 둘러보았다. 마레네를 찾았지만, 냄새도 움직임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왼쪽 손목의 고통은 여전했다. 그리고, 루이는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물론 루이는 지금 울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이 흐르는 듯한 감각은 그 뒤로 한동안 계속됐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