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차가운 안개에 붙들린 루이
... 안으라고?
루이는 방금 마레네가 한 말을,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날더러 너를, 안으라고?
루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마레네를 보고 있었다. 하얀 안개에 싸인 채 호수 물속에 몸을 담근 채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훑어내리고 있는 그녀 역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만 다른 쪽을 보고 있을 뿐, 지금 그녀의 신경은 루이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루이의 눈에, 지금 그녀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루이는 늑대 왕과 인간 여성과의 혼혈이고, 자란 과정이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들하고는 달랐다. 그래서 루이는 다소 둔감하고 인간들의 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특히 여자들의 언행은 더욱.
하지만 그렇다고 루이가 지금 마레네가 한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안으라는 건 그러니까, 포옹해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저기 그, 그러니까...
루이는 침묵 속에서 어머니가 생전에 가르쳐준 것들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자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루이는 재빨리 마레네에게 말을 던졌다.
“어머니한테 듣기로, 인간들 중에 이런 일 해주고 돈 받는 여자들이 있다던데...
너... 그 뭐라더라.”
루이는 조금 뒤에야 그 단어가 떠올랐다.
“아 그래, 너 창녀야?”
머리카락을 훑어내리던 마레네의 손이 순간 정지했다. 그대로 마레네는 굳어버렸다.
마레네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한참 그 자세 그대로 있었다. 풍경 속에서 그녀 혼자 정지한 것 같았다. 그녀의 주위에서 느린 생물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안개와 물결이 왠지 긴장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마레네의 그 모습을 본 루이는 씩 웃음을 지었다. 맞는 모양이네. 내가 정곡을 찔렀군.
바로 그때, 마레네 주위를 맴돌던 안개 덩어리들이 빠른 속도로 짙어지는 것이 루이의 눈에 들어왔다. 얇은 천처럼 너울거리던 안개들이 갑작스럽게 밀도가 높아지더니 순식간에 마레네의 주위에 두꺼운 막을 씌운 듯이 시야를 차단했다. 안개 너머의 마레네, 그리고 호수를 비롯한 이곳 주위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풍경의 변화에 루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긴장한 순간, 그 안개의 덩어리들이 루이를 향해 ‘날아오기’ 시작했다.
독수리가 먹이를 쫓을 때를 연상시키는 맹렬한 속도였다. 루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 몹시 당황했다. 너무 당황했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을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날아온 안개 덩어리들이 삽시간에 루이를 감싸버렸다.
루이는 농밀한 안갯속에서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이 안개의 덩어리들은 ‘무게’조차 굉장해서, 루이는 습기로 이루어진 바위에 붙들린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겨우 안개이지만,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무서운 안개였다.
아니 늑대 왕의 아들인 나를 찰나에 이렇게 만들다니...?
루이는 짐승들을 상대로 한 다툼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안개가 적의를 품고 덤벼드는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반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루이가 하얀 막 속에서 팔다리도 제대로 못 움직이고 당황하는 와중에, 이제는 안개의 기온이 아주 차갑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이를 에워싼 안개가 늦가을에 내리는 눈처럼, 아니 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의 얼음처럼 무시무시하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장난 아닌 냉기였다. 어찌나 차가운지, 루이는 안개에 붙들린 팔과 다리가 동상에 걸리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런 초봄에 동상을 걱정하다니! 그 정도로 삽시간에 기온이 한도 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루이는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개의 냉기를 버텨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두툼한 털가죽을 갖춘 늑대 모습으로 변해야겠어! 루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모습을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변신이 되지 않았다. 지금 흑단 호수 숲 속에 있는 상황인데, 그런데도 의지로 모습을 바꿀 수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야 루이는 알아차렸다.
창녀라는 말... 인간한테는 욕설이나 마찬가지인 말인가 봐...
루이를 ‘묶어버린’ 안개의 덩어리는 멈추지 않고 기온을 계속 떨어트렸다. 루이는 이대로 있다가는 뼈와 내장까지 얼어붙겠다는 직감을 받았다. 결국 루이는 한껏 목소리를 쥐어짜, 마레네에게 소리쳤다.
“취... 취소할게!!”
그 말을 기다린 듯, 한없이 내려가던 안개의 기온이 하강을 멈춘 듯했다. 루이는 다시 목소리를 쥐어짜 말했다.
“미... 미... 미안해...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쁜 말인지 몰랐다고...”
그 말에 짙은 안개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루이는 자신을 붙들어 맨 안개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개는 밀도가 옅어졌고, 동시에 루이의 신체도 조금씩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안개는 스르륵 사방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옅어진 안개가 커튼처럼 양옆으로 갈라지는 사이로 마레네가 서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얇은 천 같은 것을 몸에 두르고 어깨만 드러낸 상태였다. 루이는 켁켁 기침을 뱉으면서 그런 마레네를 보았는데, 그녀의 눈이 노기를 띤 것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는 어린 시절에 위험한 장난을 쳤다가 어머니의 노여움을 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눈 하고 비슷하다.
루이는 움찔거리면서 마레네에게 말했다.
“화가... 풀린 거야?”
마레네는 말없이 루이를 내려다보다가, 살짝 한숨을 쉰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루이는 그런 마레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지척에서, 루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그러니까... 내가 널 안... 으면... 나한테 힘을 줄 수 있다는 거야?
앞으로 있을 결투 의식에서 형들을 모조리 이겨버릴 수 있는 힘을?”
루이는 애타는 심정으로 물어보았는데, 마레네가 고개를 천천히 젓는 것이 보였다.
루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널 안으면... 나한테 힘을 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마레네가 입을 열었다.
“너에게, 준, 내가, 붉은, 구슬, 이외에는, 나 역시, 너 해줄, 없어. 수 있는 건.”
루이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아니 그렇다면 아까의 말은 무슨 뜻이지?
일전에 루이가 삼킨 기묘한 핏빛 구슬은 마레네가 루이를 강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무언가였다. 하지만 결투 의식에서 살아남으려면 자신을 안으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힘을 키워주는 건 아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혼란스러워하는 루이에게 마레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구할 수, 너한테, 내가, 안기면, 있어, 너를...”
잠시 적막이 흐르고, 루이는 마레네에게 말했다.
“싫어.”
마레네의 검은 눈동자가 루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루이는 말했다.
“네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난 어차피 의식에서 질 텐데, 죽기 전에 남자로서 잠깐 즐거운 시간이라도 보내고 위안을 얻으라는 얘기지. 그렇지?”
마레네의 얼굴이 굳어버리는 것이 루이의 눈에 들어왔다. 루이는 서글픈 심정이 들었다.
루이는 일어서서 마레네에게서 등을 돌리고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마레네에게 한마디 말을 던졌다.
“마음은 고마워.”
루이는 늑대 모습으로 변신한 다음, 자기 영역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 루이의 등 뒤로 마레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그게...”
그 뒤로 마레네가 뭐라고 말을 계속하는 듯 했지만, 루이는 더 듣지 않고 내달려 숲의 보금자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