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16화 되살릴 수 있을까

by 태수련

마레네가 가진 능력은, 정말이지 상상 이상이었다.

루이는 풀숲에 숨을 죽이고 숨어서, 큰형의 눈앞에서 마레네가 펼쳐 보인 놀라운 광경-저게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주술, 마법 뭐 그런 거 아니겠는가-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사실, 루이는 자신이 본 광경에 압도당했다.

신기한 재주가 많은 계집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지만 유령들의 정혼 의식을 저렇게 어려움 없이 치를 수 있다니 그건 정말로 경이로웠다. 게다가 유령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는데!

루이는 아주 어릴 적에 아버지가 정혼 의식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때 늑대 왕이 펼쳐 보인 의식 역시 지금까지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런데 그때 느꼈던 충격을, 바로 지금 눈앞에서 조그만 인간 여자 하나가 재현해 준 것이다.

그렇게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 루이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지금 까마귀의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인 큰 형은 마레네와 무언가 말을 주고받았다. 뭐 별 대수로운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루이가 거슬리는 부분은 큰 형이 마레네를 대하는 태도였다.

늑대 왕과 그 아들들 모두가 그렇지만, 큰 형은 인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니 사실 인간 종족에게 관심도 거의 없었고, 기껏해야 먹잇감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검은 털 늑대는 지금 마레네를 아주 정중하게 대하고 있었다. 검은 털 늑대에게 마레네의 숨통을 끊는 것은 벌레 한 마리를 잡는 것만큼 쉽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뭐랄까 자신과 동등한 존재를 대하는 듯한 언행을 보이고 있었다.

저 사나운 큰 형이 인간을 저렇게 대하는 건 정말이지 처음 본다. 왜 저러는 거지... 설마?!

혹시, 마레네가 마음에 든 건가?

늑대 왕의 아들들은 어떤 존재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잖아... 혹시?

... 안 돼.

그럼 안된다고. 큰 형이 마레네를 마음에 두거나 한다면...

그 생각이 떠오르자, 루이는 고개를 크게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그때 큰 형은 몸을 일으켰다. 워낙에 거대한 몸집이어서, 일어서는 순간에 주위의 대기까지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일어선 큰 형은 마레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다음, 숲의 자기 영역으로 걸어갔다. 한 발짝 씩 걸을 때마다 땅이 쿵쿵 울렸다.

... 세상에, 큰 형이 인사까지 하다니...

정말로, 요즘 루이는 자신의 상식이 기둥부터 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날 밤, 루이는 꿈을 꾸었다.

루이는 흑단 호수 근처에 있었다. 밤이었다. 호수의 물은 유난히 시커멓게 일렁거렸다.

루이는 늑대 모습을 한 채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엄청난 양의 피였다. 마치 폭포수처럼 많은 피가 상처에서 흘러내렸다.

어둠에 물든 흑단 호수 근방의 풀밭에 시뻘건 피가 흥건했다.

그러나 이 순간에 기이하게도... 고통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 갸우뚱하며 고개를 든 루이의 눈에 안개가 보였다.

짙은 안개.

커튼처럼 일렁거리는 안개 깊숙한 곳에 마레네가 있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무언가 소중한 사람과 사별한 듯한 느낌이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에 겨워 오열하는 마레네.

왜 저러는 거지? 루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 마레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 널 구해주고 싶어...”

... 나를 구하다니? 이 결투 의식에서?

마레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통로에 선 인간/이야 하지만...”

... 하지만, 뭐? 마레네를 주시하는 루이에게 그녀의 다음 말이 들렸다.

“하지만 이 죽음은 견디기 힘들어...”

루이는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스며드는 것이 보였다.

루이는 자신의 몸에 내린 이슬방울들을 살짝 핥아먹은 다음, 마레네를 찾았다.

마레네는 자신이 원할 때면 냄새도 기척도 모두 지우고 완벽하게 숨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레네의 향기가 느껴졌고, 루이는 금세 마레네가 있는 곳을 찾아냈다. 마레네는 호수에서 20 클라프터 가량 떨어진 고목의 밑동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굵고 거대한 나무의 뿌리를 밴 채로 모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루이는 늑대 모습을 한 채로, 소리가 나지 않게 걸어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자란 루이였다. 이렇게 소리도 없이 다가가는 것은 그에게 아주 쉬웠다.

다가가 들여다보니, 마레네는 아주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주 가느다란 그녀의 숨소리가 루이의 귀에 들어왔다.

루이는 물끄러미 마레네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루이는 그 말을 삼켰다.

그렇게 들여다보던 마레네의 얼굴이 어느 순간 움찔하더니, 갑작스럽게 그녀가 눈을 떴다.

루이는 지척에서 마레네와 눈이 마주쳤다.

루이는 순간 당황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루이는 그만 몸이 굳어버렸다. 그런 루이에게, 마레네가 싱긋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어 한마디 말을 했다.

“아름다워...”

... 뭐라고? 루이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마레네가 슥 손을 뻗더니 루이의 털을 어루만졌다.

루이는 재빨리 인간 모습으로 변신한 다음, 자신을 만지던 마레네의 손을 잡았다. 약간 세게 잡았는데, 마레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얼굴을 루이에게 가까이 한 다음 루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루이는 뒤로 물러났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놀라움에 경직되어 버렸다.

그런 루이를 마레네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는 오른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갑자기 웬 입맞춤을... 아 진정하자. 지, 지금은, 이 여자에게 긴하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루이는 마레네의 눈을 피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나 물어볼 것이 있는데, 대답해 주겠어?”

마레네는 루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루이는 말을 계속했다.

“너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던데, 혹시...”

루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 후에 다시 말했다.

“내 어머니를... 되살려줄 수 있어?”

루이는 간절한 심정으로 물어본 후에,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마레네는 말이 없었다. 루이는 그녀만의 독특한 말투가 들리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마레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들은 건가? 루이는 다시 물어보려고 했다. 그때, 마레네가 말했다.

“반드시, 안고 가, 모든, 생명은, 죽음을.”

루이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되살려줄 수... 없다는 얘기야?”

“사랑하셨어, 어머니는, 네.”

마레네가 뜻밖의 말을 했다. 루이는 놀란 눈을 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사랑했다고... 나를 말이야?”

“너하고... 그리고 왕을, 늑대 왕을.”

루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행복, 했었어, 어머니는, 네.”

루이에게 마레네가 말을 계속했다.

“지금, 그래서, 그녀는, 기다리고 있어, 늑대 왕을, 피안 세계에서.”

... 너 정도 되는 힘을 가진 인물도, 어머니를 되살릴 수는 없다는 건가...?

루이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숲 가장자리 방향이었다. 거기서 여자아이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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