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17화 한 소녀의 위험한 순간

by 태수련

쿠르트는 물어뜯긴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는 순간에, 도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를 돌이켜보았다. 죽기 직전에는 주마등처럼 지난 과거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간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언제 어디서 들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자신의 처지가 거기에 딱 맞는 상황이었다.

가만있자... 그렇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계집애 하나 때문이었다.

조그만 짐마차 하나가, 까마득히 높은 산을 등지고 있는 외진 마을에 다다랐다. 평범한 짐마차, 평범한 말, 평범한 짐이 실려 있었다. 척 보기에는 그냥 가끔 보는 행상인의 마차 같았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마차를 모는 남자의 덩치가 아주 크고 인상이 다소 사납다는 거였다.

짐마차는 천천히 거친 길을 나아가고 있었다. 근처에서 물소리가 들렸는데, 아마도 시내가 가까이 있는 듯했다.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마차는 멈춰 섰고 마차의 주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일단 주위를 둘러본 다음, 물소리의 진원지인 시냇가로 시선을 고정했다. 시냇가에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체구가 작은 여자아이로, 냇가에서 한참 빨래를 하는 중이었다.

남자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여자아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냥감 뒤로 다가가는 포식자의 발걸음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 남자는 큰 덩치가 눈에 띄지 않게, 그리고 어떤 소리도 나지 않게 아주 조심조심 소녀에게 접근했다.

소녀는 빨래에 집중하느라 주위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거기에 워낙 이 남자가 기척을 잘 숨기기도 했다. 소녀가 헹군 옷가지를 들어 올려 터는 순간, 남자는 소녀의 입을 틀어막고 작은 몸을 낚아챘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소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남자의 짐마차로 끌려가 마차 안으로 던져졌다. 남자는 소녀를 마차 안으로 던진 다음 재빨리 문을 밖에서 잠그고, 그대로 마부석으로 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 남자의 이름은 쿠르트. 그는 ‘사람 사냥꾼’이었다. 평소에 하는 강도짓과 겸업으로, 그는 행상으로 위장한 채 마차를 타고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적당한 사람을 납치한 다음, 도시로 끌고 가 팔아넘겼다.

그가 주로 노리는 사냥감은 여자, 어린이, 그리고 정신이 온전치 못한 남성들이었다. 여자나 어린이는 나이가 적을수록 높은 값을 받았고, 거기에 얼굴이 예쁘면 좀 더 비싸게 팔 수 있었다. 남성의 경우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대신에, 사지가 멀쩡한 놈들이 타겟이었다. 이런 녀석들도 도시에서 늘 사가는 무리들이 있었다. 정신이 흐릿한 남자들을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노예로 쓰려는 무리들이었다.

이 장사는 쿠르트에게 커다란 수입을 주었다. 그리고 쿠르트에게 딱 맞는 일이기도 했다. 키가 1 클라프터를 훌쩍 넘기고, 덩치는 곰처럼 크고 팔과 다리가 단단한 쿠르트에게 맞서 이길만한 상대는 남자 중에서도 거의 없었다. 쿠르트는 언제나 사냥에 성공했다.

그런 쿠르트가 오늘도 ‘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붙잡은 계집이 몸집이 많이 마른 편이었고, 거기에 얼굴이 어떤 수준인지는 미처 확인을 못해서 값을 크게 부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팔다리가 멀쩡해 보이니 최소 금액은 받을 수 있겠지.

자, 이대로 도시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이제 일은 끝난다. 쿠르트는 신이 난 상태로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쿠르트가 한 가지 실수한 것이 있었다. 바로 여자아이의 손을 묶는 것을 깜빡한 것이다.

마차를 몰기 시작했을 때, 잡혀온 소녀가 비명을 지르더니 그 후에 마차 안에서 거세게 쿵쾅대기 시작했다. 굉장히 시끄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리를 듣고 마을 사람들이 달려오거나 하면 일을 그르친다. 쿠르트는 마차를 멈추고, 계집애를 기절시켜서 입을 다물게 할 생각으로 내려서 짐칸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퍽!!

쿠르트는 굵은 나무몽둥이로 이마를 가격 당했다. 불시의 공격에, 그는 눈앞에 별을 보면서 잠시 기절했다.

쓰러진 쿠르트를 본 소녀는 짐마차 안에서 찾아낸 나무 몽둥이를 내던지고 마차에서 뛰어내려 마을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녀에게 운이 나쁘게도, 쿠르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추스른 그는 분노한 얼굴이 되어 소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덩치가 곰 같은 무서운 남자가 쫓아오는 것을 본 소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뛰어가던 소녀는 눈앞의 숲으로 뛰어들었다.

쿠르트도 숲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소녀의 뒤를 쫓아 미친 듯이 달렸다. 그렇게 지독하게 달린 덕분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 되었다. 게다가 평지를 달린 것도 아니고 나무와 풀이 빽빽하게 자란 숲 속을 흥분한 채로 질주했다. 여러 번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그 와중에 손 쪽에는 풀에 베인 상처가 여러 개 생긴 것 같은데, 살펴볼 정신은 없었다.

놓치면 안 돼, 어떻게 잡은 사냥감인데,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혀, 쿠르트는 자신이 지금 엄청나게 위험한 곳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숲 속을 달리던 쿠르트는, 어느 순간 주위에 안개가 서리는 것을 느꼈다. 물론 숲 속에 안개가 서리는 건 흔한 일이지만, 오늘은 날씨가 아주 맑고 햇빛이 환한 그런 날이었다. 이런 날씨에 안개라니...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이 안개는 순식간에 짙어졌다. 달리던 쿠르트는 어느 순간 발을 멈추었다. 너무나도 밀도가 높은 안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주위를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안개 때문에 자신이 어디서 들어왔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쿠르트는 순간 매우 당황했다. 깊은 숲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쿠르트도 잘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런데 지금 그 위험이 코앞에 닥친 것이다.

그런 후에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렇지만 쿠르트는 이 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방향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안개가 소리의 진원지를 차단해 버렸다. 거기에 덧붙여 안개 사이로 소리와 그 메아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귀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혼란을 주었다.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짐승의 소리. 사방을 빼곡하게 메운 나무, 풀. 그리고 안개가 쿠르트를 속박하고 있었다. 안개의 족쇄다.

무서워.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을 느낀 쿠르트는 비로소 지금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 먼발치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이 상황에 사람이...? 쿠르트는 순간 반가운 마음이 올라왔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지도 몰라.

사람 그림자는 아주 천천히 쿠르트에게 다가왔다. 안개 때문에 모습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쿠르트의 지척에 섰을 때 비로소 쿠르트는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은발머리. 그리고 눈 색깔이 파란 소년이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선 듯한 나이의 하얀 피부의 소년.

소년을 바라보는 쿠르트의 귀에, 소년이 중얼거리듯이 말하는 것이 들렸다.

“건방진... ...버지의 허락도 없이... ...여주마...”

소년의 송곳니가 드러나며 날카롭게 빛나는 걸 본 순간, 쿠르트의 머릿속에 이 근방의 전설이 비로소 떠올랐다.

늑대 왕의 전설.

바로 그뒤에 안개 속에서 덩치가 커다란 늑대가 튀어나왔다. 늑대는 쿠르트가 소리를 지를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목으로 이빨을 박아 넣었다.

이 늑대의 털 색깔이 아까 그 소년의 머리카락 색깔과 똑같았지만, 어째서 그런 것인지 쿠르트는 끝내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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