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흑단 호수 숲의 늑대 왕

18화 빛 고리의 성녀님

by 태수련

한네는 숲 속을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달리기가 절대로 쉽지 않은 숲이었다. 사방을 빈틈없이 메꾼 풀과 나무가 수시로 앞을 가로막고, 거기에 갑작스럽게 안개가 서리면서 한네의 시야를 방해했다.

오늘 같은 날씨에 웬 안개...?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한네에게는 이걸 고민할 틈은 없었다. 덩치가 산만한 사람 사냥꾼이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사람 사냥꾼.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한네도 부모님께 들어서 아는 바가 있었다. 잡혀간 사람들이 대충 어떻게 되는지도. 다만 그런 무서운 사람이 자신한테 들이닥칠 거라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운도 없지, 정말 운도 없네. 혼자 그렇게 나오지 말고 낮에 다른 집 아이들하고 같이 나올걸...

그렇게 열심히 내달리던 한네가 어느 순간 속력을 줄이다가, 조금 빠른 걸음이지만 걷기 시작했다. 다리는 물론 지금도 공포에 질려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지금 숲의 상태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안개, 그 이상한 안개가 사방을 메워버린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짙은 안개였다. 두껍고 하얀 막을 사방에 겹겹이 씌워놓은 듯한 상황이었다. 한네는 코앞도 지각할 수 없었다.

안개의 밀도도 굉장했다. 습한 돌덩어리가 온몸을 누르는 듯한 느낌이 한네의 조그만 몸집을 조여 오고 있었다. 아까 냇가에 있을 때만 해도 날씨가 아주 화창했는데, 지금은 안개가 몰고 온 습기가 비가 왔을 때처럼 한네의 머리두건과 옷을 눅눅하게 적시고 있었다.

여기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워우, 워우하는 소리. 이 소리는...

틀림없어, 늑대다.

한네는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 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 마을 뒤쪽 산에 사는 늑대 왕의 혈육들. 그 무서운 놈 중 하나가 근처에 있는 것이다.

사람 사냥꾼에 늑대라니. 한네는 눈에 눈물이 맺혔다.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저, 정신 차리자.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한네는 사방을 둘러보며 다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주위의 소리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소리가 메아리치면서 이리저리 웅웅 울렸기 때문에 소리로는 늑대와 아까 그 사람 사냥꾼의 기척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여기에 사방팔방 시야를 막아버린 안개 때문에 어느 쪽으로 가야 숲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걸어가는 한네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덩치가 상당히 큰 무언가. 한네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잔뜩 긴장한 채로 그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움직이는 무언가는... 동물이었다.

늑대였다. 은빛 털을 가진.

한네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마을에 침입해서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을 잡아먹은 그 은빛 털 늑대.

이, 이제는 내가 먹히게 생겼어...

한네는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거의 기절한 상태가 되었다. 그때였다.

늑대의 뒤쪽에서 둥그런 빛의 고리가 생겨나는 것이 보였다.

한네는 일전에 순회 신부가 이 마을을 찾아왔을 때 보여주었던 성화가 떠올랐다. 성녀를 그려놓은 성화였고, 성녀의 머리 뒤쪽에는 둥그런 빛의 고리가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과 아주 똑같았다. 은은하게 황금빛으로 빛나는 빛의 고리가 짙은 안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조금 뒤에는 고리 아래쪽에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직감적으로, 한네는 그 그림자가 여자라고 느꼈다.

“서, 성녀님...?”

한네는 두 손을 모아 맞잡고 빛의 고리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빛의 고리의 사람은, 아주 천천히 오른팔을 들어 올리더니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러자 놀랍게도, 가리킨 쪽의 안개가 무지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빨강, 노랑, 파랑, 보라. 안개가 알록달록한 색깔을 띠면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한네는 무지갯빛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뛰면서 아까의 늑대 쪽을 힐긋 보았는데, 입가에 피가 가득 묻은 은빛 털의 늑대가 자신 쪽을 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 한네는 더욱 빨리 뛰었다. 그런 그녀의 눈앞에 무지갯빛 안개 덩어리가 다가온 순간, 한네는 그대로 몸을 던졌다.

한네는 정신을 차렸다.

집이었다.

집의 천장이 보였다. 한네는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부모님과 두 명의 남동생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한네가 정신이 든 것을 보더니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네는 이제는 안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한네는 엄마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저녁, 촌장과 마을 남자들은 마을 지척에서 마차와 쿠르트의 시신을 발견했다. 쿠르트의 시신은 흑단 숲 근처에 쓰러져 있었다. 목에 난 상처, 시신이 숲 밖으로 끌려 나오면서 생긴 자국으로 보건대 틀림없이 늑대의 짓이었다.

촌장은 시신을 유심히 보다가, 쿠르트의 옷에 은색으로 빛나는 털이 몇 가닥 붙어있는 걸 알아차렸다.

“... 늑대 왕의 아들들 중 체구가 제일 작은놈 있지? 그놈 짓인가 보군.”

촌장이 한스에게 말했다. 한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서 있던 요한이 촌장에게 말했다.

“그나마 자비롭게 죽였군. 한 방에 숨을 끊었으니. 다른 아들들이라면...”

세 남자는 몸을 떨었다. 한스가 시신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시신을 이렇게 잘 보이는데 끌어다 놓은 건... 경고하는 거지? 숲에 얼씬거리지 말라는.”

“맞아. 누구나 이 꼴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어쨌거나 잘 됐잖아. 한네 얘기를 들어보니, 이놈 틀림없는 그 사람 사냥꾼이더군. 작년 가을에 옆 마을 사람들한테 들었는데 거기도 2명인가 잡혀간 뒤로는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고. 여자하고 아이들을 노리는 놈인가 본데. 큰일 날 뻔했어.”

“조만간에 마을 사람들 모두 모아놓고 주의를 시켜야겠어.”

“그런데 한네 얘기를 들어보니, 숲에서 이놈한테 쫓기고 있을 때...”

요한이 말을 꺼냈다. 촌장과 한스 모두 입을 다물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은빛 털 늑대도 먼발치에서 봤대. 그래서 이제 못 사는구나 하는 순간에 성녀님이 나타났다고 하더군.”

“... 정말이야?”

“음. 나도 한네가 숲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뭔가 잘못 본 건가 했는데, 아주 자세히 얘기해 주더라고. 자네들도 본 적 있지? 성녀님이 그려진 성화. 딱 그렇게 생긴 여자가 길을 알려줘서 숲 밖으로 나올 수 있었대.”

“성녀님이라...”

촌장이 중얼거렸다. 그는 왠지 일전에 보았던 마레네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산으로 올라간 뒤 전혀 모습을 볼 수 없는 그 위칸.

그날 밤, 흑단 호수 근처의 고목 아래에서 마레네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근처에는 은빛 털 늑대가 몸을 누이고 있었다.

거기는 은빛 털 늑대의 영역이 아니었지만, 루이는 그곳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여기서라면 마레네가 움직이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어.

루이는 앞으로도, 계속 마레네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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