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뿔 달린 하얀 말
이 ‘존재’가 흑단 호수 숲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아마도 1년 만인 것 같았다.
일단 이 존재는 모습을 자주 드러내는 생명이 아니었고, 숲에 나타나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짐승은 몇 되지 않았다. 늑대 왕의 아들들 중에서는,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4마리의 늑대들만이 이 존재를 볼 수 있었다. 그 외에는 영력이나 영감이 유달리 뛰어난 생명체들이 이 존재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명체들에게, 이 존재는 내킬 때면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문 경우였다.
숲에 이 존재가 발길을 들이자, 이 존재의 주변이 아주 약간이지만 밝아지는 것이 보였다. 이 존재는 무게를 가지지 않은 듯이 아주 가볍게 걸었다.
이 존재의 하얀 몸뚱이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했으며, 찰랑거리는 갈기와 꼬리는 은빛으로 빛나는 실크 같았다. 늑대 왕의 막내아들인 루이의 머리카락이 이 존재의 갈기와 그 모양새가 아주 비슷했다.
여기에 쭉 뻗어나간 목, 아름답게 곡선을 이루는 등뼈는 무척이나 우아했다. 덧붙여 가느다란 다리는 아주 길었고, 그 긴 다리가 사뿐히 땅을 딛고 걷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이미 매우 아름다운 존재이지만, 역시 이 존재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이마에 달린 뿔이었다.
길고도 가늘며, 나선형의 무늬가 들어간 하얀 뿔은 이 존재가 특별하다는 것을 한눈에 알게 해 주었다.
흑단 호수 숲에 유니콘이 나타난 것이다.
푸른 털의 늑대가 이 존재의 방문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푸른 털 늑대는 늑대 왕의 아들들 중에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4마리의 늑대들-검은 털 늑대, 금빛 털 늑대, 붉은 털 늑대, 그리고 푸른 털 늑대-중 하나였다.
푸른 털 늑대는 유니콘의 기척을 느끼자, 얼른 몸을 일으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 그를 만나러 갔다. 푸른 털 늑대가 유니콘과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푸른 털 늑대는 지금도 유니콘을 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운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척을 따라가자, 숲에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몸뚱이가 보였다. 거기에 은빛으로 빛나는 갈기까지.
푸른 털 늑대는 반가운 마음에 빠른 속도로 내달려 유니콘 앞으로 달려갔다.
유니콘 역시 벌써 오랜 지기가 자신에게 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 털 늑대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동작조차 아주 우아했다. 푸른 털 늑대는 빠르게 걷다가 어느 순간 뛰어올라 그녀 앞에 착지했다.
“오랜만이야.”
푸른 털 늑대가 말했다. 유니콘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눈동자를 푸른 털 늑대에게로 향했다.
아, 지금도 변함없이 보석처럼 근사한 눈동자로군.
푸른 털 늑대는 요 근래 무서운 예감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유니콘이 찾아오자 마음을 짓누르는 듯한 그 압박감이 약간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푸른 털 늑대에게 유니콘이 사방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낯선 존재가 이 숲에 와있네.”
“너도 알아차린 거야? 맞아, 인간 여자 하나가 지난 보름달 밤 이후에 숲에 들어왔어.”
“풀 향기가 나는데, 이슬이 맺혀있는 새벽의 깨끗한 풀의 향기...”
유니콘은 잠시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더니 말을 덧붙였다.
“엘더 플라워... 그 꽃 향기도 나는군.”
“그 존재가 괴상한 안개를 몰고 다녀. 이 안개는 살아있는 짐승처럼 움직이고 가끔은 빛도 발하는 것 같더군.”
푸른 털 늑대는 숲의 근황을 간단하게 알려주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은빛 털 늑대가 이 존재를 쫓아다니는 듯하다. 그리고 두 번의 결투 의식이 있었는데 검은 털 늑대와 은빛 털 늑대가 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검은 털 늑대와 달리 은빛 털 늑대는 달그림자 신의 은총 없이도 부상을 치료했다. 그리고 산 아래쪽에서 인간들의 기척과 냄새를 늑대들 모두가 읽지 못하게 됐다. 이것도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푸른 털 늑대와 유니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숲 속을 함께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둘의 재회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어도 둘의 유대감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숲을 찬찬히 걸어가던 푸른 털 늑대는, 궁금했지만 입 밖에 꺼내기 어려웠던 걸 묻기로 했다.
“어째서 숲에 온 거지?”
유니콘은 푸른 털 늑대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에메랄드 빛깔 눈동자로 허공을 잠시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낯선 존재가 나타난 것은 징조일지도 몰라.”
“징조?”
“응. 숲에 나타날 중요한 이변을 알려주는 거지. 징조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가끔은 특이한 짐승이나 초자연적인 존재의 출현으로 드러나기도 하거든.”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냥 평범한 외모의 인간 여자던데.”
“평범한 외모의 인간이라고?”
유니콘은 이 말에는 약간 놀란 듯, 고개를 돌려 푸른 털 늑대를 바라보았다. 푸른 털 늑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니콘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런 후에 말을 이었다.
“인간이고, 외모가 평범하다면 아마도...”
이렇게 푸른 털 늑대가 유니콘과 만나고 있을 때, 마레네는 흑단 호수 근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주위에 안개가 너울거렸고, 안개 너머에는 은빛 털 늑대가 이리저리 서성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루이는 상당히 초조했다. 지금 상태로 보건대, 마레네가 그냥 잠들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자연스러운 숨소리, 안색, 그리고 냄새로 판단할 때 병이나 부상의 징후는 없었다. 마레네의 지금 상태는 한 마디로 ‘멀쩡했다’.
그런데 왜 저렇게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거지?
마레네는 지금 무려 이틀째 잠에 빠져있었다.
지난번에 /통로/에서 벌인 정혼 의식은 그녀를 심한 피로로 몰아넣은 듯했다.
루이는 자신이 사냥을 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유난히 힘겨운 사냥이 있기는 하다. 사냥감을 뒤쫓다가 결국 놓치고 허탈함에 빠진 적도 많고. 그럴 때는 루이 역시 자기 영역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루이는 이틀 내내 잠을 잔 적은 없다. 아니 도대체, 이 여자 이 숲에 자신을 노리는 위험한 놈들이 많다는 걸 이제는 잘 알 텐데, 이렇게 무방비인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거야? 저 안개가 지켜줄 것을 믿고 이러는 건가? 설마, 잠든 상태에서도 안개를 조종할 수 있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내가 곁에 있으니까 안심한 건가?
그 생각이 든 루이는 마레네에게 다가가,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너, 지금 나를 믿고 이러는 거야?
그때 마레네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잠꼬대를 하는 듯했다. 루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잠꼬대를 집중해 들어보았다.
마레네의 목소리가 들렸다.
“뿔 달린 하얀 말이 오셨네... 그를 피안 세계로 배웅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