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리티 리포트 #10
수 2:18-21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역적이 된 신앙인
충북 제천에 가면 ‘배론’이라는 가톨릭 교회의 성지가 있다. 배의 밑바닥을 닮은 지형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 ‘배론성지’는 ‘황사영’이라는 한 인물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살며 청나라에 있던 주교에게 밀서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황사영의 백서’라고 부른다.
정조가 죽고 난 뒤 실학을 중심으로 했던 남인들이 축출되는 과정에서 가톨릭도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황사영은 유명한 실학자였던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는데 정약용의 형제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였다. 조정에서 가톨릭의 신앙을 금하고 신앙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자 ‘배론’으로 몸을 피해 흰 비단 위에 무려 1만 3천여 자로 된 편지를 썼다.
밀서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부분에는 조선교회의 교세와 아울러 박해로 인해 순교한 이들이 기록되어 있고, 둘째 부분에는 당시 천주교 신부로 조선에 와 있던 주문모 신부가 당한 고난에 대해, 셋째 부분에는 조선 조정의 실정과 가톨릭 교회에 대한 건의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제일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황사영의 건의사항이었는데, 그 내용은 서양 제국들로부터 모금을 하여 조선에 선교비를 보내줄 것과 청나라 황제의 동의를 얻어 서양 신부를 보내줄 것, 조선을 청나라에 부속시키고 감독할 것, 조선에 서양의 군함과 군대를 보내 선교를 도울 것 등이었다.
황사영은 ‘황심’이라는 사람에게 이 편지를 전달하도록 했는데,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되기는커녕 황심이 체포되면서 황사영까지 체포되고 말았다.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었고, 천주교도들에게는 엄청난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황사영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분노한다. 나라를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것이다. 황사영의 이 밀서는 심지어 가톨릭 내부적으로도 일부분 ‘위험한 상상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앙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다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이다.
하지만 황사영의 이 사건은 우리가 한 가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질문을 던져준다. 신앙이라는 가치관의 한계가 어디인가 하는 진지한 질문이다. 황사영 사건은 우리가 가진 세속의 공동체와 신앙의 가치관이 서로 부딪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묻는다. 신앙인이라면, 우리가 가진 신앙이라는 가치관이 때로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뛰어넘는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황사영은 신앙 때문에 역적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에만 신앙 때문에 역적이 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다름 아닌 여리고성의 배신자, 기생 라합의 이야기다.
여리고성의 배신자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여호수아는 전쟁을 준비한다. 요단강을 건너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성이 여리고성이었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가장 견고한 성읍 중 하나였다. 만반의 준비가 되지 않고서는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었다. 공성전은 수성전의 4배 이상이나 되는 많은 희생이 필요하다. 그러니 여호수아가 신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정탐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공동체 전체에서 신뢰할만하고 지혜로운 정탐꾼들을 선택했다.
아마도 이 선택의 과정에서 여호수아는 더욱 신중했을 것이다. 가데스바네아에서 겪은 일을 회상하며 정탐꾼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뽑은 결과 두 명의 젊은이가 선택되었다. 두 사람은 여행자처럼 변장을 하고 여리고성으로 들어가서 성벽에 있는 주막에 머물렀다. 그 주막의 주인은 아리따운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기생 라합이었다.
수 2:1-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 그 여인이 그 두 사람을 이미 숨긴지라 이르되 과연 그 사람들이 내게 왔었으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하였고 그 사람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어디로 갔는지 내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라 그리하면 그들을 따라잡으리라 하였으나 그가 이미 그들을 이끌고 지붕에 올라가서 그 지붕에 벌여 놓은 삼대에 숨겼더라
어찌 된 일인지 그녀는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것도 자신이 속한 도시국가를 배신하면서까지 말이다. 도대체 라합은 왜 그랬을까? 왜 이 일에 자신의 목숨을 걸었을까? 이 일은 분명 매국행위다. 발각되면 자신은 물론 함께 사는 가족들까지 목숨을 잃게 될 것이 자명한, ‘위험한 일’이었다.
거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성경은 라합의 육성으로 그 이유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수 2:8-13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 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 하도록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위대한 신앙의 고백이 선포되었다.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라.” 정탐꾼들은 이토록 놀라운 신앙고백을 이 이방 여인인 라합을 통해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라합의 이런 신앙고백 때문에 그녀는 적국의 정탐꾼들을 보호했고, 결국 자신의 국가를 배반했다. 어떤 이들은 ‘정말 라합에게 그런 신앙이 있었을까?’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저 ‘두려움 때문에 저지른 매국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라합에게 믿음이 있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히 11: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히브리서의 믿음장은 라합을 믿음의 사람 중에 포함시킨다. 라합의 신앙고백은 그저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라합의 신앙고백은 말 그대로 라합의 믿음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이었다. 그러면 라합은 어떻게 이런 신앙을 갖게 되었을까?
라합은 성벽에서 술을 팔며 수많은 여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은 고대 근동 사회에 가장 큰 이슈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인 이집트의 파라오를 굴복시킨 공동체였다. 그뿐인가? 광야의 여정을 지나며 모압과 아말렉, 미디안 같은 강한 민족들을 하나씩 격파하며 가나안까지 달려왔다. 그들이 발만 대면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물이 끊어졌다. 200만이나 되는 큰 공동체가 무려 40년간을 사막에서 생존했다. 그냥 듣고만 있어도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 특히 가나안의 관문인 여리고의 백성들은 소식만으로도 마음이 녹아내렸고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었던 성벽의 기생 라합은 심지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배경에서 라합의 놀라운 신앙고백이 나온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라합뿐만이 아닌 모든 가나안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셨다. 비록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심판을 계획하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바른 길로 돌아설 여지를 남겨놓으셨던 것이다. 심판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광야생활 40년이 이스라엘에게는 수련의 시간이었지만, 반대로 가나안 땅의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유예기간이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주님 앞에 회개할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기회를 잡은 사람들은 많지 않다. 가나안 족속들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기브온’ 사람들이 그 기회를 잡았고, 이 여리고성에서는 유일하게 라합의 가족만이 그 기회를 잡았다.
수 2:17-21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생명의 약속을 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집 창에 붉은 줄을 매는 일이었다. 붉은 줄,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어린양의 피,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흘린 붉은 보혈. 이 모두는 한 가지로 통한다. 바로 ‘구원’이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힘입은 자,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칠해진 집, 붉은 줄이 그 창에 있는 가정은 모두 구원받았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여리고성은 싸움으로 정복되지 않았다. 여리고성은 무너져 내렸다. 여리고성의 모든 군대와 거주민들은 말 그대로 무너진 성에 깔려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전쟁을 치렀다. 그런데 그 무너진 여리고성에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성벽이 폭삭 내려앉았는데 유일하게 무너지지 않고 견고히 서 있는 벽이 있었고, 그 벽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자 그 창문에 무엇이 보였겠는가? 그렇다. ‘붉은 줄’. 그 창에는 바로 라합의 붉은 줄이 매달려 있었다. 라합의 집은 성벽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자신의 믿음으로 온 가족을 구원한 여인이 되었다. 비록 자신의 국가를 배반한 배신자였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 그렇기에 사람처럼 생각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군중심리로 정의와 진리를 가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오직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런 하나님께서는 라합과 같이 진리를 따르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선택하신다.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도 진리를 따라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또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정의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이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라합에게 많은 것을 주신다. 그것들은 기생인 라합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어쩌면 기생으로서는 언감생심 꿈꾸지 못했던 그것들. 이스라엘의 여리고 정복을 통해 그녀가 얻은 것은 생명만이 아니었다. 연인, 남편, 아이들... 라합은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써보고 싶은 소설이 바로 라합의 사랑이야기다. ‘스파이를 사랑한 여인’ 말이다. 라합은 두 명의 스파이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다. 아마도 라합의 생명을 자신의 목숨으로 보증했던 젊은이가 아니었을까? 조금만 상상력을 보태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그 젊은이의 이름은 다윗왕의 고조할아버지인 ‘살몬’이다.
마 1:5-6상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남긴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몇 안 되는 여인 중 하나가 바로 여리고 성벽의 기생 라합이다. 상상이나 추측을 모두 제하고, 성경에 있는 사실만을 이야기해도, 라합은 다윗의 할머니가 되었고 유다지파의 선택받은 어머니가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 선택하라!
라합은 신앙을 귀중이 여겼다. 자신의 그 무엇보다도 더 귀중히 여겼다. 심지어 자신이 평생 살아온 터전보다도,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보다도 더 신앙을 귀중히 여겼다. 모든 것 중에 한가지만 택해야 할 때, 그녀는 당당히 신앙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는 황사영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 비록 폭력으로부터 자유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을 불러들이려 했다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전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이 속한 어떤 공동체보다 신앙을 귀중히 여겼다는 점에서는 다시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그 어떤 공동체나 그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는 더 고귀한 가치를 지닌 사람만이 세속의 공동체가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세류에 편승하지 않고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다. 지금은 조선시대처럼 신앙이 박해를 당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게 세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오히려 교회가 기득권을 가진 경우가 많아 그렇다. 이 모두가 소위 신앙인들이라는 사람들, 교회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신앙의 가치를 잘못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신앙의 가치가 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권력과 물질이 교회의 가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 더 큰 건물을 짓고 더 많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렇게 되는 것을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자랑을 일삼고 다닌다. 반대로 그렇게 되지 못한 교회의 목회자들은 열등감에 힘들어하기도 한다.
신학생의 숫자는 점점 늘어난다. 목회자의 숫자도 계속 늘어난다. 심지어 소명 없이도 그저 ‘큰 목회’를 하려고 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예수를 선택하지 않고 교회를 선택하는 목회자, 교인들이 너무나 많다. 교회가 박해받던 상황에서는 신앙의 가치관을 목숨 걸고 지켰는데, 교회가 사회적인 힘을 가지게 되자 신앙의 가치관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세속적인 가치를 열렬히 따라가고 있다.
우리가 속한 교회는 진정한 교회의 껍데기일 뿐이다. 교회의 건물과 조직, 우리가 교회 안에서 누리는 모든 혜택은 낡으면 벗어버리고 새로 입어야 할 옷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껍데기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인가? 오직 예수라야 한다. 오직 예수님만 살아 움직이시는 교회, 오직 예수님만 선택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 진정한 교회이다.
예수면 다 되는가? 그렇다. 예수가 전부다. 예수가 밥이고, 예수가 돈이고, 예수가 행복이고, 예수가 성공이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교회라는 껍데기는 얼마든지 비판받아도 괜찮다. 그러나 신앙을 냉소적으로 말하지 말라. 예수님라도 안 된다고, 순진한 소리 말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교회를 냉소적으로 말한다고 해도, 신앙인인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는 비판할진대, 그 가시적 교회 안에 반드시 들어 있는, 교회의 알맹이인 보이지 않는 교회, 바로 우리가 가진 신앙만큼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처럼 신앙을 귀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들어 쓰신다. 우리가 신앙을 귀하게 여기기 전까지, 그리고 그 신앙을 우리 삶에 드러내기 전까지,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사용하지 않으실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수시로 여러 가지의 선택들이 찾아온다. 그러나 선택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의 창문에 걸릴 것은 오직 ‘붉은 줄’ 뿐이다. 우리 삶의 온 성이 무너질 때 무엇이 전부가 되는가? 오직 붉은 줄, 복음만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전부가 된다. 자 이제, 그 붉은 줄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우리의 창밖에 내 걸자!
수 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