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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Oct 21. 2017

마이너리티 리포트 11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께 질문하라

마이너리티 리포트 #11




삼상 30:1-6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나는 바보 목사다. 왜냐하면 참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어느 주일 아침 바쁘게 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담임목사님이 나를 보자고 했다. 얼떨결에 목양실에 올라가 목사님 앞에 앉았다. 그랬더니 대뜸 “철원에 좀 가줄래?”하고 물으셨다. 나는 되물었다. “제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세요?” 그랬더니 “오 목사가 좀 가서 부흥시켜주었으면 해.”하셨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어 2주 후 나는 시골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어 있었다. 나를 파송할 때, 담임목사님이 이런 글을 페이스북에 쓰셨다. “흐뭇합니다.”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많은 목회자들이 목회지를 옮길 때, ‘하나님의 뜻’이라며 자리를 옮긴다. 그런데 왜 그 ‘하나님의 뜻’은 항상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사례비, 더 많이 모이는 교인일까? 그 누구도 자청하여 어려운 곳, 힘든 목회지, 더 작은 교회로는 가려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 부목사가 그런 길을 자청하여 간다고 하니 마음이 흐뭇하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한다.


글을 읽으며 인간적인 마음에 어깨가 으쓱했다. ‘나 이 정도 되는 목사야!’하고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교회에 부임을 하고 보니 교회의 채무가 내가 알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태어나서 내가 책임져야 할 빚이 이렇게 많았던 적이 있었던가? 천문학적인 숫자에 얼마나 가슴이 눌렸는지 모른다. 게다가 어떤 교인들은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것처럼 분노가 가득했고, 또 어떤 교인들은 교회에서 받은 상처로 너무나 힘겨워하고 있었다. 사례비가 줄어드니 생활에 어려움이 생겼다. 도시에서만 살던 아내는 시골에 오는 것만으로도 많이 불편해했다. 심지어 아이들도 아프기 시작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거센 파도가 하나둘씩 내게 밀려왔다. 마치 답이 없는 문제를 푸는 것처럼 나는 그 문제 앞에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밤에 잠도 오지 않았다. 괜한 분노도 일어났다. 하나님도 원망스러웠고, 전임자도 미웠다. 나를 시골에 보낸 담임목사님도 많이 미웠다. 심지어 분당에서 철원으로 간다고 했을 때, 반대 없이 순순히 따라나선 아내조차도 원망스러웠다. 당장 무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결정을 돌이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곳에는 소망이 필요한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소명하셨다면 분명 계획을 갖고 계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 묻는 일이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르쳐주세요.


성경에도 나처럼 물었던 사람이 있었다.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앞에서 주님께 물었던 한 사람, 다윗. 그가 바로 나의 스승이자 모델이 되었다. 그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시글락에서 만난 절망


다윗은 오랜 세월을 도망자로 살았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며 광야의 모래를 뒤집어쓰고 산 세월이 훌쩍 십 년을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꿋꿋하게 역경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 좋은 친구들,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충실한 부하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하 23:14-17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그들은 다윗의 말이라면 우물의 물 한 그릇을 위해서도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친구가 곁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친구들이라면 분명 평생 친구이자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심지어 자신의 목숨도 아끼지 않던 친구들이 오히려 다윗을 죽이려고 돌을 드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삼상 30:1-6상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은 사울의 위협을 피해 블레셋의 용병으로 살고 있었다. 블레셋 왕은 다윗을 거느리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치르려 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그렇게 되지 못했다. 만일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도중에 다윗이 돌변하여 블레셋을 공격하면 큰 낭패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다시 자신이 살던 시글락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자칫 복잡해질 수 있었던 상황이 쉽게 해결되었다. 다윗은 아마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과 부하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 강도 떼가 시글락을 습격했다. 아말렉은 사막에 사는 민족으로 강도짓을 해서 연명하던 족속이었다. 이전에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출애굽 할 때에 뒤쪽, 부녀자들과 아이들이 있는 쪽부터 공격했던 비열한 자들이었다. 이들이 시글락에 쳐들어왔으니 결과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집에 돌아와 보니 집이란 집은 모조리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그들의 모든 아내들과 자녀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망연자실하였다. 장정들이 어린아이처럼 큰 소리로 엉엉 울어댔다. 더 이상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멈추고 곡소리가 그쳤을 때, 그들은 ‘십 년이나 저 다윗을 따라다니며 섬긴 대가가 결국 이것이란 말인가?’하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고는 다윗을 보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윗을 꿇어앉혀놓고는 양손에 커다란 돌멩이를 하나씩 쳐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다윗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다윗은 그 상황에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다. 이미 자신의 아내들과 자식들도 모두 사라진 데다 부하들의 깊은 슬픔까지 생각한다면, 다윗이 거기서 포기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다윗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삼상 30:6하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크게 곤란을 당하고 있을 때, 돌 든 자들의 손을 멈출 용기를 주셨던 것이다. 여기서부터 역전에 재역전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삼상 30:7-8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앞에서 다윗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 묻는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 우리가 알든 알지 못하든,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렇게 믿든 믿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이시다. 그러므로 어려운 문제일수록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는 쉬운 문제는 주님께 잘 맡기는 편이다.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거나, 자녀가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들을 주님 앞에 잘 맡긴다. 그러나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거나 중대한 일이 벌어질 때,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하나님도 신뢰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이 그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다윗을 보라. 다윗은 가장 다급할 때, 하나님께 물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물음에 완벽하게 대답하셨다. 하나님은 “반드시”라고 말씀하셨다. ‘한 조각의 틀림도 없이’...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정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윗은 정답을 들었다. “아말렉을 쫓아가라!” 그는 부하들을 이끌고 광야로 달려 나갔다. 그러나 이조차도 정답 없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 드넓은 광야에서 숨어 있는 아말렉 족속을 찾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이미 아말렉이 달려간 발자국은 사막의 바람이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다윗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실하심만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삼상 30:11-13 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다윗은 무작정 달려 나간 광야 한 복판에서 한 애굽 사람을 만났다. 쓰러져 있는 청년을 불쌍히 여겨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다니!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만날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셨다. 이 애굽의 젊은이보다 더 좋은 안내인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이미 아말렉 사람들의 은신처를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은 무엇보다 빠른 지름길을 얻었다.


삼상 30:16-20 그가 다윗을 인도하여 내려가니 그들이 온 땅에 편만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땅과 유다 땅에서 크게 약탈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추는지라 다윗이 새벽부터 이튿날 저물 때까지 그들을 치매 낙타를 타고 도망한 소년 사백 명 외에는 피한 사람이 없었더라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다윗이 또 양 떼와 소 떼를 다 되찾았더니 무리가 그 가축들을 앞에 몰고 가며 이르되 이는 다윗의 전리품이라 하였더라


다윗이 아말렉의 은신처에 도착해보니 이들은 이미 승리와 약탈의 결과에 도취되어 흥청망청 마시고 있었다. 싸움 상대가 술에 흠뻑 취한 주정뱅이들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덤벼도 어림없었을 텐데, 술 취한 아말렉은 다윗의 정예부대에게는 상대도 되지 못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었다. 끌려온 가족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되찾을 수 있었다. 오히려 아말렉이 여기저기서 빼앗은 물건들을 전리품으로 가득 가지고 돌아왔다. 완전히 ‘전화위복’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이 전화위복의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다윗을 왕으로 만드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삼상 30:26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전리품을 그의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이르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다윗은 아말렉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유다의 장로들에게 선물로 보냈다. 이 선물을 받은 장로들은 다윗이 헤브론으로 올라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유다의 왕으로 삼았다. 십 년 방랑의 종지부가 찍힌 것이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건이 불과 며칠 만에 모든 것을 가진 사건으로 바뀌었다. 다윗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기적을 맛볼 수 있었을까? 그야 물론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윗이 하나님께 정답을 물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난제에 대한 답을 갖고 계신다. 그러기에 우리가 어떤 어려운 문제를 만난다 해도 주님께 질문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윗의 이런 기적이 놀라운가? 하나님께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다. 오히려 나는 다윗이 조금만 더 일찍 하나님께 물었다면 훨씬 더 일찍 이런 기적을 맛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삼상 27:1-2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은 사울의 손길이 자신의 턱밑까지 이르렀다는 공포심에 그만 블레셋 왕의 용병이 되었었다. 만일 이때 다윗이 자기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판단하지 않고 주님께 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다윗은 더 일찍 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당신께 묻기만을 기다리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정답을 한 손에 들고 계셨다. 주님께서는 나머지 한 손으로 답답한 가슴을 탕탕 치고 계셨음에 틀림없다.


조금 늦어졌지만, 결국 다윗은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에 하나님께 물었다. 다윗은 단지 하나님께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시고, 그에게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다.


다윗을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가장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연히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 묻는 일,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셨지만, 다윗이 하나님께 묻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를 사용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 질문하라


너무나 부담되는 채무, 상처 입은 사람들, 고함치는 사람들, 원망스러운 마음. 이런 것들 속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께 묻는 일이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셨다. 도저히 해결될 것 같지 않았던 채무의 문제가 기적적으로 해결되기 시작했다. 상처 입은 이들이 치유되기 시작했다. 고함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내 안에 원망이 감사로 바뀌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 물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할 일을 가르쳐 주시고 그 일들 안에 작은 기적들을 하나씩 숨겨두셨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으므로 분명 무언가 계획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 계획을 따라가려면 당연히 나는 물어야 했고, 하나님은 대답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씩 이뤄져 간 것이다. 덕분에 간증 거리가 참 많아졌다.


한 세미나에서 이전 담임목사님을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맘고생했던 이야기들을 들려드렸더니 대뜸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 목사, 그래야 부흥회 나가서 간증할 것도 있지.


정답이다. 신앙인이 간증이 없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간증은 언제든지 고난을 수반한다. 하나님 뜻에 내 뜻이 조율되는 순간까지 우리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그 순간 우리에겐 간증이 하나 생겨난다.


사 55:8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다르다. 우리는 늘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 뜻이라고 우기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우리의 뜻을 하나님 뜻이라고 우겨서는 안 된다. 정말로 하나님 뜻인 것 같아도, 우리는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의 가족이요, 천국의 백성이요,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께 질문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오늘도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께 묻는 일. 그것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문제 해결방법이다.




사 55:6-8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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