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나 #01
저주받은 바리새인, 구원받은 바리새인
새벽에 하는 묵상과 기도는 매우 특별한 권리다. 다른 어떤 매체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찾는 건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기도의 끝자락, 한동안의 고요함 중에 마음 깊이 울리는 생각들이 때로 주님의 음성처럼 들리곤 한다.
새벽에 마태복음 묵상을 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는 세례 요한의 일갈이 계속 마음에 부딪혔다. 바리새인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들은 어떻게 독사의 자식들이 되었는지, 그들에게는 정말 임박한 진노를 피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성경을 들고 찾기 시작했다. ‘바리새인’ 또는 ‘바리새파’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성경을 모두 찾아보았다. 신약성경에만 모두 아흔네 절에 그들의 이름이 적여 있었다. 네 개의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빌립보서에 있는 사도바울의 고백에 ‘바리새’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아흔네 절의 말씀들을 문맥에 따라 묶고, 자르고, 덧붙이며 주제에 따라 구분해 보았다. 그러니 모두 열아홉 개의 주제로 묶였다. 그 말씀들의 주제를 따라 하나씩 제목을 붙여가며 깊고 진지한 묵상을 시작했다. 이 묵상이 끝날 때쯤이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는 하나, 아직도 독사의 자식처럼 살고 있는 내 신앙의 묵은 고집들이 깨끗이 씻겨나가기를 기도하면서 말이다.
저주받은 바리새인
바리새인들은 저주받은 사람들이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책망한 이후로 그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계속 저주받았다. 복음서를 묵상해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대비가 극명하다. 예수님이 축복이라면 바리새인들은 저주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천국의 복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면 바리새인들의 교훈은 심판을 초래한다. 예수님은 살리는 분이시고 바리새인들은 죽이는 자들이다.
예수님께서 평가하시는 바리새인들은 회칠한 무덤이고,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눈먼 안내자이고, 독사의 자식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사람도 잃고 하나님도 잃었다. 그들은 터져버린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고, 전통과 하나님을 맞바꾼 바보였다. 안식일을 주장하다 안식일의 주인을 무시했고,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없으면서도 대접받기 위해 아는 척하고 있는 척했다. 자신들의 방법 외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도무지 소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수군거림으로 성령을 훼방했고, 정작 하나님의 뜻을 말해야 할 때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할 수 없어 침묵했다. 자기만 깨끗하면 된다는 이기적인 성결주의자들이었고, 불타오르는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손에 돌을 들고 허물이 있는 사람을 찾아다니기에 분주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보여주셨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거절당하면 이를 갈았다. 자신들을 거절한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어도 죽이려 했고 결국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바리새인들을 맹렬하게 저주하셨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 하리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신 사랑의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향해 이런 끔찍한 저주를 선포하시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이 저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끔찍할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바리새인은 가장 끔찍한 저주를 받았다. 그들에게는 화가 있었고, 지옥의 판결을 받았다. 모든 의로운 피가 다 그들에게 돌아갔고, 그들의 집이 황폐하고 버려졌다. 결국 그들에게는 가장 큰 형벌이 선고되었다. 주님께서 오시는 심판의 날까지 주님을 볼 수 없는 벌이었다. 그들이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은 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구원받은 바리새인
예수님께서 맹렬히 선포하신 그 저주에서 벗어난 바리새인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 저주에서 벗어난 바리새인들이 꽤나 있었다.
어느 날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온다(눅 17:20-21).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거나 고발할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왔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달랐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다. 그 나라가 언제 임하느냐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 정답을 아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눅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아니, 그들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정답을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그 정답과 함께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나는 이 말씀이 당연히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정작 사실을 확인하면서 매우 당혹스러웠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한 무리의 바리새인들에게 주신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에 당황했지만, 이내 이 말씀은 내게 큰 소망이 되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맹렬히 저주하셨지만, 그들을 포기하지는 않으셨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을 적으로 놓고 성경을 읽다 보면 당황하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바리새인들의 집에 가셔서 함께 음식을 드시며 말씀을 전하곤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몹시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셨다. 꼬투리를 잡으려는 자들에게 무슨 대답을 그렇게 자세히 한단 말인가? 그런데 예수님은 마치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교사처럼 그들의 질문에 빠짐없이 대답해 주신다. 때로는 열정이 넘쳐 그들을 저주하시면서도 그들의 잘못을 낱낱이 깨닫게 하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눈치채야 한다.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놓지 않고 붙잡으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진심이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은 아무리 저주받은 바리새인이라고 해도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벗어나는 길을 열어주셨다. 누가가 증언한 무명의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다. 그들은 바리새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태도를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더 갈급했기에 ‘하나님 나라’를 얻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의 저주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인물은 사도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율법의 집행자였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달리는 말에서 고꾸라진 후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을 분토처럼 버렸다. 그 결과 그는 바리새인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니고데모는 사도바울보다도 먼저 구원받은 바리새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워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갔지만, 거듭남의 신비를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후에 십자가 아래까지 담대히 나아가는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뿐이 아니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인들 중에 바리새파 사람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행 15:5). 이들은 모두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함으로써 바리새인의 저주에서 벗어났다.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은 그들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갖고 있던 태도와 습관은 지금 나의 신앙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안타깝지만 진실로 진실로 그렇다. 거룩한 체하지만 속에는 욕망이 가득하고, 말로는 산을 들어 옮기지만 삶이 따르지 못한다. 형제를 깨물고 자매의 눈을 멀게 하기도 하고, 오래된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보다 내 경험과 내 계획이 더 옳다고 우기기도 한다. 이유 모를 분노를 가득 품고 있다가 애먼 이들에게 쏟아내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언제든 저주의 법 아래로 이끌려 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도바울이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을 분토처럼 버렸어도, 자주 죄의 법 아래로 끌려가며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탄식했던 것처럼, 나도 시시때때로 불행한 사람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쩌면 21세기 바리새인이다.
오늘부터 나는 바리새인의 태도와 습관을 하나씩 벗어버리려 한다. 물론 여기에는 주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충분한 기도와 말씀이 있어야 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확실한 믿음이 하나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구원받기를 소원하셨다는 사실이다. 익명의 바리새인들에게 천국을 주신 예수님께서 그릇되고 오래되어 묵은 태도와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에게 당연히 은혜를 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이 묵상을 시작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