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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Jan 25. 2019

바리새인과 나 02
내 인생의 연대기

바리새인과 나 #02




눅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교만한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스스로가 자신이 의롭다고 믿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눅 18:9-14)를 들어 교만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신다. 교만한 바리새인은 자신이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죄인들과도 같지 않고, 옆에 앉아 기도하는 세리와도 같지 않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있다. 아! 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가?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다. 뉴스를 보다가 문득 문제가 된 제품을 보게 되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우리도 그 제품을 사용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큰 아이를 낳고 백일쯤 지나니 겨울이 왔다. 아기도 있는데 집안이 하도 건조해서 가습기를 장만하고, 마트에 갔다가 좋은 라벤더 향기가 나는 가습기 살균제가 있어 하나 사 왔다. 바로 문제가 된 그 살균제였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분명히 한동안 그 살균제를 사용했었다. 우리 아이 가까이에 두고 말이다.

나는 아내를 쳐다보며 “우리 저거 사용했었지?”하고 흥분해서 물었다. 그랬더니 아내는 “우리는 한두 번 정도 썼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랬다. 오래된 단독주택 2층에 살고 있어서, 건조하다고 가습기를 며칠 켜놓았더니 안방에 곰팡이가 잔뜩 피었다. 그래서 가습기를 계속 사용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곰팡이가 너무 많이 피는 바람에 안방에 아기와 있을 수가 없어서 거실로 나와 한겨울을 지났다. 물론 거실까지 곰팡이가 필까 봐 가습기는 아예 치워두었다.

그때는 안방에 피어난 곰팡이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었다. 그런데 그 곰팡이 때문에 가습기를 켤 수 없었고, 덕분에 문제의 가습기 살균제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여보, 하나님의 은혜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랬더니 아내가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이 이야기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면 안 돼요. 혹시라도 듣는 사람들 중에 피해자들이 있다면 정말 마음이 아플 거예요.”

자랑하기 좋아하는, 바리새인 닮은 내 성품을 잘 알기에, 아내는 내 말 때문에 상처 받을지 모르는 누군가를 걱정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모든 감사할 일들이 다 떠벌이며 자랑할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고통을 피해 갔다고 자랑하면 어떤 사람은 그 말 때문에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바리새인은 지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는 세리 옆에서 “내가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하고 있다. “주님, 오늘도 저를 죄의 유혹에서 건져 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도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신은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겠지만, 굳이 옆에서 기도하는 세리에게 상처를 줄 필요가 있었을까?

그러나 이 바리새인의 모습은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신앙고백의 형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출신부터가 남다르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가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육체의 모든 자랑을 분토처럼 버리기 전까지는 바리새인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빌 3: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사도바울도 육신의 생각으로 볼 때는 바리새인인 것이 자랑할 만하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동족의 혈세를 무자비하게 거둬들여 자신의 배를 채웠던, 죄인의 대표인, 세리들에 비하면 바리새인들은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의 기원을 살펴보면, 어쩌면 우리도 그들이 가진 뿌리를 자랑할 만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바리새’라는 명칭은 비슷하게 발음되는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에서 유래했고, 모두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그들이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는 모습을 보고, 반대자들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포로 귀환 이후에 희랍제국이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받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그리스 문화와 사상이 퍼지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하시딤(Hasidim)’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당시 그리스 사상이 지니고 있었던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시류 속에서 경건한 신앙을 지키려는 ‘경건 운동’이었다. 이들은 헬라 제국의 가혹한 핍박을 받았다. 자신들을 죽이려고 쳐들어온 헬라의 군인들과 대적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무려 1천여 명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이유가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경건 운동은 마카비 전쟁과 결합하여 희랍제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 승리가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이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모세를 통해 전해지고 다윗 왕국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그들의 신앙을 자랑했고, 자신들이 그러한 율법과 신앙을 지켜낸 특별한 무리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은 참된 이스라엘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서로 ‘하베림(형제들)’이라고 불렀고, 바리새파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땅의 백성들(암 하아레츠)’라고 구별하여 부르기까지 했다. 바리새인들이 자랑하던 출신의 배경은 그들에게 특권의식을 갖게 했다.

“땅의 백성들과 달리 우리는 구별된 사람들이야. 우리는 이런 사람들의 후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야! 우리는 이런 일을 했어! 우리는 너희와 다르다.”

바리새인들은 줄곧 이런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면서 자기들의 울타리 안에 들지 못한 다른 이들을 멸시했다.


‘왕년에 한 가닥 안 해본 사람이 있나?’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과거의 경력에 매어 있는 사람들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에게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너희들이 자부심을 갖는 그 출신과 배경은 돌멩이만도 못하다고 비웃으면서 열매를 맺으라고 강력하게 충고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로 찍어서 불에 던져지겠다고 선포했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 출신과 배경의 어떠함에 있지 않고, 오직 열매를 맺고 있는가에 있다는 말씀이다. 세례 요한만이 아니었다. 예수님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 21:22-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그들이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자신들만이 참된 이스라엘의 구성원이라고, 스스로 구별된 자들이라고 자랑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기고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자랑으로 여기던 출신과 배경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보다 더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마 23:29-31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바리새인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배경을 자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불경건함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왕년에... 나 이런 사람이야! 내가 이런 일을 했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내가 얼마나 불경건하고 불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일이 된다. 그러고 보면 참 나는 바리새인을 많이 닮았다. 나는 매우 자주 내가 한 일들을 자랑하고 다녔다. 어려운 형편에 대학원까지 마치고 목사가 된 일을 자랑했다. 몇 명 모이는 청년부에 담당목사가 되어 수십 명으로 늘어난 것을 자랑하고 다녔다. 삼백오십 명 모이는 청년부를 일 년 만에 천삼백 명 모이는 청년부로 만들었다고 자랑했다. 빚이 많은 교회, 깨어져 가는 시골 교회에 가서 빚을 갚고 교회를 살렸다고 자랑했다. 물론 겸양이라는 모양의 양념을 가미하면서 겸손한 척 하기는 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늘 옆에서 내 아내는 “여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하고 충고한다. 아내가 내게 그러면 그 말이 당연히 맞는 말인데, 그 말에 꼭 토를 달고 싶다. 마음이 불편하다. 왜 그럴까? 내가 바리새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일도 했고, 저런 일도 했으니 무언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 옆에 있는 세리와는 다르기에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한 일에 초점을 맞춘 바리새인의 태도다. 종종 나는 내 인생에 내가 한 일들만 가득한 바리새인이다.


며칠 전 아내와 신혼 시절 얘기를 나눴다. 아내가 수박을 먹었던 간증을 했다. 그때 아내는 첫째 아이를 임신했었다. 부엌일을 하면서 조그만 창문으로 골목 건너편을 보는데, 과일가게에 수박이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던 수박이 그렇게 맛있게 보였단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수박을 사 먹을 형편이 안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 수박 먹고 싶어요.’하고 속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때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언덕 너머 가까운 동네에서 목회를 하시는 은사 목사님의 전화였다. 전화를 받았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혜정아, 수박 먹을래? 우리 야유회 갔다가 수박이 한 통 남았는데 지나는 길에 주고 갈게.” 아내는 냉큼 그러겠다고 하고 수박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내게 간증을 했었다.

내 아내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거나, 큰 부흥이 일어나거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난 간증은 하나도 없다. 거의 대부분 먹고 싶던 과일을 먹은 것 같은 소소한 일들이 간증 거리다. 첫 아이 임신하고 4월에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기적적으로 마트 구석에서 복숭아 두 개를 찾아 사서 먹었던 일, 첫째 낳고 내게 산후조리를 하던 때 저녁에 갑자기 들깨 미역국이 먹고 싶다고 내게 말했는데 아침에 한 권사님이 들깨 미역국을 들통으로 하나 끓여다 주신 일, 둘째 임신하고 대저토마토가 먹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서 값싼 토마토를 사 왔는데 그날 저녁 내가 과일가게 하시는 집사님 댁 심방 갔다가 대저토마토를 받아온 걸 보고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일. 뭐 그런 일들이 간증 거리다. 다만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에 대한 고백이다.




한 사람이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가 한 일들을 나열하다가 책망받을 때,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일,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하다가 의롭다고 인정받았다. 바리새인들의 뿌리가 되는 ‘하시딤’ 운동에서 그들이 표어로 내세운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였다. ‘하시딤’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뜻하는 ‘헤세드’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하시딤’의 후예인 바리새인은 사람의 일을 자랑하고 있었고, ‘땅의 백성’인 세리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구하고 있었다.


바리새인의 교만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바로 내가 한 일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리의 의로움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바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나열하며 볼품없는 바리새인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과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을 나열하며 위대한 세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자주 바리새인과 세리의 경계선에 서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만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나의 자랑’에 시선을 맞출 것인가? 나는 많은 업적들로 위대하지만 초라한 바리새인 말고, 초라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세리였으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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