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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Feb 01. 2019

바리새인과 나 03
가면 뒤의 얼굴

바리새인과 나 #03

바리새인과 나 #0




마 23:25-28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회칠한 무덤” 바리새인들을 일컫는 대명사 같은 상징이다. 우리는 흔히 바리새인들을 겉과 속이 다른 인물들로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표현하셨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른 정도가 아니다. 겉은 깔끔하고 산뜻한데 그 속은 더럽고 음흉한 것이 가득하고, 죄와 죄에 대한 욕망이 넘쳐나는 더러운 사람들의 상징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다. 그러면 과연 나는 어떤가? 바리새인보다 얼마나 겉과 속이 같으며, 얼마나 안에 선한 것이 들어 있는가? 나는 얼마나 “회칠한 무덤”이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을 꾸미고 산다. 사람은 그것이 화장이든 옷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자신을 포장하고 살아간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려니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완하고 덮고 꾸미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감을 얻고 조금 더 인생을 즐겁게 살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크게 나쁘다고 할 수 없다. 집도 그렇다 정기적으로 페인트도 칠해주고 망가진 데도 수리해주어야 한다. 집의 외부를 너무 방치하는 것도 좋지 않다. 사람이든 건물이든 때로 외부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 외면적인 관리는 오히려 그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회칠한 무덤”은 다르다. 겉은 회를 칠해서 깔끔하고 산뜻한데, 그 안에는 주검이 가득하다. 그냥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덮어주고 꾸며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을 말한다. 안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가면을 씌워놓은 것을 말한다.






요즘 부모들의 왜곡된 교육열에 관한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다. 드라마의 설정 상 최고의 대학을 나와 최고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주거단지가 있고, 그곳에는 자식들을 내걸고 서로 경쟁하는 부모들이 있다. 서로의 배경과 가치관은 조금씩 다르지만 자녀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열정들은 하나같이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을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것도 비슷하다.


문제는 이 드라마의 설정이 별로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자화상 같아서 씁쓸하다. 자녀가 소위 일류 명문학교에 들어가면 그것이 부모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면 그것 또한 부모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래서 마땅히 먼저 있어야 할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보살핌보다 아이들을 세속적인 성취로 이끄는 관리가 더 중요시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자녀들의 행복한 삶과 최고의 성공 때문이라는 산뜻하고 깔끔한 이유가 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거짓된 욕망이 가득하다. 결국 ‘회칠한 무덤’ 같은 욕망의 공간에는 죽음이 가득하다. 부모들의 왜곡된 욕망이 자녀들에게 죽음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어디 부모들의 왜곡된 교육열만 문제인가? 아무런 비전 없이도 세속적인 조건을 따라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의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 사회적인 혹은 경제적인 안정인 경우도 많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준다. 겉모습은 산뜻하고 깔끔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생명이 없다. 정작 있어야 할 내용이 빠져있다.


현대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남성 혐오, 여성 혐오, 세대 간 혐오의 문제, 좌와 우의 혐오 문제 등등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 일어나는 모든 폭력적인 일들이 “회칠한 무덤”과 관련이 있다. 거창한 명분을 걸고 싸우고는 있지만 정작 산뜻하고 깔끔한 대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빈 수레인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말 그대로 ‘회칠한 무덤’이다.





‘회칠한 무덤’의 탄생 배경은 이렇다. 신약시대 예루살렘 성안과 주변에는 수없이 많은 무덤들이 있었다. 대부분 석회암 동굴을 파고 그 안에 무덤을 만들었다. 예루살렘의 무덤들은 가족 무덤으로 만들어졌는데, 사람이 죽으면 무덤 안에 평상 위에 장례를 치렀고, 시체가 부패해서 뼈만 남게 되면 유골을 수습해서 “글로스크마”라고 불리는 석회석 상자 안에 담아 보관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집과 매우 가까운 곳에 석회석 동굴을 파고 무덤을 만들었다. 예루살렘 성안의 집들도 대부분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는데, 석회암을 잘라서 벽돌처럼 만들어 사용했다. 석회암을 채취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석회암 동굴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동굴들이 무덤이 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집과 무덤을 구별하지 못하고 지나다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당시에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문제가 되는 때가 있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나갈 때다. 하나님께는 정결한 자들만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는데, 부정해지는 대표적인 예가 성적인 것과 죽음에 관련된 것들이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와 유골이 들어 있는 무덤에 닿은 사람들은 부정하게 되어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그나마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 안식일에 예배하지 못하면 다음 안식일에 예배를 드릴 수 있었지만, 문제는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명절의 순례자들이었다. 유월절 같은 큰 명절이 되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1년에 한 번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오는데, 자칫 부정하게 되어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면 정말 큰 낭패를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 유월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무덤에 회를 칠했다. 깔끔하고 산뜻하게 회를 칠해서 순례자들이 무덤인 것을 알아보도록 했다. 혹시라도 무덤에 손을 대거나 기대거나 스쳐서 부정해져서 가장 중요한 제사를 못 드리게 되는 일이 없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회칠한 무덤”이었다.


회칠한 무덤의 핵심은 산뜻하고 깔끔한 겉모습으로 속에 든 부정한 죽음을 덮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깨끗하고 산뜻함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죽음을 표시하는 간판이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책망하신 말씀의 참뜻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회칠한 무덤”의 핵심은 “너희 겉과 속이 다르니 나는 너희를 심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책망하시는 진짜 뜻은 여기에 있다.   

마 23:26 눈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 속사람, 본바탕을 깨끗이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중이다. 내 보이는 일에 치중하던 것을 중단하고 참된 자아를 살려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문득 어렸을 때 친구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시험기간에 한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함께 공부를 했던 적이 있었다. 밤늦게까지 같이 공부하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는데 친구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

“야! 너는 얼굴도 하얗고 깨끗한데 왜 세수를 하냐?”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세수를 해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당연히 세수를 해야지. 꼭 지저분해서 세수를 하냐?”

그랬더니 친구가

“아니, 그러니까 지저분하지 않은데, 세수를 안 해도 티도 안 나는데, 왜 꼭 세수를 해야 하냐고?”

하고 말했다.

처음에는 ‘별 희한한 소리를 다 듣는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본판이 깨끗한데 굳이 닦고 바르고 깨끗이 할 필요가 있는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그때부터 아침에 세수를 안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세수를 한다. 도자기는 정기적으로 수분을 제공해주지 않으면 망가진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진흙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정기적으로 물을 묻혀줘야 오래 산다고 한다. 물론 농담이다.

어쨌든 본래의 존재가 아름다우면 오히려 가면을 씌우면 안 된다. 그 안에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면 그 집 벽에는 회를 칠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속사람이 살아있는가?’이지 결코 ‘얼마나 위대한 가면을 씌웠는가?’가 아니다.


토비 맥과이어가 주연한 히어로 영화 스파이더맨 트릴로지 시리즈에서 내가 아주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스파이더맨이 폭주하는 전철을 세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더 이상 악당에게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소진되어 기절해 있는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누군가 벗긴다. 그리고 그 위대한 영웅의 가면 속에 아직 어리고 예쁜 소년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때 악당이 스파이더맨을 향해 오는데 전철 안의 사람들이 악당을 막아서고 영웅 소년을 지켜낸다. 시민들은 그가 멋진 가면을 쓰고 현란한 코스튬을 입은 영웅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주어야 할 앳된 소년이기 때문에 용기를 내어 무시무시한 악당에 맞선다. 사실도 아니고 꾸며낸 것이지만 이 이야기에는 그런 진실이 담겨 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인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살아 있는 그 모습 그대로의 연약한 나를 바라신다. 주님은 나의 상한 심령을 사랑하신다. 주님은 말과 행동이 아니라 나의 마음을 원하신다.     

마 15:7-8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외식하는 자’(휘포크리테스, a hypocrite)의 원어적인 뜻은 ‘맡은 배역대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외식하는 연기자가 아니기에,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깨끗한 말과 행동이라는 가면을 써서는 안 된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까이해야 한다. 그러면 속사람이 산다. 먼저 안이 깨끗해지고 겉도 깨끗해진다.


목회를 하다 보니 늘 교인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짐을 지고 산다. 그래서 자주 외식하는 자, 연기자가 되는 유혹에 빠진다.

“우리 목사님을 그렇게 금식기도를 많이 하신대!”

“우리 목사님 늘 목이 쉬어 있는 이유가 기도를 많이 해서래.”

“우리 목사님은 집에도 안 들어가시고 강단에서 주무시며 기도하신대.”

“우리 목사님은 종탑 꼭대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시느라 내려오지를 않으셔.”

뭐 이런 얘기를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해보려고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교인들로부터 칭송받고 존경받던 목사님들이 지금의 한국교회에 큰 실망을 안겨주는 모습들을 보면서 나는 내게 있는 속사람을 점검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보이는 면이 아닌 보이지 않는 면으로 하나님을 더 공경해야겠다는 것이다.


조용히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자. 사람들이 보는 종탑에 올라가 손을 들고 폼을 잡으며 기도하지 말자. 예배당 강단에 자리를 깔고 소리를 지르며 교회에 지나가는 교인들이 다 듣게 기도하지 말자. 사무실 구석에 숨겨둔 기도 의자에 더 자주 앉고 마음으로 하나님 옆으로 더 가까이 가자. 사람들의 인정에 귀 기울이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에 더 귀 기울이자. 살아 있는 상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자. 그렇게 얼마든지 가면을 벗어도 좋을 진짜 얼굴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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