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새인과 나 #04
마 23:2-7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목사가 되기 위해 처음 신학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존경하는 어른들이 참 많았다. 80년대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90년대 초반에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했으리라 생각한다. 당시에는 한국교회에 소위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이 많았다. 신학대학교에 가 보니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대단한 목사님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목회했던 교회의 이야기들이 책으로 출판되었고, 그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당시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이라면 한 번쯤은 그런 책들을 읽어보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20년쯤 지나면서 그들에 대한 존경이 깨지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성적인 추문이나 돈과 관련된 비리들, 세습과 같이 권력과 관련된 부끄러운 일들이었다. 그러면서 내 서재에서 책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일들을 한 사람들이 써놓은 책들이 서재에 꽂혀 있는 게 꺼림칙하고 기분 나빠 그런 사람들의 책을 골라 버렸기 때문이다. 존경하며 따르려 했던 마음에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그들이 전한 복음과 교훈이 내 머릿속과 가치관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화가 났었다.
얼마 전 혼자 책장을 정리하다가 아직 버리지 못한 책들이 남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미처 버리지 못한 책들이 꽤 많았고, 그동안 새로 버려야 할 책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책들만 따로 쌓아두고 버리려다가 하나씩 펴서 읽어보았다. 덕분에 책장정리는 3일이나 걸렸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들에 대한 분노도 누그러졌고 배신감도 많이 잦아들었나 보다. 아마도 그래서 그 책들을 다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정직하십니까?’, ‘하나님 사람의 선명한 기준’, ‘젊은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책의 제목들을 읽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온전하라고 가르쳤던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가족과 교회를 속이고 부적절한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 앞에 정직한가를 묻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거짓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하나님 사람은 속 사람이 변화된 사람이어야 한다고 가르치던 그의 속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음흉하고 더러울 수 있었을까? 썩은 고기를 먹지 말자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썩어빠진 삶을 살았을까? 계속 한숨을 쉬며 책들을 읽었다.
책에는 여기저기 접어놓은 자국들이 있었다. 설교를 준비하며 인용했던 구절들이 눈에 띄었다. 어쩜 그렇게 옳은 말들만 하는지, 어쩜 그렇게 구구절절이 신앙에 대한 탁월한 해석들을 해냈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이 한 말대로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들도 복되고 그들의 교훈을 들었던,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을 텐데 말이다.
유명한 한 목사가 성적인 범죄를 저질러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회자되고 있을 때, 오랜 시간을 두고 가까이 지낸 후배와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뚱뚱하고 못생기게 만들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얼굴이 잘생기고 몸매가 좋아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내게도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했다. “형은 못해.” 안 하는 게 아니고 못 하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왜 나는 못하느냐고 물었더니, “형은 겁이 많아서 못해.”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답이 참 고맙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26절에 감추어지고 숨겨진 모든 것이 드러나고 알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감추어지고 숨겨진 것들이 주님으로 인해 오해받은 일들이거나 박해받은 것이라면 드러나고 알려질 때 정말 자랑스럽고 기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내가 지은 죄악들이라면 어떨까?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당연히 주님으로 인해 오해받고 핍박당한 일이 드러날 것으로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오히려 숨겨놓은 내 죄악이 드러나지는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겁이 많다. 그런데 그게 감사하다. 나를 뚱뚱하고 못생기게 만드신 것도 감사했는데, 그보다 나를 겁이 많은 사람으로 만드신 게 더 감사하다. 감추어지고 숨겨진 모든 일은 결국 드러나게 된다. 그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아내, 아이들, 친구들이 실망하고 상처 받을 일이 참으로 두렵다. 나는 주님 앞과 사람 앞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 두려워 죄악을 포기하고 거룩함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그래서 겁이 많은 것도 감사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그 계명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선생’이라는 호칭을 듣는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런 그들을 존경하고 칭찬했다. 그들은 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고, 대우받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셨다. 맨 처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던 그들의 삶 때문에 인정을 받았는데, 모세의 자리에 앉고 나니 이제는 바리새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이 말하는 교훈의 탁월함만으로도 그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경외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게 되고 그 자리를 지키기 시작하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잃어버리자, 말만 남고 삶은 사라지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 앞에서는 탁월한 교훈을 가르쳤지만 그게 다였다. 말밖에 없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들이 가르친 교훈과는 거리가 멀었다. 교만하고 자랑하고 음란하고 돈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의 행위는 높은 곳에서 ‘랍비’로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표현하신 것은 아마도 더 이상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만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말씀하신 게 아닐까 싶다.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지근거리에서 보고 배우며, 바리새인들의 거짓됨을 더욱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그들에게는 내가 했던 일만 남았다. 내가 말과 삶이 달랐던 목사들의 책을 버렸던 것과 같이, 그들에겐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내다 버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3:2-3상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교만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버리지는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교훈을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라고 하셨다.
진리와 사람은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이 진리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 속에 진리가 하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죄에 빠져 진리를 저버렸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진리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진리 안에 있었을 때 그가 품고 있던 진리마저 내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일 사람 때문에 진리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상에 진리는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처음 목사 안수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인의 장례를 치렀다. 승화원에서 화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집사님이 다가와 내게 질문을 했다.
“목사님, 자기가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도 그 말씀을 따라야 하나요?”
전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던져진 이 질문이 내게는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그분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은 강단에만 서면 희생적인 믿음의 결단을 강조하는 분이었다. 그런데 집사님은 목사님의 삶에서 정작 자신은 희생하지 않는 세속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크게 실망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 참 대답을 못하고 생각만 했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야 짧게 대답할 수 있었다.
“집사님,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아직 어린 목회자라 그런지 제가 사는 대로 설교하려면 설교할 게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정말 그렇게 설교해도 되냐고요. 그런데 설교하는 대로 못 산다고 설교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설교하고 나도 설교한 대로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교는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니까, 설교자도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또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결단하고 살아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설교하는 목사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보다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이렇게 대답하고는 둘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만 대화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목사님을 판단하지 말아야 했고, 그분도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행복하게 하려면 목사님의 진정성을 신뢰할 만한 실마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시고, 남편도 장로님이 되신 걸 보니 그때 내가 그 목사님을 판단하지 않은 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이 목사님의 진정성을 신뢰한 결과가 선하게 열매 맺어 정말 다행이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그 목사님께도 고맙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바리새인들 속에서도 이런 가능성을 보셨다. 그들의 악한 행위 때문에 그들의 말속에 담긴 진리가 훼손되지 않기를 원하셨다. 대부분의 바리새인들은 진리가 아닌 쪽을 선택했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신들이 가르친 진리를 따라 살기로 결심한 니고데모 같은 바리새인 제자들도 생겨났다. 비록 말만 많은 바리새인들이 가르쳤더라도 진리는 참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증명된 셈이다.
책장을 정리하며 미처 버리지 못했던 책들을 읽다가 다시 책장에 꽂아두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바리새인들의 행위는 따르지 않아도 그들의 말은 따르기로 했다.
나는 말 많은 바리새인이다. 확실히 말한 것대로 살지 못하는 바리새인임에 틀림없다. 내가 말하고 가르치는 진리와 동일한 삶을 살지 못한다. 그러나 기왕이면 노력하는 바리새인이 되고 싶다. 높은 자리에 앉아서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서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새인 말고, 언젠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감추어지고 숨겨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며, 오늘도 내가 말한 것과 사는 것을 일일이 대조해 보고 말한 대로 살려고 애쓰는 그런 바리새인이면 좋겠다. 그러면 언젠가 가르치기는 조금 더 적게 하고 살기는 조금 더 많이 사는 바리새인 제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