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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Feb 15. 2019

바리새인과 나 05
바라보다 놓아버린

바리새인과 나 #05

바리새인과 나 #0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사이비 종교들이 사회에 일으키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가정을 깨뜨리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정을 버리거나 돌보지 않는 어른들이 큰 문제였다. 요즘은 가족들과의 관계를 끊고 사이비 종교에서 생활하는 청년들도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하나같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믿음이 좋은 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얼마나 공적인 예배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거룩해 보이는’ 신앙 행동에서 그들의 믿음을 평가하곤 한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신앙의 행위가 두드러진다고 해서 다 좋은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때로 건강한 신앙을, 드러나는 신앙생활이 아닌, 관계의 건강함에서 찾을 수 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에 열심을 냈다. 자기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강요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릴 때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다. 박하는 단맛을 내는 조미료이고, 회향은 고수나 미나리 같은 채소다. 근채는 열매와 잎을 사용하는 일종의 향신료다. 다시 말하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릴 때, 음식에 곁들이는 설탕과 깻잎과 후춧가루의 십일조까지 드렸다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은 비록 소소한 양념이라고 해도 엄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엄격하게 규정해 놓고 있었다. 안식일에는 모든 노동이 금지되었는데 심지어는 두 글자 이상 쓰는 것도 금지했고, 두 글자를 지우는 일도 금지할 정도였다.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구해주는 일도 사람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지 않으면 금지했다. 예를 들어 벽이 사람 위로 무너지는 사고가 나면 그 사람의 생사를 확인할 만큼만 치울 수 있었고, 살아 있는 것이 확인되어야 무너진 벽 아래서 사람을 구출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소위 거룩함을 추구했다. 소위라는 말을 붙인 이유를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에게는 자기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보다 자신의 거룩함이 훨씬 중요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탐욕스러운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했다.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마주 대하여 먹고 마시지 않았다. 마치 병원에서 전염병을 앓는 사람을 대하듯 그들의 죄가 전염되어 자기들의 거룩함이 더럽혀질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께만 집중하고 세속의 모든 것들은 관심 밖에 두는 것이 참된 신앙인 것으로 생각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비치기를 원했다.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의 속 사람에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이 숨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숨겨놓은 욕망을 꿰뚫어 보셨다.


마 15:4-6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예수님은 당시에 유행하던 ‘고르반’의 풍조를 들어 바리새인들의 숨은 욕망을 드러내셨다. 탐욕으로 가득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마땅한 의무를 버리고 ‘나는 하나님께 드렸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그들의 이기심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만 바라본다.’라며 놓아버린 그들의 관계야말로, 그들이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훨씬 더 붙들었어야 할, 거룩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셨다. 그들이 스스로 신앙을 왜곡하고 있는 만큼 예수님은 더 강력하게 충고하셨다.


우리는 ‘이혼 증서’를 두고 바리새인들에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추악한 욕망이 얼마만큼 신앙을 왜곡시키고 있는지 볼 수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아무런 이유가 없이도 이혼 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집에서 내쫓을 수 있었다. 물론 이혼과 관련된 율법에는 조건이 있었다.


신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분명 모세의 율법은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로 인해 아내를 기뻐하지 않을 때 이혼 증서를 써 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내에게 수치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악용했다. 온갖 이유를 들어 이혼 증서를 쓰다 보니 나중에는 그냥 이혼 증서를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혼의 사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지난 2017년 8월에 인도에서는 이례적인 헌법소원의 판결이 있었다. 이혼에 관한 것이었다. 인도에는 현재 1억 7천만 명이 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무슬림들은 ‘탈라크(Talaq)’라는 이혼제도를 따르고 있었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탈라크(Talaq)’라는 말을 세 번 외치면 이혼을 할 수 있는 법이다. 이 ‘탈라크(Talaq)’는 무슬림의 경전인 코란에 기록된 법인데, 그동안 인도의 무슬림 남편들은 이 법을 악용해서 아내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왔다. 술김에 ‘탈라크(Talaq)’를 세 번 외쳐 이혼을 하는가 하면, 우편으로 ‘탈라크(Talaq)’를 세 번 적어 이혼을 통보하기도 하고, 심지어 SNS를 통해서 이혼을 통보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무슬림 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이혼을 당하면 생계 자체가 망막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혼법은 그 자체로 여성들에게 커다란 폭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인도의 헌법재판소에서 이 ‘탈라크(Talaq)’ 이혼법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수천 년 동안 인도에서 행해진 폭력으로부터 여성들을 보호할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조금만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거기에 신앙이라는 꺼풀이 하나 덮이면 사람들은 쉽게 상식을 잃어버린다. 아니 많은 경우에 상식을 지키지 못하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신앙의 꺼풀을 덮는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막 10:6-9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예정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남녀의 결혼이 주님의 예정하심으로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들은 남녀의 결혼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통한 선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것이 예정인가 자유의지의 선택인가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 즉 '가정'은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두 사람이 만났든,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통해 서로를 선택해서 만났든 간에 가정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므로 사람이 깨뜨리면 안 된다. 가정파괴야 말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흉악한 범죄다.

또한 부부간의 친밀한 관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관계를 져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관계를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이 하나님 뜻이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결혼을 해서 한참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전도사 부부가 있었다. 대부분의 신혼부부가 그렇듯 결혼은 처음이라 신혼생활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수십 년을 따로 살던 사람들이 한 이불을 사용하게 되니 얼마나 맞춰야 할 것이 많고 피곤한 일들이 많은지 그만 새벽기도를 며칠 빠지게 되었다. 그랬더니 담임목사가 전도사 부부를 불러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부부관계도 희생해야 한다.”며 “부부가 각방을 쓰라.”고 했단다. 이 일은 우선순위가 뒤바뀐 대표적인 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물론 신앙생활도 잘해야 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정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측면을 말하고 믿음은 구원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그리고 긍휼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한다. 분명 예수님은 신앙생활 자체보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긍휼과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세리와 죄인들을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또한 안식일에 굶주림을 달래기 위해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을 향해 핏대를 올리는 바리새인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2: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능통한 사람들이었지만 긍휼에 대해서는 다시 배워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의롭게 꾸미기 위해 죄가 없는 이들을 정죄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내가 옳게 보이려면 다른 이들이 잘못된 것처럼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어리석은 정죄의 길을 선택했다. 그들의 겉모습은 거룩하게 꾸몄지만 그들의 속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찼다. 하늘을 바라보는 거룩함의 모양을 취하고 타인을 낮춤으로 관계를 놓아버렸더니, 오히려 그들의 실상은 추악해졌다. 그들의 형편이 어찌나 추한지 예수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을 귀신 들린 사람에 비유하신다.

     

마 12:43-45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구원의 표적을 타인에게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찾기를 바라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의 비유에 사용된 ‘집’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오이코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족’을 뜻하는데, 가족 간에 있을 법한 ‘친밀한 관계’를 뜻한다. 여기에 착안하면 이런 해석이 가능하다.


우리는 늘 관계에서 큰 상처를 받는다. 마치 귀신이 역사하는 것 같이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모든 관계를 정리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대부분 우리 스스로를 정당화하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들을 악인으로 치부함으로써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통을 주는 관계가 정리되고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또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새로운 관계에서는 기쁨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지만 사실 깨끗하게 정비된 새로운 관계가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그 ‘오이코스’, '관계'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결국 또다시 귀신이 역사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미 관계 때문에 상처 입은 영혼에 또 다른 상처가 더해지면 나중 형편은 더 악화될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의 가족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관계에서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함으로써 나 스스로를 의롭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스스로 낮아지더라도 자비와 긍휼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거룩해지기 위해 하늘을 바라본다면서 관계를 놓아버린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거룩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다.


이 묵상을 하면서 참 힘들었다. 나 역시 어리석은 바리새인이 아닌지 돌아보는 동안  나 스스로를 옳게 보이려고 내가 나쁘게 말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부담되어 끊어버리고 정리해 버린 관계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높아지고 의로워지고 싶었지만, 실상 내 안에 썩은 것이 들어와 죄책감에 시달리고 심한 고통을 받았다. 깨끗하게 정리하면 모두 좋아질 것 같았지만 관계를 맺는 방식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면 결국은 악순환의 연속일 뿐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간증을 들었다. 외국의 한 공항에서 줄을 서 있는데 외국인 할머니 한 분이 새치기를 했다. 너무 화가 나서 항의를 하려는데 마음속에 ‘저분이 내 어머니라도 그럴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질문을 하고 나니 놀랍게도 그 할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었다. 불편하던 마음이 그렇게 편해졌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는 의로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얘기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물론 의로움도 원하시지만 그보다 더 사랑을 원하신다. 의인인 체하는 바리새인 같은 내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싶어도,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의로움을 드러내고 싶어도,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관계를 열어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바라보다 놓아버린’ 의로운 모습의 바리새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나누는 사랑의 가족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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