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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태현 Feb 22. 2019

바리새인과 나 06
자율주행

바리새인과 나 #06





요 9:39-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얼마 전, 멀리 다녀올 일이 있었다.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일곱 살과 여덟 살 남자아이 둘을 둔 한 엄마의 사연을 듣게 되었는데, 듣다가 한 참을 웃었다.


지금은 일곱 살이 된 둘째 아들 얘기였다. 둘째 아이가 다섯 살이었을 때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단다. 하루는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는데, 아이가 엄마의 등 뒤에 대고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란다.


왜? 맨날 왜? 여기다가 나를 집어넣고 가는 거야?


다섯 살짜리 아이가, 자기가 알고 있는 단어로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말이 참 재미있었다. 라디오의 진행자와 패널들이 포복절도하며 웃었다. 나도 그 상황이 마음에 그려져서 정말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런데 불쑥 한 여성 패널이


아! 어떻게. 엄마 진짜 속상했겠다.


라는 말을 던졌다. 그 순간, 아이의 표현이 귀엽기는 하지만, 아이를 맡기는 엄마의 입장에서는 그 귀여운 오해의 말조차 속상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사연이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아이가 일곱 살이 되고 나서는 달라졌단다. 얼마 전에 둘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데 이번에는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는 참 힘들겠다. 맨날 형아는 학교에 갖다 주고 나는 어린이집에 갖다 주고, 또 있다가 가지러 와야 되니까 말이야.


이 말을 듣고 라디오 속의 사람들도, 나도 한바탕 또 웃었다. 그러나 이번 웃음은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웃음이었다. 어설픈 표현은 아직 여전했지만, 2년 만에 오해에서 이해로 자라난 아이의 마음을 생각하니 진심으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때로 오해는 일을 우습게 만든다. 하지만 이해는 항상 흐뭇하게 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오해하며 하는 신앙생활은 그 신앙생활 자체를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이어야 나도 만족스럽고 하나님께서도 흐뭇해하실 것이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과 자유의지에 관한 것이다. 이 오해에서 비롯된 질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이런 거다.


하나님은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드셔서 사람을 죄짓게 하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한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이기에 좋은 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신앙은 미련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또한 신앙도 그런 게 아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에덴동산에 있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는 심지어 하나님 반대편에 설 수도 있을 만큼 완전한 자유였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기에 완벽한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연인이 되는 것은 일방적인 한쪽만의 선택으로 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사랑이란 상대방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사랑을 강요할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건 더 이상 사랑이라 할 수 없다. 일방적인 폭력일 뿐이다.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당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에게 사랑으로 선택받기를 원하신다. 모든 가능성을 다 막아놓고 강제로 사랑하도록 만드시지 않았다. 에덴동산에 심겼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담겨 있는 자유의지의 위대한 선언이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자유는 죄를 짓는 데 사용할 수도 있고,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할 수도 있고 바라볼 수도 있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도 있고 내 마음을 따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따른다. 선택의 결과에 따라 크나큰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선과 악, 하나님과 세상, 계명과 마음, 이런 선택지를 놓고 고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이 선택지의 결과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따라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무거울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당연히 선을 행해야 하고, 하나님을 선택해야 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이미 하나님은 잘못된 선택을 한 인간들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다시 주셨다.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써 그 일을 이루셨다. 조금만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리고 조금만 지혜가 있다면 방향이 어떠해야 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명백한 방향을 선택하며 살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보다. 바리새인들은 이 쉬울 것 같은 선택 때문에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받았다.


마 23:16-22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성전과 금,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제단과 예물 중에서 무엇이 더 비중이 있는가? 이 모든 것들과 하나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크고 귀중한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명쾌한 판단이 가능한데도, 바리새인들은 어처구니없게 잘못된 선택을 했다. 방향을 전혀 잘 못 잡았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을 ‘눈먼 인도자’라고 부르셨다.


인간이 마음껏 사용해야 할 자유는 방향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길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올바른 방향을 먼저 선택하면, 가는 길은 자유롭게 선택해도 좋다. 가야 하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제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고속도로로 빠르게 달려가 목적지에서 잠시 쉬어도 좋고, 여유롭게 경치가 좋은 국도로 여행하며 과정의 기쁨을 누려도 좋다. 때로는 중간에 어딘가를 들렀다가 간다 해도 나쁠 것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신앙의 여정을 생각하다가 문득 자율주행을 떠올렸다. ‘완전히 자유로운 여행’, 자율주행의 의미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이제 운전의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면 자동차에게 운전을 맡기고 쉬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기술이 발달하고 보완되면 대부분의 자동차가 자율주행을 함으로써 교통 혼잡이나 사고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수 있다고 한다. 누구나 가장 안전하고 빠르게, 또는 만족스럽게 여행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하고 만족스러운 여행은 자유로움이 보장되는 자율주행이라는 말이다. 신앙의 여정도 마찬가지다. 주님은 나의 신앙 여정이 온전한 자율주행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은 자유하라고 하신다. 여행이 자율주행을 통해 완전해질 수 있듯, 진정한 신앙 또한 자율주행을 통해 완성된다. 자율주행하는 신앙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구원의 길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이다. 그러면 자율주행하는 신앙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완벽한 자율주행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지형은 바뀐다. 현대에 들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십 개월 만에도 강산이 바뀔 수 있다. 한 때는 먼 길을 여행할 때면 지도책을 펼쳐놓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지도를 펴놓고 지름길을 잘 찾는 사람이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위성항법장치인 GPS가 등장했다. 이를 이용한 내비게이션은 가고 싶은 장소를 입력하기만 하면 어디든 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보다 더 발전된 형태인 자율주행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정밀지도’와 ‘위치추정’이라고 한다. 시시각각 바뀌는 도로의 상황을 정밀하게 알려주는 지도가 필요하고, 지금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근대 이전의 시대에는 도로가 크게 바뀐다거나 별다른 도로 상황이랄 것이 없었다. 그저 종이에 그린 지도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자율주행 시대에는 도로 상황과 현재의 위치가 포함된 모든 정보가 필요하다. 이제는 외적으로 보이는 그림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정보, 그 내용들이 모두 합해져 하나의 지도가 된다는 얘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니, 신앙의 자율주행을 위한 정밀지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온전한 자율주행 신앙에도 정밀지도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진리’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니, 진리는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다. 따라서 진리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계명이다. 온전한 자율주행 신앙이 반드시 따라야 할 지도는 사람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받았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올바른 신앙의 길로 가고 있다고 말했고, 다른 이들도 자신들을 따라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잘못된 지도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5:8-16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예수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그 마음은 전혀 그렇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라고 책망하신다. 또한 아직 바리새인들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보시면서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하며 안타까워하신다.


눈으로 보이는 신앙의 행위로 사람의 속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신앙의 중심은 사람의 겉을 바꾼다. 참된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는 겉에서부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속에서부터 바뀌어 겉까지 바뀌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는 행동이 아니라 내용이다. 그 내용, 그 진리가 안에 있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다시 말해 온전한 신앙의 자율주행은 하나님의 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누군가를 유혹해서 죄짓게 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를 주셨다. 스스로를 오해해서도 안 된다. 자유가 있다고 모든 것이 다 유익한 건 아니다. 신앙의 방향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 그래야 편안하고 만족스럽다. 내 맘대로의 지도를 갖는 게 아니다. 온전한 신앙의 자율주행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얼마든지 자유롭게 길과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전혀 업데이트되지 않는 내 나름의 지도를 따라 자율주행한다면 큰 사고를 겪게 될 것이다. 시시때때로 업데이트해 주시는 신앙의 정밀지도를 따라가야 한다. 거기에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삶이 있다.


길도 모르면서 안다고 하지 말자. 눈먼 안내자가 되지 말자.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자. 하나님께 가르쳐달라고 구하자.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주님께서 내 눈을 보게 하실 것이지만, 본다고 하면 결국 주님의 정죄를 받는 바리새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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